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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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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우리 곁에 머문다.

『총, 균, 쇠』의 저자로 유명한 제래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60년 문명 탐사의 결정판으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를 출간했다. 『총, 균, 쇠』를 비롯하여 그 이전에 저술한 책들이 인간과 국가 그리고 문명의 과거를 추적한다면, 이번 『대변동』에서는 미래를 향한다. 애초 생리학을 전공했던 그는 그 외 다른 분야인 역사학, 지리학, 언어학, 인류학,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압도적인 배경지식과 비교 연구 방식, 그리고 스토리텔링으로 각 국가가 겪었던 위기들을 총합하고, 이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위험들을 집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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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위기에 직면한다. 그 위기는 나와 다른 외적 대상에 의해 발생할 수 있고 내적인 갈등(정치적 갈등, 쿠데타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 위기가 지닌 빈도와 기간, 그리고 영향력에 따라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위기는 ‘중대한 위기’이다. 개인으로 비유하자면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놓이거나 개인의 생명이 끊어질 뻔한 사건 같이 극단적이고, 위험한 위기이다. 저자는 개인이 경험하는 중대한 위기를 국가로 확장한다. 개인이 경험하는 위기와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은 국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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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개인과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렌즈를 사용해 국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심리치료사들이 찾은 개인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12가지 요인이 국가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위기를 바라보는 12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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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 상태의 인정,
(2) 무인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6) 자아강도(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함)
(7) 정직한 자기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9) 인내
(10) 유연한 성격
(11) 개인적 핵심 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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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기준틀을 국가적 차원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다. 첫 번째는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이다. 이는 국민이 그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이다. 국가가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리더들의 적극성, 그리고 책임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울타리 세우기이다.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이며, 그 문제가 어떤 대외적인 환경 속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이다. 다섯 번째는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다른 국가의 사례를 찾는 일이다. 여섯 번째는 국가의 정체성의 정도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추상적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국가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정직하게 자기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여덟 번째는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를 통해 교훈을 도출하여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국가가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열 번째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이며, 열한 번째는 국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이다. 국가는 지리적 위치와 국부 및 군사력, 정치력의 차이로 선택의 자유에서 제약을 받는다. 지정학적 제약은 약소국, 그리고 중견국가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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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국가 정체성 
(7)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평가
(8)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9)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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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준거들을 통해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선별한 국가들이 어떻게 위기를 겪었고,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 국가는 외부적 요인으로 갑작스런 변화를 맞이한 핀란드와 일본, 내부적 갈등으로 위기에 처한 칠레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점진적으로 확대된 위기에 시달린 독일과 오스트레일리아이다. 과거 국가의 영광, 몰락 그리고 극복 과정을 보여주고 난 뒤, 저자는 현재진행형인 위기에 대해 논평한다. 지금 일본은 국가부채가 너무 많고, 여성 혐오가 만연하며,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가 점차 붕괴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이 해외 자원 장악 욕심이 과하고, 과거 식민지배 시절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피해자로 생각하며, 엄격한 자기평가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일본은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국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저자의 조국은 어떤가? 다이아몬드는 현재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정치적 타협은 갈수록 불가능한 일이 됐고, 복잡한 유권자 등록 시스템으로 인해 미국의 투표율은 전 세계 민주국가 중에서도 항상 최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불평등이 심화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신분 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폭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이 이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미국이 유럽, 아시아 등과는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로 인한 자부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에 닥칠 위기인 ‘핵무기,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부의 불평등문제’를 언급하며 12가지 기준에 따라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기는 먼 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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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와중에 대한민국은 분명한 위기에 마주했다. 일본과의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일본은 자국의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첨단 기술과 전자 부품을 수출할 때 허가 신청을 면제하는 국가를 ‘백색국가’로 지정한다. 일본은 이렇게 지정된 국가를 안보 우방 국가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안보 위협 국가로 규정했다. 또한 우리나라에 일부 소재 물품 수출을 규제하여 한일간 무역 분쟁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조치로 대한민국 내부에선 일본 불매운동을 통해 NO 재팬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文정부과 여당은 극일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에서 끝나지 않는다. 북미간 판문점 회동 이후 뚜렷한 북미 접촉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연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여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독도 영공을 침범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내부 문제인 이념 갈등, 성별갈등, 제노포비아, 청년실업 등도 마찬가지로 위협적이다. 하지만 난 대한민국이 처한 외부적 위협을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12가지 기준 틀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현재 처한 위기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가? 지금 채택한 방법은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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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은 현재 처해진 위기에 대해 대체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편이다.(요인1) 그 원인이나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서 불매운동을 펼치고, 북한과의 평화를 바라며 한반도의 안보 위협이 해소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이고 독자적인 언어인 한글을 갖고 있어서 국가 정체성이 상당히 강하다(요인6). 그리고 식민지배, 6.25 전쟁과 같이 대한민국은 거대하고, 완전하며, 그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있는 위기를 겪었다(요인8). 하지만 그 외엔 우리나라에게 적용될 만한 기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이야기한 기준틀마저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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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제약(요인12)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반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분단이란 현실로 인해 육로를 통한 대륙 진출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주변의 강대국(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은 대한민국의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입지를 축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남중국해를 넘어서 인도양으로 확장했다. 