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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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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2018년 촉발된 미투 운동은 권력과 위계로 얼룩지어진 성폭력의 행태를 고발했다. 2016년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6명의 남성을 뒤로한 채 오직 여성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를 사회적 문제로 다루게 되었다. 여성들이 몸담은 세계는 여전히 위험한 세계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직접 말하고, 공적 언어 질서에 통합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담론화했다. 1990년대 대학 내에서 반성폭력 운동을 위해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은 지도 여성들이 일상적 젠더폭력과 젠더위계질서를 가시화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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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는다.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넷페미니즘은 악의적인 남성혐오를 통해 혐오의 재생산만을 펼칠 뿐, 건전하고 생산적인 담론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의 여성중심주의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당사자성만을 위시하여 여성우월주의를 말했고 그 결과 페미니즘 이론이 이야기하는 여러 언어는 오해되고 곡해되었다. 페미니즘 운동 방법의 하나인 미러링은 사회적 피차별자가 겪는 비정상적 사회를 정상인들에게 투영해 비정상의 정상화과정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남성들은 그들이 겪지 않을 성차별을 미러링을 통해 현재의 차별적 상황을 뒤집어 봄으로써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러링은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지 못한 채 단지 너희들도 당해봐라와 같은 여성들의 유희, 복수 혹은 파괴적인 분노만을 담게 되었다. SNS와 언론들은 이러한 급진주의 담론만을 왜곡해 유통하여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을 지웠다. 페미니즘이 제시한 다양한 담론들은 직접 공부하겠다는 노력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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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강남순 교수가 쓴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언어와 지향점들을 정리해줌으로써 페미니즘이 지닌 왜곡된 가면을 벗겨줌과 동시에 공통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준비운동을 제공해준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로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급진주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각기 다르다. 둘째, 페미니즘은 남성혐오가 아니다. 세 번째, 페미니즘은 여성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 번째, 페미니즘은 불평주의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섯 번째, 페미니즘은 남성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일곱 번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 또는 모든 남성이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덟 번째, 페미니즘은 복수의 정치또는 반전의 정치가 아니다. 아홉 번째 페미니즘은 가정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은 종교를 반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으로 포장된 담론을 단편적으로 접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갖고 있을 여러 가지 오해를 풀기 위해 저자는 여러 지면을 할애해 가면서 페미니즘이 사용하는 언어를 재정의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그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번역해 표현하지 않고 페미니즘 그 자체로 음차해서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성주의라고 번역해버리면 페미니즘을 여성중심주의로 오해할 수 있고, 현대 페미니즘이 지닌 다양한 요소들과의 교차성(페미니즘을 인종, 퀴어, 에코 등과 연결하여 그들의 입장을 포괄한 페미니즘 운동, 예로 흑인 페미니즘이 있다.)’을 간과할 위험이 있으며,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본질에만 경도되어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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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위치를 변화시키려는 능동적 욕구다.

2. 페미니즘은 모든 성의 평등성에 근거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며 이론이다.

3.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따른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4.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정치·사회·경제적 평등성에 근거해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5. 페미니즘은 다중적 이슈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 거시적인 목적은 가부장제의 종식, 모든 여성의 정치·사회·경제적 평등을 성취하고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혐오, 계층차별주의, 나이차별주의, 장애차별주의, 폭력, 환경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6. 페미니즘은 지역, 계층, 국적, 민족적 배경을 지닌 여성의 관심과 이익을 위한 정치적 표현이다. 다양한 여성의 각기 다른 필요와 관심에 부응하며 그 여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에 페미니즘들에는 다양성이 있고, 있어야만 한다.

7.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다.

 

이렇듯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이란 한 얼굴만을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사상이 아니다. ‘마리 쉬어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라고 말한 것처럼 법, 제도적 평등과 같이 보이는 차원에서 보장된 평등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통적 모델(모성애)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만연하는 차별(유리천장, 유리에스컬레이터)을 고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들의 급진성은 성차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와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뿌리물음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것의 탈자연화를 시도한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과 남성이 자연적 성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범주(인종, 계급, 민족, 성별, 지역, 종교, 나이, 교육, 언어 등)와 규율권력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성 일반의 공통된 경험이나 보편적인 여성의 이상을 해체하는 데 일조했다. 즉 우리가 흔히 자연스럽다라고 여겨왔던 행위·사유방식·관계방식이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적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목적이다. 페미니즘은 단지 해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부당한 문제들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사적·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변혁을 이뤄내고, 대안적 세계를 제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대안적 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성차별의 종식

2) 젠더 평등과 젠더 정의의 실현

3) 계층, 인종, 국적, 성적 지향, 장애 등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정의 실현

 

3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

강남순 교수는 자신이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개별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인정에서 출발하여, 국적, 젠더,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장애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권리 확장과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배경으로 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가? 첫째, 여성, 남성, 간성, 트랜스젠더 등의 경계, 지역과 세계의 경계, 내국인과 외국인의 경계, 국민과 난민의 경계 등 다층적인 경계를 넘어서 지구 위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를 함께 이뤄내고자 하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의 삶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기에, 어느 정황에서나 절대적 피해자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어느 집단에서 피해자였던 사람은 다른 사회 집단 속에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경우를 심상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얼터리티(alterity)의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얼터리티의 정체성은 개별 주체의 다름을 포용함으로써 현대 페미니즘의 한계였던 여성들만의 동질성의 연대넘어 다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단지 젠더 문제에만 주목할 수 없다. 또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추상적인 연대와 개입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대와 사회정치적 개입을 모색하며, 최종적으로 다양한 삶의 정황에 있는 이들이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서 동료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 모든 종류의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지향점을 드러내는 담론이며 실천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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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고 그 표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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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평화론의 저자이자 국제적 협력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칸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공유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공유된 세계 속에서 환대받지 못한, 사람답게 살 환경조차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을 환대하는 일이자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정신을 실현 시킬 연대의 장이다.

