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1.   건축, 종교 그리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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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건축기행]은 저자가 40여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본 아시아 건축물에 대한 견문기이다. 저자는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여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황금탑 외에도, 각 종교가 갖추고 있는 특색 있는 건축물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 독자들은 다양한 사진을 통해 아시아가 품고 있는 다채로운 건축물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건축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한 명의 여행객으로서 건축을 보고 느낀 바를 말할 뿐이다. 건축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아시아의 모습이다.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역사 공부까지 할 수 있어서 여행의 재미를 더욱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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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이 책을 건축에 담긴 미학을 중심으로 독해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아시아 건축에 상당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럽 혹은 아시아의 종교적인 건축물들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질서를 구축하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령 남인도 힌두 사원인 ‘벨루르’와 ‘할레비두’는 정치권력과 종교의 결합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를 영속화 하기 위해 종교적인 정당성을 필요로 했다. 이 사원들은 각각 계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종교적 경외심을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런 의미는 유럽의 종교적 건축물과 맞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종교건축물들은 사람들의 경외심을 자극하여 지배적 질서를 안정 시키는데 있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종교는 과연 민초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타이와 미얀마는 종교가 보여주는 두 극단적인 삶을 제시한다. 타이 국민의 대다수는 불교신자이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불교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타이의 사원은 지역사회에게 정신과 마음에 안식처를 제공한다. 해발 1,600m 고도에 달하는 산 정상부에는 ‘도이수텝’이라는 사원이 있다. 그 사원에서 승려들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제공하고 부처의 은덕을 베푼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인격을 수양하며 공존을 배운다. 반면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국민 소득은 1.300달러에 불과 하는 세계 150위권의 나라이다. 빈부격차의 극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슈웨다곤’은 휘황찬란한 금빛과 보석으로 물들여 있어, 순간 미얀마를 보석의 나라로 착각할 정도다. 종교적 믿음에 의해, 미얀마 국민들은 자신들이 번 돈으로 금박을 구입한 후 사원에 덫 붙인다. 그들의 노력으로 ‘슈웨다곤’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들의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미얀마의 민낯을 볼 수 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장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파리떼들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은 끼니 이을 돈으로 금박을 입혀 종교 건축물의 신성함을 보강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삶은 비참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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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랜드마크란?
한 도시 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그러한 건축물들을 흔히 랜드마크라고 부른다. 가령 파리의 ‘에펠탑’이나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랜드마크로 불릴 만 하다. 저자는 라오스의 ‘비엔티안’을 방문하던 도중 “랜드마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라오스에는 현대사의 랜드마크로 주목 받는 건축물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한 ‘빠뚜싸이’이다. 저자는 ‘빠뚜싸이’를 프랑스 건축과 라오스 건축 사의 기형적인 결과물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목적도 없고 건설방법도 아류로 뒤덮인 건축계의 짬뽕이다. 그는 오늘날 목적 없는 랜드마크 조성사업이 한창이라고 비판한다. 탐욕적이고 사적 욕망의 상징물들이 기업, 정치인들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 공격적으로 건축되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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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저자의 비판이 전통주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목적을 알 수 없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건축물이 우후죽순 건설되는 상황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대부분 종교적인 건축물들이 건설된 배경에는 ‘미’라는 낭만적인 목적만 있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는 지배자의 권위를 보호하고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주요 수단이었다. 권위자에게 종교적인 정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압도적인 건축이었다. 노예들은 지배자의 권위를 위해 건축현장에 동원되었다. 현대의 랜드마크 조성 사업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종교적인 권위와 자본의 권위, 말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같다. 바로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의 명예의식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건축물을 순순한 미로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 건축물들은 지어질 당시엔 평가를 박하게 받을 지도 모른다. 단적인 예가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건축될 당시에 파리의 흉물로 취급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를 떠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으며 관광객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지금의 흉물이 나중에는 나라의 상징으로 뒤바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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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어의 장벽, 그리고 고립의 장벽