두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 패권경쟁에 의도치 않게 휘말릴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자율권은 강대국들에 의해 제약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정직한 자기평가(요인 7)가 절실히 부족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대한민국은 울타리 세우기(요인 3),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요인 10), 국가의 핵심가치(요인 11),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요인 4) 국가적 책임의 수용(요인 3) 등 전반에 대해 오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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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과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더욱 중요한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 현재 미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모두 아베의 작품이다. 2006년 1차 아베 내각은 미국-일본-호주-필리핀-인도를 통해 중국을 포위한다는 ‘자유와 번영의 호’ 전략을 제시했다. 이 전략은 훗날 제2차 아베내각이 2015년에 제시하게 된 ‘인도-태평양 전략’의 초석이었다. 아베는 2017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트럼트 대통령에게 소개했고 그는 이 전략을 이후 미국의 전략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미국-일본-인도-호주가 협력하여 중국의 급격한 부상을 견제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2017년 발표한 『National Security Strategy』(국가안보전략)에서 미국의 주적을 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미국에 위협이 되었으며,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자 한다. 최근 미 국방부가 발간한 『Indo-Pacific Strategy Report』를 보면 대만을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할 때 맺은 ‘하나의 중국(대만의 독립 부정)’ 원칙을 폐기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국을 보편적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현상타파국가로 지목했다. 즉 차후 미국이 주된 위협국가는 북한이 아니다. 중국이다. 『Indo-Pacific Strategy Report』는 일본을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번영의 초석(cornerstone)’으로 규정하고 일본이 미국의 입장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한다. 반면 한국에 대해선 ‘평화와 번영의 핵심국(linchpin)’이라고 언급할 뿐 미국의 입장을 따른다는 말도, 인도-태평양 범주에 함께한다는 언급은 없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입장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미국 최고의 동맹국인 기밀정보 동맹 ‘Five Eyes’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Five Eyes’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명권을 공유하는 국가들이다. 영어를 사용하지도, 같은 문화, 문명을 공유하지 않는 일본이 그들과 협력을 추진한다는 사실은 미일의 공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베가 미일 동맹을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수준으로 비유한 건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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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행보를 군국주의의 부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일본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환영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어 자국의 군사적 행보에 동참하는 것을 항상 요구해왔다. 세계적인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전문가이며 클린턴 정부 시절 국방부 국제안보를 담당했던, ‘소프트파워’로 유명한 조셉 나이는 “The Us-Japan Alliance Report”를 통해서 동맹 협력을 제약하는 일본 헌법 수정, 그리고 일본 군대의 해외 배치 허가 법안 등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일본은 지극히 최근까지도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을 1% 미만으로 유지해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3% 이상을 유지해왔다. 절대적 비용으로 비교해보면 분명 일본의 국방비 지출은 우리나라보다 많다. 하지만 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중이 보여주는 것은 그 국가가 ‘국가 안보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관심을 두고 있느냐?’이다. 미국의 GDP는 19조 3천억 달러에 달하고 국방비 또한 7천억 달러로 GDP에 3%를 차지한다. 미국은 세계금융위기 당시 GDP는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국방비는 유지하여 그 비중이 GDP에 4~5%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에 반해 일본은 국가 안보 자체를 미국에게 의존하고 그 비용 전반을 경제 성장에 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군국주의 추구한다는 해석은 다소 현실과 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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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중국과의 패권경쟁에 대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이 지금까지 부담했던 안보비용을 줄이고 온전히 중국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일본과 한국뿐 만이 아니라 EU에게도 방위비 분담금과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상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짙어지자, 유럽대륙에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열전에 대한 우려가 번졌다. 미국은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할 최초의 방어선인 서독의 재무장이 필요했고 이를 추진했다. 프랑스, 영국 등의 반발에도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췄다.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아데나워는 재무장에 대한 국내 반대여론이 과반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끝내 재무장을 실현한 목적은 주권을 회복하여 독일을 정상국가로 만들고자 함에 있었다. 미 부르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위원이며, 미국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과 유럽의 역할 차이를 곰과 사냥꾼에 비유한다. 사냥꾼이 칼을 들고 곰을 마주치게 된다면, 사냥꾼은 곰에 대항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곰이 그냥 지나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사냥꾼이 총을 들고 있다면 곰을 죽여 위협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다. 즉 힘을 가진 자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자 하며, 근거 없이 평화를 바라는 것은 단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평화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케이건은 충분한 군사력 없이 낙원을 만들고자 하는 유럽의 행태를 이상주의라고 비난하고 그 낙원은 오로지 미국의 힘 덕에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여 평화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미국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 국제적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는 미국의 입장을 전격 수용하여 평화헌법을 수정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정세가 돌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만약 무작정 일본의 군사화를 반대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상치(相馳)한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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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는 마치 한미 동맹이 미일 동맹보다 중요한 것처럼 간주한다. 북미간 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들은 일본이 그 대화에서 끼어들지 못하는 이른바 ‘일본 패싱’을 인용한다. 하지만 미국의 주된 위협국이 중국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북미간에 대화는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북한이 친미화하는데 성공한다면 중국의 영향력을 그만큼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일본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패싱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중국과의 대립구도는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에게 충분히 매력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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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시장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를 따른다. 우리의 가치는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부합한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한국의 중요성은 크지 않은 듯하다. 이 전략의 중요한 축은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이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가 다이아몬드 형태의 협력 구도를 구축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네 국가를 선으로 잇는다면 다이아몬드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라고 명명되었다. 이 동맹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가치동맹이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애초에 일본은 이 전략을 제시할 때 우리나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중국의 패권전략인 일대일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정작 ‘인도-태평양’ 참여에는 소극적이다. 또한 일본의 무역보복에 우리나라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폐기를 꺼냈다. 이 카드는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겠지만, GSOMIA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한미일간 주요 안보 채널이다. 이를 폐기하겠다는 것은 명백히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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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경두 굮방부 장관과 미국의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에스퍼 장관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GSOMIA의 유지를 희망했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미국이 징용문제가 끝났다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의향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국이 꺼내든 카드는 미국의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섣불리 친중 노선을 취했고(요인11), 해결해야 할 국가의 문제가 어떤 대외 환경에 속해있는지 오판하여 울타리를 잘못(요인 3) 세웠다. 미국의 지원도 불명확(요인 4)하며, 우리가 지정학적 조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확히 평가(요인 7)내리지 못했다. 