 

4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여성 운동의 목표지점을 추상화한 문제점을 야기했다. 운동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만큼 페미니즘을 과도히 인간 일반의 평등과 정의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페미니즘의 존재 배경인 여성차별의 문제를 퇴색시켜버릴 여지가 크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이상향은 모든 진보적인 운동이 배경으로 삼는 가장 이상적이고 최종적인 지향점이다. 하지만 이 운동을 절대적인 가치판단 기준으로 모든 사회운동에 대한 해석의 기준으로 사용한다면, 여성의 자리를 인권이 대체하는 주객전도이다.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다층적인 계층에 속해있는 시민들의 평등과 정의를 위해 움직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광범위한 평등과 정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명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지구적 협력이라는 것 또한 더더욱 불투명하다. “인민은 공공의 이익보다 그들 자신의 사적인 야심에 집착하고, 필요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선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을 토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사람들은 일단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을 일반화할 순 없지만, ‘쿠르디의 비극으로 난민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유럽 각국의 노력은 난민들이 저질렀다고 여겨진 몇몇 범죄와 가짜뉴스로 인해 극우주의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점이나, 전 세계에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통해 인류애는 자국민 중심주의 앞에서 무력하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같은 대의는 개인의 안전과 이익에 부합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상투적인 말에 불과할 따름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지향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릴 수 없다. 저자는 여성중심주의로 여겨질 것을 우려해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지 않았지만, 오해를 줄이기 위한 꼼수다. 페미니즘의 중심에는 여성이 존재한다. 이를 교차성을 통해 인종, 노동자, 난민 문제와 함께 페미니즘을 다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과도히 확대해 지구 위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를 함께 이뤄내고자 하는 운동이 되어버린다면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인 여성이 사라지게 되며, 또한 여성들에게 세계적 시민으로서의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라고 하는 막중하고 과도한 임무를 부과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트랜스젠더 숙명여자대학교 합격자 입학 반대 논란에 대해 혹자는 쉽게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거부한 여학생들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대 여성이 절대적 피해자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불러들인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이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보편적 인권을 위해 포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자리는 점차 인권으로 대체된다. 운동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 아래 무력해진다.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는 무엇이 핵심인지, 사람들을 이끄는 동기는 무엇인지에 대한 선택의 폭을 과도히 확장시켜 선택과 집중을 불가능하게 한다. 페미니즘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 페미니즘은 성차별의 종식과 젠더 평등과 젠더 정의를 실현하여 여성 전반의 인권을 도모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선 모든 종류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은 페미니즘의 현실적인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회운동이 꿈꾸는 최종적인 이상향이며, 페미니즘이 부담하기엔 너무나 큰 짐이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수식하는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

 