스리랑카에는 경이로운 유적이 있다. 바로 ‘시기리야’이다. 평원 위, 195m 바위산에 자리잡은 이 유적은 본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절벽으로 출입을 봉쇄하여 적의 침입을 막고 물과 물자를 공급받을 기술을 마련했다. 이곳을 만든 카사파 1세는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하고자 거대한 바위 요새에 몸을 숨겼다. 분명 이곳에 성채를 구축한 왕은 자신의 첨단 방어시스템을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완벽한 봉쇄는 고립을 자초한다는 것을. 왕은 이 어마어마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도 이복동생의 군대에 의해 패망했다. 천연의 요새가 무너지는데 고작 1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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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장벽이 떠올랐다. 바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이다. 이 장벽의 목적은 중남미 출신 불법 이주자들을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법이 정말 이것뿐일까? 안보란 국가이익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장벽이 정말 최선의 방법인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장벽 건설에 소모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은 불법 이주민 문제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장벽이 난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수 많은 방법을 찾아냈고 실행해 왔다. 그들이 생존하자는 욕구는 보트에 몸을 실어 대양을 건너게 만들었고 군인들의 총성을 감수했다. 장벽을 만든다고 해도 그들은 ‘자유’라는 가치를 찾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통해 외적을 방어하고자 했고 시기리야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무너지데 각각 30년, 그리고 18년이 소요되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의 장벽은 온전히 미국을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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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유토피아를 말하다.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3만불(약 3천만원)을 달성했지만 국민들은 불행하다. 세계행복보고서에서 156개국 중 종합 54위에 머무른 것만 봐도 경제적 풍요와는 대비되는 불행한 삶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행복보고서는 국민행복지수(GNH)를 통해서 사람들의 행복한 정도를 측정한다. 그렇다면 GNH는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을까? 놀랍게도 인구 80만명의 작은 나라, 부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부탄 왕조 4대 왕인 왕추쿠는 왕권을 포기하고 국가를 민주주의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1970년대에 국민행복지수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헌법에 명시하고 국가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다.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4가지 기본전략은 이렇다. 첫 째는 지속가능하고 공평한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경제발전이다. 두 번째는 생태계의 보전과 회복을 중시하는 것이며 셋째로 부탄의 전통과 정체성을 실현하는 문화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앞의 세 가지를 달성할 수 있는 국정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행복을 원칙으로 삼은 나라는 달리 또 누가 있을까? 저자는 부탄이 근대화의 물결 안에서도 행복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행복이란 기조 아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마냥 부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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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은 국가 정책의 기조를 행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구한다. 부탄의 근대화는 분명 느리게 흘러갈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고려하고 최선의 선택을 결정하는데 대한민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동네에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한국인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저자는 라오스의 도시 ‘루앙프라방’에 있는 작은 카페에 방문했다. 그 카페에 이름은 ‘유토피아 카페’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 카페에는 별다른 것이라곤 없다. 단지 매트에 누워 강가를 바라보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카페가 왜 유토피아일까? 유토피아를 직역하면 ‘없는 장소’이다. 너무나도 이상적이고 낭만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수 없는 모순된 장소가 바로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너무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사소한 것에 행복을 얻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유토피아적 공간은 없을지라도 삶의 사소한 순간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 ‘유토피아 카페’는 사람들에게 단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데 그친다. 거기서 무엇을 할지는 사람 나름의 역할에 달려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강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고 또 누군가는 낮잠을 취할 것이다. 사소하기 그지없지만 그들은 현실의 짐을 덜어냄으로써 행복에 잠긴다. 고되고 힘든 순간 잠시 휴식을 취하고 행복을 만끽할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이 풍요로워 질 것이다. 정말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누구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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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을 한가롭게 만드는 공간이다. 특별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으니 시간은 천천히 흐르게 마련이다. 목적 없이 빈둥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잘 기획된 건축적 장치는 오히려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구속하기 마련이다. 나른한 강변 풍경과 시원한 바람, 서늘한 그늘, 편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곳이면 평화를 누리기에 족하다. 그 카페의 이름은 ‘유토피아’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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