또한, 현 정부는 불매운동과 반일 정책 외에 다른 뾰족한 수(요인 10)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때마침 나의 아버지가 반도체 관련 사업을 20년 넘게 유지하고 계신다. 덕분에 일본 반도체 기술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한국제 반도체의 가격은 일본의 대략 1/10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싼 가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버지의 기기에선 국산화 반도체를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국산 제품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도체는 엄밀한 검증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고장도 잘 나지 않고, 그 수명 또한 길다. 반면 국산 제품은 고장 나기 쉽고 수명도 짧아 사용할 수 없다. 반도체 부품이 한 개라도 망가진다면 전자 기기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따라서 부품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국산화 생산을 강화한다고? 그 기술력의 격차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을까? 가능했다면 왜 지금껏 하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야 시작한단 말인가? 일제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국산 제품의 품질을 개량하면 다른 중소기업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다. 시간은 충분했고, 우린 그 시간 동안 나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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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역사적으로 무수한 국가 위기를 겪었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고, 6·25전쟁으로 분단의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우린 이 위기로부터 무언가 교훈을 얻었는가(요인8)? 우리는 여전히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도덕적 정당성 문제에만 빠져있는 것 같다. 국제관계는 도덕의 영향력이 지극히 미비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린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을 수용(요인2)해야 한다. 우린 이 교훈을 『대변동』에서 핀란드의 예시(요인 5)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는 자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소련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의 사망자는 거의 10만에 달한다. 이는 당시 핀란드 총인구 370만 명의 2.5%였고, 남성의 5%였다. 거기에 핀란드는 전 영토 1/10을 소련에 양도했다. 거기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과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 이 일은 후에 연합군에 의해서 문제시되었고, 졸지에 핀란드는 전범국이 되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핀란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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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소련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소련의 걱정과 예민한 심기를 다독거리기 위해 다른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치를 취했다. 전시의 지도자들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고 징역형을 구형했다. 또한 긴급조치법을 통해서 대통령 선거를 연기했고, 언론을 통제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핀란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핀란드의 사정을 몰랐다. 그들은 핀란드의 정책이 자주적인 자유를 포기한 개탄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하며 ‘핀란드화’라는 경멸적인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이 오명은 핀란드에 대한 오해이다. 핀란드는 조국의 독립이란 핵심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으며, 이웃한 소련의 위협에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민주주의란 명분보다 국가의 독립이란 실리를 추구해 독립을 유지했다.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서 이토록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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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침략으로 많은 국민이 죽었고 과부나 고아가 되었다. 그럼에도 핀란드의 재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냉혹했다. 자신이 약소국인 것을 깨달았고, 소련에 영원히 저항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다. 그들은 경제적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조금 희생하더라도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해 모욕을 감수했다. 우리는 어떤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위안부 그리고 강제징용에 대해 부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감정적으로 나오기 쉬운 상황이다. 이로 인해 현 정권은 일본보다 북한과의 평화협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세계 최하위 국가인 북한과 협력해봤자 세계 GDP 3위인 일본을 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리고 북한과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분명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북한과 전례없는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을 뿐이지, 다시 갈등 관계로 회귀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변수는 충분하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가지 옵션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옵션은 한미일간의 공조에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그 옵션을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갈등에서 미국은 일본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외교적 고립에 놓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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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정답이 아니다. 중국은 러시아, 홍콩, 대만, 인도 등 국경과 인접해 있는 국가 및 준 국가들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과 팽창은 주변국들에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 경제협력보다 더 포괄적인 협력을 취한다? 이를 미국이 반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여야 할 미국이? 미국이 없는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무법지대이다. 미국의 도움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중국은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린 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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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압도적이지 않다. 따라서 일본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전혀 대한민국에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과거사에 얽매여 일본을 동맹국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인다면 우린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다.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위안부 합의를 현 정부가 성급히 폐기한 것은 오판이었다. 분명히 졸속히 체결된 합의이고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 대 국가 맺은 합의였기 때문에, 그 합의를 체결한 우리에게도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폐기 처분하여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은 그 책임을 모조리 일본에 전가하겠다는 명분에 사로잡힌 그릇된 판단이었다. 국제관계는 명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국가이익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반일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린 대체 반일을 통해서 어떤 국가이익을 얻겠다는 것인가? 일본이 항복하면 그것이 정녕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 부디 이 상황을 포퓰리즘으로 이용하여 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현 국제지형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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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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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의 유럽은 그야말로 어둡고, 절망적이며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1914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제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리고 1929년에 닥친 대공황은 인플레이션, 대량실업, 그리고 혁명적 불안을 야기했으며, 1939년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은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럽 전역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시대는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었고 어떤 행동도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을 무의미한 축제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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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파괴된 세상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대적 어두움을 이해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답습하지 않도록 노력한 여러 인물들의 처절한 지적 헌신은 혁명적 운동, 철학적 성찰, 문학적 표현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이 활동했던 정치적 어둠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그리고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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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인물들은 잃어버린 세대라고 표현된다. 잃어버린 1세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전쟁터를 통해 처음으로 세계에 참여한 사람들이고, 제 2세대란 대공황으로 사회의 불안전함을 깨우친 사람들이다. 