5 지금 우리의 페미니즘

지금 우리에게도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수많은 반대에 이기지 못해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나, 트랜스젠더 군인의 전역문제 등, 성별 갈등을 다루는 우리의 논의는 자연적 성에 대한 담론을 넘어섰다. 이젠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옛 방식은 다양한 사회현상에 의해 힘을 잃었다. 우리는 그 이후를 넘어서 더욱 다양해지고 다각화된 사회적 현상을 담아낼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확대해서 이를 이상향으로 여겨야 한다는 작가의 외침은 이렇게 복잡적이고 다각화된 사회적 현상을 담아내기 위한 학문적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확장은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본질적인 물음, 여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퇴색시키는 위험을 야기했다. 자연적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의 이익이 대립하게 될 때, 페미니즘은 누구의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생물학적 여성의 손을 들어줬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 전반이 비판받을 순 없다. 오히려 현대 페미니즘이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표면 위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 문제들을 페미니즘이 모두 포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페미니즘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운동이 등장해야 하는가?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어느 운동의 수식어가 되지 않고 그 자체가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현대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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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식톤 콤플렉스 -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
김덕영 지음 / 길(도서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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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에리식톤 콤플렉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 홍보 영상물의 주제는 이명박은 배고픕니다!”이다. 그는 ‘7·4·7’ 공약 즉, 7퍼센트 경제성장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약속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공약의 핵심은 경제였으며, 그것은 다시금 살려내야 할 아주 절박한 대상이었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문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살리고자 한 경제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로 먹지 못해서 생존에 허덕이는 그런 집단적 빈곤상태에 놓여 있단 말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19년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달성하여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속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GDP17천 달러로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과 10년전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모두가 허기진 허기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가 생각한 허기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허기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저자 김덕영 교수는 현대대한민국 사회의 자본주의 정신이 에리식톤 콤플렉스에 빠져있다고 말한다. 에리식톤 콤플렉스에서 에리식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인물로 신의 저주를 받아 끊임없는 허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인해 자신의 몸까지 다 뜯어먹고 마침내는 이빨만 남는 비극에 처한다. 김덕영 교수는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정신을 에리식톤 콤플렉스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에리식톤 콤플렉스는 가능한 한 많은 화폐가치적 이윤을 추구하는 천민 자본주의와도 성격을 달리한다. 그가 말하길 한국 자본주의 정신은 박정희로 대표되는 국가에 의해 주조되고, 정주영으로 대표되는 재벌에 의해 구현되고, 조용기로 대표되는 개신교에 의해 성화된 에리식톤 콤플렉스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에리식톤 콤플렉스는 물질적 재화와 돈에 대한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자본주의 정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서구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서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이 청교도주의, 그 중에서도 칼뱅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했다. 칼뱅주의의 이중예정론(신도 바꿀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사람들의 내적 고독감을 확산했고,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을 받은 존재인지 아닌지를 짐작하기 위해 소명으로서의 직업의식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이윤을 소비나 항락에 쓰지 않고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높이고 구원을 확증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확증사상이다. 여기서 신과 홀로 대면한다는 내적 고독감이 싹트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려다 보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와 세속적 금욕주의, 그리고 합목적적 사유 방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이 체화됨에 따라 서구의 자본주의는 소비를 위한 이윤추구가 아닌 합리적 재투자를 위한 이윤추구의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종교적 정신의 결합은 우연의 산물이었으며,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시민에 의해 추동된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기 자본주의 정신이 외부로 유입되고, 국가 위주의 산업발전이 이뤄지면서 서구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라졌다. 한국의 자본주의 성장은 서구의 시민계층이 자발적으로 이뤄낸 자본주의가 아닌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지도받는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 성장은 개인의 정신의 성숙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닌 오직 경제가 곧 근대이고, 경제성장이 곧 경제라는 환원근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경제 성장만이 근대화이며, 국가-기업이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개인은 도구화되고, 경제 이외의 근대를 반근대주의적 발상으로 간주하고, 문화적 전통주의 즉 유교를 극복하지 않고 그것과 결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권에 대한 정당성이 결핍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줘야 했으며, 그것을 경제적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는 빈곤담론을 성장담론으로 극적인 전환을 끌어낸다, 국민들에게 빈곤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여하고, 빈곤을 민족 국가 수준으로 일반화하여 빈곤 극복은 사회적 통합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말했다. 하지만 이 담론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국가와 민족이었다. 빈곤담론의 주체가 민족이라면 성장담론의 주체는 국가, 그리고 그와 동맹을 맺은 재벌이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발전과 빈곤은 항상 상호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빈곤은 발전의 대립물이라기보다 그것의 부속물에 가까웠다. 당시 대한민국은 충분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후진하다고, 혹은 선진했다고 말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전자의 경우 국민의 열정을 상실시킬 위험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국가-재벌 동맹,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이 상실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은 자본주의 정신을 강화하여 사람들을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포섭하는 한편 정당성을 마련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2경제이다. 이 개념은 잘 먹고 잘 사는 주체는 개인이 아닌 국가로 설정하여 국가 전체의 근대화를 실현하지 못하는 근대화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성장에서 중요한 주체는 개인이 아닌 국가였다. 따라서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는 경제성장과 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없으면 진정한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국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설득시켰고, 그들을 다시금 에리식톤 콤플렉스에 포섭되도록 만들었다. 조국 근대화는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N만 달러 시대로 지극히 단순화되었다. 근대화를 규정하는 여러 요인들을 해체한 뒤 1인당 국민소득으로 간결하고 선명한 방정식을 마련했으며, 선진국과 꾸준히 비교하여 1만 달러, 3만 달러로 끊임없는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했다. N만 달러는 방정식의 형태로 분명하게 표현된 에릭시톤 콤플렉스이며, 경제성장이 다른 모든 근대화 담론을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 재벌의 불면불휴, 그리고 교회의 성화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 한 축인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빈곤-발전 변증법을 마련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불면불휴(자지 않고, 쉬지 않음)하여 선진국을 목표로 노동에 헌신함을 의미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풍부한 전통문화에 비해 경제는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근대화를 경제성장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반영한 문화적 근대화를 전면 거부하며, 오로지 경제적 성장만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근대화할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세계에서 첫째가는 경제 대국 일본도 지금 주 46시간을 근무하는데 이제 겨우 국민소득 5천 달러인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노동시간은 노동법상 주 44시간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공휴일 수도 일본보다 우리가 더 많다. ... 일본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보다 적게 일해도 되게 법을 만들어 통과시킨 이들의 진의와 목적이 무엇에 있었는지 심히 유감스럽다. ... 자신들의 인기나 표를 염두에 두고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법만 악법이 아니다. 국가에 해를 끼치는 법도 악법인 것이다.”
p192~193

 

그는 이미 국민소득 5,000달러로 중진국에 진입한 지 오래인 한국이 노동법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을 국가의 무한한 발전을 저해하는 악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서 매우 빈곤한 상태이다. 그가 불면불휴의 생각하는 불도저로 만든 정신은 물질적 재화로 귀결되는 욕망, 즉 에리식톤 콤플렉스였다.

 

교회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에 경제적 주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는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의 전도사로서 이 두 세력과 동맹관계를 맺고, 한국 자본주의 정신을 성화(聖化)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원로 목사인 조용기 목사는 기독교 신을 물질적 부의 신으로 환원하여 이 신의 축복은 번영과 부의 축복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본주의화 되고 기업화되면서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신의 축복으로 정당화했다.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물질적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환원 근대의 이데올로그가 되고, 환원근대의 전도사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했다.

 

4. 진정한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김덕영 교수는 진정한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위해 3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모든 것을 경제성장으로 환원하는 환원 근대적 사고를 극복하고, 핵심축인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를 해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유교에 기반한 전통적 집단주의 정신을 근대적 개인주의 정신으로 대체함으로써 경제적 근대주의와 문화적 근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환원 근대의 이데올로그 또는 전도사의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종교의 본연의 임무인 영혼의 구원에 헌신하는 것이다. 즉 개신교는 탈주술화해야 한다. 그는 국가가 국가답고, 기업이 기업답고, 교회가 교회다워짐으로써,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됨에 따라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이 표출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샐러리맨의 신화였다가 백 억원 대의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이명박 대통령과, 60억 원대 자산가에 최고 권위의 대학교수였지만 사모펀드를 돌리고, 자식의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 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 부정채용 의혹으로 논란이 된 김성태 전 의원, 상속세 문제로 소송을 걹 있는 한진가의 2세들 등 대한민국의 민낯에는 한 푼의 돈도 잃고자 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에리식톤 콤플렉스가 담겨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여기에 여전히 관대하다. 영국의 경제 일간지는 재벌 총수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법원은 재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경영을 계속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는 것 같다. ... 그러나 재벌들이 제대로 행동하고,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사법체계를 갖추는 게 국가 이익에 더 부합하지 않겠느냐.”

 

너무도 당연하기 짝이없는 원론적인 해결책이지만 그것조차 해내지 못하는 대한민국을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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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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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다양한 민족들이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생존을 건 투쟁은 토착민들에 의해 부정되고, 그들은 안타깝게 폭력에 너무나도 쉽게 노출된다. 토착민들의 폭력은 이민자들이 제공하는 익숙하지 않음에 공포를 느껴 저지른 과다망상증 환자의 어리광일까? 아니면 혹시나 모를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 나름 근거가 있는 보호 본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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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권리를 갖지 못한 자가 겪게 되는 최초의 상실은 고향의 상실…… 두 번째 상실은 정부의 모든 보호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들이 더 이상 어떠한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P52 정치체 자체의 상실만으로도 인간은 인류에게서 축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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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 난민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고 난 뒤로 무려 18년이란 긴 시간동안 무국적자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정치사상 전반에서 정치적 약자들이 겪는 권리를 가질 권리를 지니지 못한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태, 즉 자신이 머물 정치영역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순간순간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그들의 삶,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행복자체가 사치인 그들의 삶은 세계 인류 어느 누구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한다. 세계 속에서 축출당한 인간이 겪는 고통은 일반적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그들의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는 정착한 인간은 난민들이 겪는 공포 이상의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여 혐오하고 배척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정당화된 혐오는 으로 똘똘 뭉친 악인들이 만들어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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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3 슬픈 진실은, 선하려고도 악하려고도 마음먹은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최악의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P114 사실적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일관되고 총체적인 대체의 결과는 이제 거짓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진리가 거짓으로 폄훼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각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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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선하디 선한 사람들은 내 가족과 이웃, 마을 그리고 국가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거짓에 쉽게 휘말려버리고 비판의 목소리를 숫자로 압도하여 묵살시켜버리는 애국자들의 모습은 공포에 절감한 광기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편견에 근거했다 하더라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공포로 인해 폭력을 파괴하는 힘으로 변질시켜 현실에서의 타자를 배제시키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국가는 이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공포와 권리 사이의 두 명제의 균형을 어떤 방식으로 균형을 맞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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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한편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수백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죽는 것을 봐도, 어떤 행동에도 나서지 않고 고래를 돌린 후 즐겁게 저녁을 보낸다. 오히려 광기에 빠진 사람들보다 이렇게 모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인간미조차 사치인 현대인들의 삶에서 스스로 사유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행동하는 정치적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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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고 그 표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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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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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의 수수께끼