마지막 3세대는 나치 강제 수용소, 전범재판 등으로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 시기의 인물(일정한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뛰어난 사람)들은 세상의 어둠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두움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정치 공간이 상실됐을 뿐 아니라 개인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추동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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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어인 ‘어두운 시대’를 정치적 은유로 수용하여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밝음과 어둠의 공존과 대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렌트가 어둠과 밝음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란 제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면 아렌트의 철학 전반을 오독할 수 있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내면을 어둠과 연계시킨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동기를 품고 있는지는 보호받아야 한다. 만약 자신의 내면이 공적인 빛에 의해 벗겨진다면, 우리는 고독한 사유의 자유를 침해당할 것이다. 두번째로 아렌트는 사적 삶을 어둠으로, 정치적 삶과 공공영역의 특성을 밝음으로 묘사한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인 집은 은폐된 것이다. 공공의 빛이 집안까지 비춰진다면 우리는 편안한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반면 공공영역 즉 정치영역은 서로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공개적이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말’로 표현하는 공간이 공적영역이기 때문에 은폐된 사적 영역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아렌트는 공공영역에 빛을 발휘하는 인간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건강한 정치가 유지될 수 있고 인간의 공존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공공의 빛이 조작된 형태로 모든 사적 공간을 비추고자 하는 경우, 정치의 어두움이 드리운다. 그것이 전체주의 사회를 지배한 어둠, 칠흑같은 어두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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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사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어두운 영역에 강제적인 빛을 비춤으로써 사적 영역과 공공영역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방법은 비밀 경찰과 테러, 거짓말 그리고 상호 고발을 동원한 총체적인 감시로 이뤄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고립되어 사생활마저 파괴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이 고립을 가장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서 삶을 영위해왔기 때문에 어둠과 밝음은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만들어낸 파괴는 인간세계를 사막화 했으며, 절망만을 확산시켰다. 그리고 나치즘이 보여준 어둠의 또다른 모습은 인간조건 전반을 파괴했다는 것에 있다. 어두운 시대는 공간을 파괴한 것을 넘어서 인간 조건인 삶, 다원성, 탄생과 죽을 권리 모두 부정했다. 집단 수용소는 어둠의 모델이었으며, 조건이 파괴된 인간은 껍데기, 혹은 잉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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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두운 시대는 개성을 상실했고, 사람들의 기본적 도덕관마저 부정당한 시대였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은 마치 지옥과도 같다. 이 시기는 모든 정치적 빛을 상실했고, 건강한 어둠은 왜곡됐다. 새로운 시작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어둠이 바로 전체주의의 어둠이다. 하지만 어둠은 민주주의 시기에도 찾아온다. 아렌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거짓된 정보를 바탕으로 베트남 전에 참전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며, 케네디 전 대통령도 암살당하는 등, 미국의 시대적 배경은 마치 ‘공화국의 종말’과 같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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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어느 시대라도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고, 생각하는데 나태해질 때 찾아온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칠흑 같은 어두운 시대라도 빛을 밝히려 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은 정치적 사유를 통해서 어둠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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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싱의 위대성은 …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즐겁게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논쟁의 종식이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이 논쟁의 종식은 곧 인간성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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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소개되는 레싱은 사유의 중요성을 피력한 인물이다. 그는 진리와 정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는 정해진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사유라는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렌트가 훗날 이야기할 정치에서 공적 영역의 회복을 외친 초기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인식의 효모’를 유포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이 효모라는 은유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요소를 의미한다. 즉 인간 개개이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절대 진리는 그 과정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 진리가 존재하게 되면 대화의 종언으로 이어진다. 나치즘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마치 ‘진짜 반지’ 인냥 사람들의 복종을 강제했고, 덕분에 정치 영역은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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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는 도덕적 문제 때문에 일차적으로 혁명에 관여했다. 이러한 관여는 로자가 공적인 삶과 공공업무, 그리고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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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자 혁명가이다. 여성의 정치적 참여가 터부시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로자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는 등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의 운명에 정열적으로 참여한 공적인 인물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비극적으로 암살당했지만, 후대의 정치 참여자들에 의해 이름이 언급되면서 ‘불멸성’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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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의 파멸이라는 공포에 기초를 둔 소극적 연대는 명료하지 않지만 적잖이 중요한 이해에 그 대응 방안을 지니고 있다. 즉 인류의 연대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할 경우에만 그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관념에 따라 개인적 ‘죄책’과 관계없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공적인 문제에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하여 우리를 감당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책임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시민으로서 책임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연대는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부담에 대한 공통된 반발은 정치적 무감각과 고립주의적 민족주의, 즉 인간주의의 회복에 대한 열정이나 욕구라기보다 현존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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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유대는 주관적으로는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이며 객관적으로 보편적 이해 가능성이라는 사실이다. 인류의 통합과 유대는 하나의 종교, 철학, 또는 한 정부형태에 대한 보편적 동의에 있는 게 아니라 복수성이 다양성이 의해 동시에 은폐되면서도 노출되는 유일성을 지향한다는 신념 속에 존재한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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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스승이자 친구인 야스퍼스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에서 유일하게 두 챕터를 소비해가며 그를 소개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공공영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동정심, 형제애, 박애 등과 같은 인간애를 후마니타스라고 명명한다. 야스퍼스는 유대인 부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쫒겨났지만, 그 철학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고 세계사랑과 후마니타스를 외쳤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진정한 연대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세계 시민들이 “무한한 소통을 향한 의지”로 나아갈 때, 후마니타스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야스퍼스는 정치적 악과 타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망명하면서도 공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위기의 시대와 순응의 시대”에서도 사유의 힘, 그리고 사람들을 믿었던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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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제외하곤 대부분 극작가, 시인, 평론가 등 문학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설명한다.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베냐민, 브레히트, 나탈리 사로트, 오든, 자렐 등은 문학영역에서 그들의 사유활동 전반을 보여주며,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우린 아렌트의 은유적 표현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 제목에서부터 ‘어두운 시대’라는 시어를 따왔듯이 아렌트는 정치 이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언어를 표현할 때만큼은 시적인 은유를 사용한다. 레싱의 말을 인용하며 사용한 ‘인식의 효모’, 진리를 묘사한 ‘진짜 반지’, 그리고 빛을 밝히는 ‘조명’과 극단적인 빈곤을 말하는 ‘어둠과 매서운 추위’는 모두 시적인 메타포이며, 아렌트는 메타포를 통해 사유와 행위를 연결하고자 했다. 형이상학 전통은 이데아라는 정신적 삶(빛)과 현상이라는 활동적 삶(어둠)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 오류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신활동에 참여할 때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아렌트는 두 영역 사이에 놓인 심연을 좁히는 방법을 찾았으며 그것이 바로 사유 언어 즉 은유(메타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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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은유를 통한 사유와 행위를 조응하고자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학가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대한민국의 어두운 시대, 식민지 지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처절하게 항쟁한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펜으로 일제에 저항한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와 같은 저항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기 성찰을 보여주었으며 노골적으로, 혹은 메타포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그들은 정신과 행위를 연결하는 메타포를 통해서 정치적인 빛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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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예술가의 잘못된 행동은 고대 이래로 정치문제였으며, 때로는 도덕문제였다. 나는 이러한 사례에 대한 다음 논의에서 두 가지의 가정을 고수할 것이다. 첫째, 괴테는 일반적으로 옳았으며 평범한 사람들보다 시인들로부터 더 많이 인정을 받았다고 시인들도 중대한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완전히 짊어져야 한다. 둘째,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 좋은 시행을 쓰는 능력은 시인들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도움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능력을 부여받았어도 그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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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예술”의 마굴에서 벗어나 “모든 미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의 힘 속에 투입하는 것”이 현대 문학의 특별한 사명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은 모두 브로흐가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원칙이었다. 그는 윤리의 절대적이며 신성한 탁월성과 행위의 탁월성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특이한 근대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는 이 근대성 때문에 갈등과 어려운 문제에 의해 결정된 삶 속에서만 근본적 태도와 자기 품성의 근본적 요구조건을 표현해야만 했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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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을 찬양했지만 동베를린에 정착해 공산주의의 현실을 깨달은 브레히트처럼, 예술은 공적 영역으로 발표된 직후, 사람들의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작품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벗어나 예술 속에는 미적인 것, 윤리적인 것들이 투입해야 한다는 브로흐의 말처럼, 예술 그 자체론 불충분하다. 예술은 인간을 정치적 삶으로 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짜를 퍼트려 인간을 순응화, 잉여화 할 수 있는 만능 도구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인간을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차원을 개방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상향만을 책임없이 퍼뜨려 사람들을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으로 끌고 갈 것인가? 정신과 활동의 심연은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과 예술가는 그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는 연결되어 있다. 공적인 삶을 무시하고 책임 없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그것은 기만을 낳고 혼돈을 초래할 것이며,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위험을 끌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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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쉽지 않은 책이다. 은연한 메타포는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번역하신 홍원표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렌트가 사용하는 메타포 때문에 번역에 상당히 애 먹었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메타포는 아렌트의 사상체계를 꿰뚫는 중심적인 방법론이기 때문에 곱씹으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렵더라도 시간을 들여가며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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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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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서 읽게 된 이유는 방학 기간 동안 공부할 한나 아렌트 철학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니체 전문가이자 한나 아렌트의 초기 저작인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을 번역한 이진우 교수님이 바라보는 아렌트를 들여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철학자 중에선 니체와 한나 아렌트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 군 생활 시절 니체의 대표 저서들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안티 크리스트」 「도덕의 계보학」 등을 읽었다. 그리고 아렌트의 저서는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을 읽었다. 「인간의 조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이 그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진우 교수님의 주된 분야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에는 니체와 아렌트가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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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니체와 아렌트의 철학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일단 니체는 아렌트와 달리 정치 철학에 대해서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주의만큼은 비난했다. 민주주의란 자신들의 행위를 선함으로 포장하고, 나약하고 저급한 도덕 원칙인 ‘노예의 도덕’을 따르는 대중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천민적 가치가 국가 경영에서 지배적 가치가 되면서 정치는 빠르게 천민화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위버맨쉬’ 즉 현재의 자신을 계속해서 넘어가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보유한 ‘초인’이 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위버맨쉬’ 개념은 생물학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정신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때문에 니체 사후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는 그의 유고를 조작해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의지」를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초인은 우월하고, 현재의 도덕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도덕서판을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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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각에서 보면 니체와 아렌트는 접점을 찾아볼 수 없다. 니체의 사상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기도 했지만(물론 니체는 나치즘을 철저히 반대했다. 그는 반민족주의자였다.) 아렌트는 철저히 전체주의를 해석하고, 전체주의를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았던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 니체와 아렌트 사이에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리를 배척했다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격언인 ‘신은 죽었다.’는 신이라고 의인화되는 절대적 진리가 19세기 허무주의와 함께 도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새로운 가치는 도덕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현실에 적용가능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힘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도덕적 현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선악의 저편의 구절에서 보듯이 니체는 도덕이란 해석의 여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 사회적 가치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라 점,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란 점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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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의 폭력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었다. 그 신분과 경험은 아렌트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아렌트의 관심은 오롯이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쓸모 없는 잉여물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도덕적 개별적 인격을 모조리 파괴한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도 없고 정치적 활동이 벌어지는 ‘공적영역’이 이해관계에 잠식하게 될 때 전체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고 「인간의 조건」에서 밝힌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석하여 그가 철저하고 완벽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알지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그를 통해 아렌트는 이젠 너무나 대중화되어 진부해진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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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유의 과정 속에서 아렌트는 정치영역의 회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개개인의 의견들이 보장되는 ‘공론 영역’에서 정치를 만들어낸다. 아렌트는 정치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이 자유로움 속에서 정치권력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적 힘이라고 명시한다. 