근대화라는 축복 덕택에 우리는 홉스가 이야기한 리바이어던의 세계, 즉 무질서하고 수단이 결과를 정당화하는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근대화의 단물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연히 지금 환경에 던져졌을 뿐이지, 그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계몽의 과정이었다. 인류의 과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폭력과 잔학이 이살 깊숙이 뿌리박힌 피투성이 세계였다. 하지만 근대자유주의자들의 작업으로 근대 인류는 자유를 획득했고, 법치 시스템을 통해 질서 잡힌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 덕에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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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대화 시기를 겪지 못했다는 시간적 한계로 인해, 사람들은 현대의 문화가 당연하고 가장 진보적이며 가장 우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의 세계는 근대화되지 못한 저쪽 세계의 야만과는 다르다는 명확한 경계가 사람들의 사고방식 한쪽에 자리 잡았다.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 즉 유아 살해, 식인, 여성폭력, 학살 등등은 현대 국민국가 체계 아래에서는 반인륜적 범죄로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혹은 존중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유한 문화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렇게 미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우리랑 동떨어진 삶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을까? 혹자는 저들을 하루빨리 계몽시켜 국민국가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인류애적 충동이 싹틀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저들의 문화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할 인류 세계의 치욕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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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 마빈 해리스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저들의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는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화를 해석하는 데 미개함과 종교에서 찾는다. 특히 종교는 사람들을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란 점에서 주요한 원인으로 손꼽힌다. 암소를 숭배하는 힌두교의 교리로 인도 사람들이 지천에 널린 암소를 눈앞에 두고도 굶어 죽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그 책임을 종교에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특히 종교는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하는 데 능숙하다는 점에서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대상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은 단지 종교의 교리에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해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문화에는 감춰진 다른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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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저자는 생활양식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그 대답은 신밖에 모른다라고 대답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문화에는 각기 다른 사회,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답한다. 저자는 힌두교의 암소숭배와 이슬람교도의 돼지 혐오에서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원인을 찾는다. 수많은 경제학자는 암소숭배로 인해 인도의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오히려 그는 암소숭배가 인도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도의 소가 소비하는 사료 중 식용작물의 비중은 고작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를 인간이 먹고 남은 부산물로 충당한다. 저비용으로 소를 기르고 나면 소는 사람들에게 원료, 농기구, 유지, 가죽 등을 제공한다. 인도 소들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가치가 거의 없는 물건들을 인간에게 직접적인 가치가 있는 유용한 제품으로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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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힌두교의 암소숭배 관습은 저축과 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트 경제윤리보다 훨씬 탁월한 경제성을 나타낸다. 암소숭배는 문자 그대로 마지막 한 방울의 우유까지도 암소에게서 짜내겠다는 무자비한 결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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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의 유무는 가난한 농업 가구의 경제상태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소를 대량으로 도축한다면 그것은 집단의 복지를 위협할 것이 자명했다. 경제학자들이 소를 도축해야만 인도의 농업을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가난한 농민계층의 유일한 경제적 수단을 파괴하겠다는 뜻이다. 인도 대다수 농민은 암소숭배가 아닌 생계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소를 도축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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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도들이 돼지를 대하는 태도는 결과는 암소숭배와 같지만, 그 동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돼지를 혐오하기 때문에 돼지를 도축하지 않는다. 교리는 돼지가 더럽고 불결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돼지를 키우기에 중동지역이 여러모로 부적합한 지역이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돼지사육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아주 맛있는 고기로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야훼와 알라의 이름을 빌려 돼지를 금지해야만 했다. 종교는 단지 그 근거를 당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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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이라고 일컬어지는 원시 공동체 문화도 합리적인 경제토대 위에 서 있다. 뉴기니의 마링족은 돼지를 집단으로 도살하며 즐기는 카이코라는 축제를 일정 주기로 개최한다. 이 축제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돼지가 도살되고 이후 이웃 적대 부락과 전쟁을 벌이지만, 정작 승전한 쪽이 패전한 쪽의 경작지를 차지하지 않고, 패자는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는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를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돼지를 치고 룸빔이란 나무를 심은 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축제와 전쟁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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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축제가 반복되는 이 풍습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밀림이 우거져있어 화전을 통해서만 경작지 확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화전이 반복되면 지력이 떨어져 생산성이 낮아진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통해 지력을 고갈시키는 돼지를 도축하고 경쟁자들 내쫓아 지력이 고갈된 경작지를 회복시킨다. 전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성들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고, 이와 동반하여 유아 살해와 여성차별이 빈번해진다. 마링족의 성비는 150:100으로 극단적인 비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마링족에겐 전쟁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어 전쟁은 반복되었고 피임이나 낙태를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단도 부재해 여아살해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야만적인 폭력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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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문화전개 과정에서 이뤄진 여러 가지 사건도 단지 기독교적 교리와 야만적 폭력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메시아니즘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식민지들이 제국을 전복하려는 투쟁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대민족의 혁명은 단지 유대인들의 전투적이고 게릴라적인 메시아니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로마 식민주의의 불공정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들을 이끈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신의 메시지였지만, 그 동기는 불공정함에 대한 반기였다. 평화적 메시아로 포장된 예수 또한 실상은 전투적 메시아 중 하나였다. 제자들에게 검을 지니라고 요구하는 점과 성경 구절에서 반복되는 모순된 말(예로 마태복음59절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하는 반면, 마태복음1034절에는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노라 라고 말한다)들은 그가 전투적 메시아니즘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단절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따르는 자들은 숱하게 죽었고 유대민족은 국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평화적 메시아로서 예수는 반로마 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후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가 해가 없다는 것을 로마에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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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뤄졌다고 생각된 마녀사냥은 사실 15~17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나 있었던 폭력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1000년 동안 마녀 같은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기시했다. 하지만 이 금기는 500년 후에 뒤집혀 1485년에는 마녀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왜 로마 교황청은 1000년 동안 이어져 온 원칙을 뒤집고 무고한 50만 명의 사람들을 숯덩이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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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적으로 이뤄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컸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든 신교 중심의 전투적 메시아니즘이 보편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봉건질서의 붕괴로 지역의 농민들은 경작지와 재산을 잃고 방황과 가난에 직면했다. 그들의 원한은 자연스레 지배층과 교회를 향했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을 단결시켰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그들 사이에 집단소명감을 주었다. 하지만 지배층은 마녀광란을 통해 사회위기의 책임을 교회와 국가에서 가상의 괴물인 악마와 마녀로 전가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과 무산자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문제해결 주체인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됐다.

마녀광란은 사회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p310

 

3. 지금의 우리는 야만에서 자유로운가?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시도는 생활양식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 속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문화의 생활양식을 인류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방법을 통해 파헤치고, 그 의미를 곡해하고 왜곡하는 시도 전반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생존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끌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적 교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할 뿐, 우리가 ?’ 그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은 근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야만으로밖에 비칠 뿐, 그들이 취한 행동 양식 전반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저자가 비판하는 반문화는 객관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비지성적 능력과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난 의식을 추구한다. 그들이 이성이나 증거, 객관성 등을 경멸하는 태도는 반대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여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나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마녀의 복귀를 야기할 것이다. 이 마녀는 마녀사냥으로 조작된 희생자들이 아닌, 환각효과에 취해 현실을 분간하지도 못하는 마약쟁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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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접근법은 현대 사회에 도래할 수 있는 야만에 대한 경계로도 읽힌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본성은 변해왔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서판이기 때문에, 계몽된 교육을 받아 도덕으로 체화된 천사들인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 스티븐 핑커 교수는 이러한 의견을 반박한다.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잔혹한 악마와 선한 천사가 항상 공존하고 있으며, 그중 선한 천사를 끌어내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외생적 요인들이 있다. 그 요인 덕분에 우리는 폭력성을 억제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외생적 요인은 법질서, 교육, 사회화 과정 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외생적 요인들이 우리 내면에 악마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 악마들이 전 사회 공동체 안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야만의 복귀를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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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야기하는 과학적 객관성은 내면의 악마들을 불러오는 외생적 요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는 전언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영향력은 과거의 빛을 잃었다. 하지만 종교는 이념, 정치적 언사, 민족주의 등으로 대체되었고, 그것들은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방해하며 그들을 호도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대체로 가족을 잃은 노인, 외부에서 온 이방인, 그리고 여성이었다. 즉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의 희생자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책임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된다. 유럽과 미국에서 난민들이 그랬으며, 혐오의 대상은 성 소수자, 노인, 장애인, 여성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트럼프 미 대통령은 차별을 의도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며, 근대적 인권 개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약자에 대한 혐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으며, 최근 군대와 대학에서 불거진 성소수자 배제 문제는 여전히 차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현대 문화의 현실을 절감할 수 있다. 차별을 조장하는 그들의 발언이 객관적으로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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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야기는 현대 문화가 과거 문화에 대한 과학적 객관성을 지닌 올바른 인식을 통해 발전해왔다기보다는, 과학 문명사회라고 하는 현대에서조차 무지·공포·갈등이란 의식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기아, 성차별, 착취와 같은 과거 문화의 잔재는 현대 문화에서 사라지지 않고 교묘하게 복귀할 수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의 극우주의 정당, 트럼프, 시진핑의 중국몽, 푸틴의 권위주의 등은 야만의 복귀를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일상적인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여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객관세계의 진의가 무너지고, 비지성과 반지성의 마법이 우리를 합리적 판단을 현혹한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문화의 붕괴, 총체적 야만일 것이다.

 

우리는 경찰력과 군사력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육체적인 힘에 의존하는 전투술을 배제하고 보다 개선된 전투술을 개발해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되고, 경찰력과 군사력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희망하자. 순수한 성혁명(性革命)의 결과가 핵미사일 부대장이나 핵부대 사령관직을 남성 아닌 여성이 장악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원시 야노마모족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별로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p 107

 

전쟁이란 특수한 기술조건, 지형학적 조건, 생태학적 조건 등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의 한 부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는 전쟁이 항상 존재해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이 어떻다느니 전쟁의 동기에 괴팍한 어떤 것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때, 내부집단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수단이 전쟁을 대체할 것이며 우리는 이를 충분히 바랄 것이다.”

p122

 

우리는 일상적인 의식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건강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사회의 불평등한 요소를 우리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토록 희박하다면 생활양식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 속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장하는 것이 도덕적 지상명령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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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 브렉시트와 EU 권력의 재편성
폴 레버 지음, 이영래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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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U의 역사와 독일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벨라 발라사(Béla Balassa)는 경제통합의 단계로 유럽통합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관세를 철폐하고 생산된 물품이 유통 거래되는데 이용되는 차별이 제거된 자유무역 단계이다. 서유럽 중심의 유럽통합의 목적은 전쟁을 야기한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며 소련의 공산주의를 견제하는 것에 있었다. 미국은 마샬플랜으로 서유럽의 재건을 목표로 했고, NATO와 같은 군사적 조직화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슈만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 해결을 위해 그리고 독일은 전쟁 이후 전범국에서 탈피하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의 석탄과 철강을 공동관리하자는 안을 마련했다. 1952년 파리조약을 통해서 ECSC가 탄생했고, 이후 EEC, Euratom1957년 로마 조약을 통해 설립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관세동맹이다. 관세동맹은 공동의 대외통상정책을 의미하며 대외적으로 공동의 관세를 결정하는 기구가 필요하다. FTA는 계약 국가 사이에서만 관세를 폐지하지만, 관세동맹은 조약 가입국 모두가 국외자들과 공동관세를 시행한다는 차이를 갖는다. 1967ECSCEEC 그리고 Euratom을 합병하고 EC를 설립하면서 서유럽 대륙국가를 중심으로 공동시장, 공동농업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로 이뤄진 EC는 대외 통상정책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빠른 속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는 공동시장이다. 이 단계에서는 생산요소가 조직 내 국가끼리 공유되고 경제활동과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다. 1985년 유럽은 솅겐 조약을 체결하여 통합국가 간 국경철폐를 선언했다. 그리고 1987년 헤이그에서 단일유럽의정서(SEA)를 체결하여 시장경제를 활성화했다. 이러한 경제통합의 성과를 바탕으로 단일경제통화권이 추진됐고,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EU가 출범한 이후 공동시장이 급진적으로 추진됐다. 그 결과 공동외교안보정책, 경제와 화폐동맹, 유럽사법내부정책이라는 유럽공동체의 3가지 기틀을 마련하여 EU의 안정적인 체제를 마련했다. 경제적 동맹체인 유로랜드가 이때부터 확립되기 시작했다.