즉 권력이란 개인들이 모여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만드는 공공의 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아렌트는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의견의 영역이다”라고 말을 함으로써 정치에서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진리는 비정치적이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이야기할 뿐 바뀔 수 있는 현실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는 개인의 의지를 통해서 도덕적 진리를 파괴했다면, 아렌트는 정치적 공동체, 공화주의를 통해서 정치 내부에 잠식한 진리를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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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민주주의를 노예의 정치라고 말하며 혐오한다. 그가 꿈꾼 이상사회는 귀족의 도덕, 즉 발전을 위해 나아가고 힘의 의지를 갖춘 귀족적 인간이 중심이 되는 정치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시민을 믿고 있다. 아렌트는 지배자의 등장이 시민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상실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란 정치적 평등이 이뤄진 상태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비지배 자유가 실현된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복잡하고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아렌트의 지적 여정은 마침내 정치적 판단 문제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 「정신의 삶」은 1부 사유, 2부 의지만을 완성하고 3부 판단을 쓰지 못한 채로 아렌트는 생을 마감한다. 그가 말하고자 한 정치적 판단은 도대체 무엇인가? 판단은 어떻게 현대사회에 남아있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배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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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판단의 해답을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 찾는다. 흔히 알고 있듯이 「판단력 비판」은 취미판단의 일종으로서 미학의 기반이 되었다. 아렌트는 정치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예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의 마음에 든다. 가령 특정한 장미가 마음에 들 때 우리는 아름답다고 판단할 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에는 객관적인 기준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민은 정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규칙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판단한다. 때문에 기초적인 정치 판단은 장미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미 판단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우리는 쉽게 정치인의 언행과 이미지 만으로 호감이 가는지 혐오감이 이는지를 판단하지 않는가? 하지만 아렌트는 이런 일차적인 정치판단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개별적인 사건을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치적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정치의 필수 조건은 다원성에 기초한 ‘공평성’이다. 공론 영역에서 다양한 행위자가 모이는 다원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자신의 생각을 공개하는 과정이 바로 ‘공평성’이다. 아렌트는 판단력이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다양한 인간들이 어울리는 사교에 있음을 강조하며, 공개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정치가 판단력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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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진리가 작동하게 되며 인간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그 진리를 정해준 자는 폭력을 지닌 자이며 그들의 총구는 사람들의 머리를 향해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강조될 때 전체주의의 싹이 자라난다. 아렌트는 인간의 사유능력에 희망을 갖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와 아렌트는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이 전복하고자 한 것은 공통의 진리이다. 아렌트는 진리를 정치영역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전체주의의 싹을 자르고자 했다. 그 사상의 조류는 정치 영역의 회복으로 촛불 혁명이란 실천적 행위로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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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 한길그레이트북스 15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한길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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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사상의 줄기를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한 이론가이다. 그는 정치를 종교와 도덕에서 분리했으며, 정치의 독자적인 영역을 요구한 정치가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오독됐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그 텍스트로만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생각을 내비쳤는지는 고려되지 않은 채, 마키아벨리즘은 “공익을 도외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관행”, 혹은 “정치라는 범주를 떠나 사회의 삶 속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처세방식”이란 형태로 해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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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키아벨리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홉스적, 플라톤적이라는 말에는 경멸적 의미가 거의 없지만,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말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악의 교사’로 독재자들의 정권 침탈을 정당화하고, 국가적 폭력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아이젠하워 역시 마키아벨리를 이론을 비판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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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대중적 이미지는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은 사적이익을 위해서 남을 거리낌없이 희생하는 방법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익, 특히 국가이익을 위해서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정치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가 총체적인 위험에 빠져 있을 때, 또는 국가 질서가 문란해지고 부패가 만연해 있을 때, 마키아벨리즘은 국가의 생존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국가를 위해’는 개인 혹은 특정 계급의 사사로운 이익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라는 총체적 집단,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중 그리고 개인들의 삶이 보장받는 공동선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개별 인간들의 권리 전반을 총체적으로 파괴한 전체주의 국가나, 군주 혹은 귀족 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순수한 군주정 그리고 귀족정을 옹호하진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최상의 정치체제로 공화정, 그 중에서도 기원전 500년 경부터 450년 간 이어져 내려온 로마공화정을 으뜸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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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저서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단연 『군주론』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출세를 위해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책이며 ‘새로운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군주’의 처세가 담겨있는 『군주론』이 가장 대중적이기 때문에 혹자는 마키아벨리와 공화정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출세를 위해 서술했다는 점에서 온전히 그의 생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은 『군주론』에 대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일탈이거나, 군주의 위선을 폭로하여 인민이 군주에게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식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저술했다 거나, 혹은 군주정은 공화정으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바라봤다는 등의 해석이 제시한다. 『군주론』은 메디치 가의 환심을 사기위해 일시적 필요로 저술된 것이지만 『로마사 논고』는 마키아벨리가 다소 자유롭게 저술한 책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로마사 논고』에 마키아벨리 본연의 생각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모두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정치’가 담겨 있지만 『로마사 논고』는 군주정이 아닌 공화국에 대한 옹호를 담았다는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의 본연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사 논고』를 필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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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로마사 논고』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논고』는 3장으로 나눠졌다, 제 1권은 성공적인 공화국 수립과 그 유지 방법이 담겨 있다. 제 2권에는 로마의 팽창이 그리고 제 3권에는 로마 공화정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고』는 『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무자비함의 유용성과 인간 본성의 악함을 더욱 정교하고 자세히 서술한다. 하지만 『논고』는 그 방법을 공화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법치질서를 확립하는데 집중한다. 마키아벨리는 혼합정부 형태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데,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지닌 성격을 모두 다 포함한 하나의 정체가 가장 견실하고 안정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여러 정부의 요소들이 함께 있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다. 이는 로마 공화정에서 원로원, 집정관 그리고 호민관의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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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고』는 법치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입법가는 모든 인간이 사악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말에서 치국(治國)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악함은 흔히 생각하는 싸이코패스적인 무자비한 폭력보다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생존추구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규제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통해 생존하게 된다. 그 형태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사사로운 복수로 불법적인 방법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국가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법에 의해 무분별한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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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군주, 귀족, 평민이란 계급적 차이, 혹은 그 사람이 나라를 수호한 영웅이든 상관없이 법은 공평한 저울이 되어야 한다. 로마의 호라티우스는 적장을 모두 무찔러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며칠 뒤 누이동생을 살해했다. 로마인들은 그가 쌓아 놓은 공적과는 상관없이 그를 처벌하고자 재판에 회부했다. 마키아벨리는 제 24장의 제목을 “잘 조직된 공화국은 시민에 대한 상벌제도가 분명하며, 공을 세웠다 하여 잘못을 묵인하지 않는다.”라고 붙였다. 마키아벨리는 호라티우스의 사례를 통해서 공정무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법만이 그 효력을 보장할 수 있고 공동선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피렌체의 정치를 극렬히 비판한다. 피렌체에선 사법적 권한을 외국인이 수행했다. 하지만 외국인은 쉽게 매수가 되어 영내 실력자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이에 피렌체는 8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사법 시스템을 개편했지만, 소수의 위원들은 항상 소수 실력자들의 앞잡이로 남아있었다. 법은 사람들에게 전혀 공정 무사하지 못했다. 기원전 로마 공화정이 알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중요시 생각한 공정한 법은 피렌체,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상관없이 이상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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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인민 그 자체를 믿진 않았다. 그는 평민이란 국가를 경영하는 자리의 적임자가 될 수 없고, 쉽게 자기기만에 빠진다고 말한다. 평민은 무리를 이룰 때야 대담해진다고 말하며, 개개인은 나약하다고 보았다, 또한 “광정에서의 정신과 시청에서의 정신은 다르다.”고 말하며 대중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와 실제 정치과정의 괴리를 분명하게 내비친다. 하지만 그는 다중은 군주보다 더 현명하고 더 안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 외의 다른 역사가들은 다중은 비굴하거나 거만한 속성을 갖고 있다며 그들을 폄하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다중을 비난하는 결함은 군주에게도 적용되며, 법률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자는 통제되지 않는 다중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즉 그가 비판하는 존재는 법 위에 서있는 통제되지 않은 자들이다. 마키아벨리는 잘 정비된 제도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인민은 군주만큼 침착하고 신중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악한 군주의 위험성을 말한다. “인민의 결함은 말로써 치유되지만, 군주의 사악함은 칼로써만 치유된다.” 는 말의 의미는 인민은 설득할 수 있지만 사악한 군주는 아무도 말릴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군주보다 인민의 입장을 수정하는 것이 훨씬 위험부담이 적고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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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군주와 인민의 역할을 구분한다. 군주는 국가를 창업하는 일이지만, 군주는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군주의 리더십으로 유지되는 국가는 지배자의 공백상태에서 쉽게 무너진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새로운 법제도를 설립하여 자신의 후대를 고려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민들은 이미 조직된 법을 보존함으로써 국가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군주와 인민의 ‘비르투(능력, 역량, 탁월함)’가 합치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생존을 영위할 수 있다. 법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는 개별적인 선이 아니라 공동선을 이끌어 오기 때문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부패한 시대에는 자유가 전복된다. 국가가 설립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법의 관습과 관례는 점차 깨지기 시작한다. 이렇듯 법이 제공하는 활력이 점차 꺼지고 부패가 축적되면서 공화국은 전복된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보전하는 인민들이 강력한 법 집행을 정기적으로 실행하여 사람들에게 법의 실효성을 상기시키고 두려움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들이 종법(從法) 태도를 유지하는데 성공해야만 공화국은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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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관심 분야가 바뀌었더라도 마키아벨리의 기본기조는 현실정치이다. 이탈리아의 혼란을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국가는 대체 무엇인가?” 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강력한 국가를 찾고자 했지, 정당하고 도덕적인 국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강력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의 질서가 우선 보장되어야 하고 국가적 행위에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데 있었다. 그 방법은 엄격한 통치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제국의 공화주의적 질서를 통해서 강력한 국가, 이탈리아를 통일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마키아벨리의 고뇌를 고려하지 않고, 그의 정치이론을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반영하는 정치가 아닌 철저한 공익을 추구했다. 현대 국제사회에서 보여주는 여러 독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 명예, 재산을 탐하는 것과 달리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지도자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존재이다.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 것인지 정당하지 않은 것인지,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 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라는 말에서 마키아벨리는 완전하고 완벽한 국가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정치 이상향은 두려운 면이 있지만, 법치 하에서 삶을 보전하는 건, 사적 이익에 몰두한 엘리트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무질서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최악을 피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현실정치의 무자비함을 꿰뚫은 인물이 마키아벨리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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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동양에서도 마키아벨리와 비슷한 수준의 합리성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바로 ‘상앙’이다. 중국의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 사이의 시기)는 외교와 권모술수, 하극상이 빈번했다. 또한 각 군주는 패권쟁탈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국강병론을 현실정치에 반영했다. 군주는 현실정치에 적합한 경세가들을 등용했으며, 그 중 법가는 각 국에 진행된 개혁조치들을 시행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진(秦)나라에서 활동한 상앙은 자기확신에 찬 철인의 내면을 보여주면서, 법치에 의한 강국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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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은 법을 통해 낙후된 현실을 타파하고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진행했다. 상앙은 인간이란 자기중심적이고 극단적인 이기심에 몰두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 이익추구가 무한정 방치될 경우 무질서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인간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법에 의한 통치가 필요함을 직시했으며, 형벌을 통해 인간이 평균적인 합리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상앙은 금지규범을 관장하는 법과 군주를 세워둠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재민지배 체제가 수립했으며, “종법은 종군이다.”임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법을 통해 자율적인 인간을 만들고 결과적으로 무위의 통치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법가의 최종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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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상앙은 상당히 겹친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이탈리아를, 상앙은 분열된 중국대륙을 통합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찾고자 했으며, 이는 뛰어난 리더와 완벽한 법, 그리고 철저한 공동선 아래에서 추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들의 기본적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근거로 법에 의한 통치를 정당화했으며, 인간 전반의 행동을 규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철저한 국가주의는 보편적 인민들에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요직에 앉지 못한 채 쓸쓸히 죽었고, 상앙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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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편적인 도덕이 작용하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이상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더 이상 명분은 작용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해야 할 때는 도덕적인 수단과, 정당화된 결과는 어떤 의미도 제공하지 않다. 국가가 어려울 때, 우유부단한 태도를 버려야 할 때 도덕은 부차적이다. 오로지 실리, 무엇이 국가이익인지 파악하는 문제만이 중요하다. 명분에 사로잡혀 우유부단한 태도로 기회를 놓쳐 버릴지, 공공이익보다는 사적이익에 사로잡혀 정치영역에서 이전투구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태를 보면, 우리는 현실정치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 합리성이 고대, 근대의 인물들보다 뒤떨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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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