네 번째 단계는 경제동맹이다. 경제동맹 상황에서는 단일 화폐를 사용하여 재정, 금융정책의 통합이 이뤄진다. 이 단계에서 경제주권의 상징인 화폐는 초국가적 조직에게 이양되었다. 1999년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고, 2002년부터 유로만을 법적통화로 사용하게 된다. 현재 유로화 사용국가는 19개 국가에 달한다. 현재 유럽통합은 경제동맹 차원에 머물러 있다. 아직 재정정책에 있어서 금리만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들(세금, 임금)에 대한 완전한 통합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정치, 군사적 통합도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마지막 단계는 전면적 경제통합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명실상부한 초국가적 단일 정부 형태의 정치적 단일체가 완성된다. 이 단계에서는 정치, 군사적 통합체가 가능해지고 유럽 헌법을 제정하여 EU에 독자적인 법인격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현재 EU는 이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유럽통합과 독일의 관계는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초기 유럽통합의 목적은 유럽의 안정을 유지하여 미국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소련의 공산주의의 전방으로써 독일을 이용해 봉쇄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미국의 도움으로 재군사화가 가능해졌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정상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의 붕괴로 경제적으로 약소국인 동유럽 국가들이 들어오자 독일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졌다. 하지만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산적해 있다. 언어의 다양성, 규모가 큰 회원국들의 대화 지배, 그리고 초국가성과 주권성의 공존은 유럽 통합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요소들이다. 외교안보, 사회, 제정 정책들에 대한 통합은 실패했다. 그리고 난민유입 문제로 인해 유럽 전역은 극우주의에 물들고 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국은 브렉시트로 EU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보리스 존슨이 총리로 선출됨에 따라 브렉시트는 노딜 브렉시트로 향하는 것 같다. 유럽 통합의 운명은 이제 전범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한 독일이 쥐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EU통합에 적극적인가? 그들은 전면적 경제통합을 선호하는가?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2. 이미 배가 부른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의 저자 폴 레버는 유럽이 독일어를 쓰고 있다라고 말한 폴커 카우더의 말을 인용하며 EU 내의 독일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EU는 독일의 이익에 부합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유럽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독일의 부활은 유럽통합과정을 통해서 가능했다. EU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세계 1, 2차 대전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독일의 위협을 해소하고자 하는 다른 유럽국가와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독일의 이해관계가 합치되어 이뤄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1대 총리인 아데나워는 서독의 주권을 회복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재건하고, 전승국들이 체결한 서독 점령조례를 폐지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 경제를 재건해야만 했다. 미국의 마샬플랜과 유럽통합 과정은 서독의 필요를 충족시켰다. 그 결과 서독은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뒤 불과 10년 만에 주권을 회복했고, NATO 가입을 통해 점령조례가 폐지되고 군사적 재무장마저 허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은 제조업 중심 산업을 육성하여 유럽 내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현대 독일은 GDP399백만 달러로 세계 4위이며, EU국가 중 가장 높은 경제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2002년부터 도입된 유로화는 독일에 호기로 작동했다. 화폐 가치가 높은 독일의 마르크화는 그보다 가치가 떨어진 유로로 바뀌면서 독일은 수출이 용이해졌다. 유로는 수출주도형 경제국가에게 유리했지만 수입국에게는 불리한 심각한 역내 불균형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독일은 유로화를 이용하여 자국 경제를 활성화했고, 그 덕분에 세계 금융위기로 그리스가 외환위기를 겪으며 유로존 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와중에 독일은 자국 경제를 유지했다. OECD의 발표에 따르면 독일의 실업률은 200610%에서 20183.4%까지 꾸준히 떨어졌다. 유로존 국가들이 경제위기인 2010년에서 2012년까지 10%에서 12%까지 상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유럽 연합 시장을 통해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연간 약 37억 유로를 추가로 벌어들이며 무역수지에 있어서 EU 국가 중 최대 경제이익을 누렸다. 독일에서는 더 이상 과거 패전국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유럽 경제 정책 수립에 독일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모든 회원국은 독일의 관례와 가치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조항을 만들고, 독일이 대변하는 모델의 성공을 인정했다. 또한, 독일은 EU에서 인기가 가장 많으며, EU 예산에 크게 이바지하는 국가이다. 다른 나라들은 독일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윌리엄 패터슨 교수의 말처럼 이 일은 독일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독일은 마지못해 자리를 맡은 패권국이다. 헨리 키신저는 지금의 상황을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독일을 패배시키고 나서 7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거꾸로 승리자들이,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유럽을 이끌어달라고 독일에 간청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미 독일은 유럽 통합을 통해서 얻고자 한 목적을 달성했다. 독일은 이미 배가 불렀다. 독일이 추구하는 것은 EU가 한 몸이 되어 유럽연방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독일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EU를 구축하는 것이다. 영국이 브렉시트로 EU를 탈퇴하자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유럽의 강대국은 거의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은 자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상응하는 군사력 확장을 포기하고 온건함을 유지하며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의 질서에 만족한 독일에 EU의 진전된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이동풍(馬耳東風)에 불과할지 모른다. 독일 정치인들은 유럽 통합의 궁극적인 목적지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3. 위기의 EU, 향후 행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독일과 유럽은 포스트모던의 낙원 속에서 살고 있다. 유럽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군사강국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유럽은 국방예산을 GDP 대비 2% 이상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1990년대 발칸 반도 분쟁에서 군사적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국제전문가 로버트 케이건은 유럽의 낙원은 미국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냉전 시기 미국이 외부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고, 발칸 분쟁과 같은 내부 위협을 해소했기 때문에 유럽은 평화를 구가할 수 있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더는 국제경찰의 역할을 다할 것 같지 않다. 미국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셰일 가스 개발로 에너지 자금의 꿈을 이룬 미국은 이제 세계 질서 유지에 관심이 없다. 미국의 동맹은 각자 도생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셰일 가스 개발로 미국은 2018년에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에 등극했다. 미국은 중동 가스에 흥미를 잃었으며, 독일, 일본, 한국 등 동맹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며 자국의 부담을 줄여나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NATO 동맹국, 특히 독일과 프랑스 등에 GDP 대비 2% 이상의 국방비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은 이를 추진할 어떤 의지도 없다. EU군 창설 계획은 EDC(유럽방위공동체)의 실패로 물거품이 되었고 기능주의적이고 가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영역의 통합만을 추구했다. 폴 레버는 유럽 군대를 지지한다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나 유럽의회가 군사 작전 관리에 진지한 책임을 맡는 것은 바라는 독일 정치인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미국 없이 평화를 구가할 수 없는 유럽은 포스트 아메리카의 시대가 도래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유럽은 극우주의에 물들고 있다. 독일 내무 장관 토마스 데메지에르는 모든 EU 회원국들에게 난민 수용 문제에 대해 역할을 요구했으며, 의무적 할당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유럽과 동유럽 등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들은 이 제안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집행위원회는 독일의 요구를 반영한 방안을 만들었으며 이를 시행했다. 독일은 유럽 내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 인정받고 싶었겠지만, 그 결과는 브렉시트와 극우정당의 성장이었다. 폴 레버는 극단주의는 독일에서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정계는 여전히 평화롭고 기민련이 자리를 계속 지킬 것이라고 말한다. AfD의 부상은 단지 표면 아래 숨어있는 불만이 많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의 책이 출간하고 얼마되지 않아 이뤄진 2017 독일총선은 극우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성장을 보여준다.