필립 페팃 지음, 곽준혁.윤채영 옮김 / 한길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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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의 남편은 집안의 실세로서 아내의 행동에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너무나 애지중지한 나머지 아내의 행동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은 일상의 사사로운 행동에 관해서 거의 백지수표를 얻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유로운가? 말 한 마리가 저 드넓은 들판에 서있다. 그 말에는 고삐가 매어있고 안장이 갖춰있어서 사람이 부릴 수 있다. 다만 고삐가 상당히 풀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통제력이 강력하게 작동하진 않는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만 말이 달려가는 방향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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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예시는 1879년 처음 무대에 오른 『인형의 집』의 중심인물인 노라의 이야기다. 19세기 관례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라는 남편인 토르발트의 배려 덕분에 다른 여성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와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자유롭다는 결론을 선뜻 내리기 어렵다. 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고삐가 상당히 풀려있기 때문에 말은 사람의 통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여전히 말 안장 위에는 사람이 올라타 있으며 언제든지 말의 고삐를 쥘 의향을 갖고 있다. 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노라와 말은 결정권자의 선의와 호의를 통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 여전히 그들의 ‘지배’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배자의 호의 덕분에 자유를 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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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자유인가』의 저자 필립 페팃은 자유의 가치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 한다. 이는 애덤 스미스를 시작으로 경제계에서 정의한 자유 개념, 즉 원하는 것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간섭 방해 강요 따위를 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 개념보다 한 단계 향상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소극적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노라를 자유로운 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라는 토르발트로부터 당장 간섭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없다. 토르발트가 감정의 변화로 노라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에 노라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인형의 집에 사는 인형일 뿐 결코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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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어떤 특정한 선택을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시민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 로마 공화정시대에 타인에 대한 예속의 부재를 요구한 것처럼, 페팃은 ‘개인의 자유’란 시민이 타인에 의해 예속 받지 않는다는 권리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비지배 자유가 보장된 공화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비지배 자유가 확보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첫째, 내가 선호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는 여지와 자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 내가 선호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선택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타인의 선호에 의해 나의 선택이 구애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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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자유는 무분별한 자유, 방종이 아닌가? 타인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면, 질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지배 자유는 국가의 역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시한다. 정부는 법적 제재, 세금 부과 등으로 불가피하게 시민의 삶에 간섭한다. 하지만 소유권이나 교통 규칙과 같은 국가의 간섭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한다. 단지 그 간섭이 지배가 될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정부의 간섭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상관없이, 우리가 그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우리가 확립한 규정에 따라서 국가 권력이 행사될 수 있다면 비지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국가의 공적인 지배에 대해서 시민들이 통제 가능하고, 시민들 각자가 타인의 간섭에서 보호받으며 상호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마련된다면, 자유방임주의로 퇴보한 공화주의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비지배 자유는 국내 관계 뿐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국적 기구나 국제기구와의 관계 속에서 비지배를 향유하는 법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인들은 리베르(자유인)으로 살아가며 법으로 합당하고도 동등한 보호를 받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 대한 비지배가 실현되는 것, 그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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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지배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전반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 평등을 전제한다. 아렌트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는 정치 질서가 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이소노미아’라고 말한다. 평등을 뜻하는 이소스와 법을 뜻하는 노모스의 합성어인 이소노미아는 ‘비지배’를 의미한다. 그는 비지배를 실현하는 방법을 평등한 사람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실천적 행위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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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팃과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비지배를 통한 공화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은 길을 같이한다(다만 『왜 다시 자유인가』에서 아렌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페팃이 말한 ‘처다보기 실험’은 한 개인이 현지에서도 타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타인들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되고 맹종을 강요 받아서도 안 된다. 오직 법적,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때 동등해진다. 이 동등한 관계는 공동체 속에서 내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위를 보장받음을 이야기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사회가 인간의 법적인격, 도덕적 인격, 개성을 죽임으로써 인간적 존엄을 파괴하는 과정을 말한다. 타인들로부터 인간임을 인정받는 것, 그것은 공동체가 확립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며 필연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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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페팃은 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렌트는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폭력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페팃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반대하는 법률이 민주적으로 부과되었다면, 나는 그 법을 기존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반대해야 한다. 즉 사람들은 체제 내에서 법률에 이의를 제기하는 편을 택하고 반면 전복적-폭력적 저항에는 비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체제 전복은 민주주의가 꾸려놓은 평등주의를 배척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체포를 받아들이며 정부의 처벌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시민 불복종’이다. 시민 불복종은 처벌을 회피하는 일반 범법자와는 다르게 처벌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법에 맹종하겠다는 것은 성숙한 시민이 아닌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능력의 퇴보를 은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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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비지배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애초에 정치철학이 제시한 방향에 모두 부합하는 정치체제가 나타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정치철학의 존재이유는 이 책의 번역자 곽준혁 교수님이 말했듯이 ‘가능한 최선의 실현’이다. 정의에 대해서 급진적인 평등을 이야기한 존 롤스,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을 말한 아렌트 등, 정치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공공선’의 실현을 꿈꾼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을 몽상이라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아렌트는 정치영역에서 사실, 진실은 현실에서 어떠한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거짓말은 정치적 거래에서 정당화될 수 있고, 정치 목표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페팃이 말하고자 하는 비지배 이상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개개인이 자본에 종식되고 소위 말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의 변화는 이상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역사가 평가할 문제이지만, 공공선을 위해서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향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영역 안에 있다. 정치의 잘못된 흐름을 초래한 것은 변화에 둔감했던 대중정당의 무능과 타성에 젖은 정치권력의 부패 때문이다. 기존 정치에 불신을 갖고 변화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대중들의 책임이 아니다. 만약 시민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가 잘 구비되어있고, 공적 행위에 대한 정치적 참여가 활발히 이뤄진다면, 시민은 제도를 통해 민주적 절차를 거쳐 특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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