AfD2013년 금융위기 당시 반유로화를 통한 유로존 탈퇴를 내세우며 등장했다. 2013년 총선 당시 득표율 4.7%5%의 벽을 넘지 못해 연방하원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2017년 연방하원 선거에서 12.6% 득표율을 획득하며 연방 하원 제 3당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고작 4년 만에 보여준 대안당의 성장은 독일 정치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안당은 이민과 난민 문제 등 선동적인 의제를 내세워 기성 정당과 차별점을 두었고, 선동정치를 통해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유럽 내부에서 극우주의가 확산된 배경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유로존 위기로 인한 경제침체의 여진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유입되면서 국경철폐에 대한 솅겐조약에 회의하게 되었고, 각국은 난민할당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다. 그리고 브렉시트로 인해 양적 확대, 질적 심화의 과정을 지속한 유럽통합 과정을 역행하는 것이다. 통합유럽의 흐름이 후퇴되자 유럽에 신민족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키웠다.

이러한 우려는 결국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2019년에 있었던 유럽의회 총선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극우정당이라 불리는 ENF(국가와 자유의 유럽)EFDD(자유와 직접 민주주의의 유럽)은 각각 58, 54석을 획득하여 이전 의회보다 각 22, 12석이 증가했다. 반면 EPP(유럽인민당)S&D(사회민주진보동맹)은 각각 3732석이 감소하여 기성정당의 후퇴와 극우정당의 약진이 이뤄졌다. 극우정당들이 강력한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미뤄볼 때, 극우정당의 성장은 유럽통합 과정을 역행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는 배타성이며 이는 곧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EU의 모토을 배격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유럽통합은 전면적 경제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독일은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할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4.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독일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EU를 자국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유럽 통합을 진전할 진지한 방법을 마련할 것인지 답을 내놔야 한다. 최근 새로운 EU 입법의 부족에 대해서 계속 불평하고 있는 유럽 의회는 더 큰 유럽을 부르짖을 것이고, 사회-환경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개별 집행위원들은 분명히 그에 좌우되는 일을 하는 자국 관리들로부터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라는 압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이 비용이 발생할 수 있는 일에 신중하다면 전체로서의 집행위원회는 당연히 과도한 모험을 피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독일은 변하는 국제정세에 발맞춰 직접 나서야 한다. GDP 대비 국방비를 2%이상 높여 유럽 독자적인 군사력을 증진하는 한편, 다른 유럽국가들도 이에 동참하게끔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표는 NATO와 다른 EU군을 창설하는 것이다. 통합된 군사력은 미국의 참여 없이도 유럽 대륙을 자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있었던 만큼,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자조해야 한다. 또한, 무분별한 국가 가입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는 사전 산업화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성장을 시킨 이후에 가입하게 함으로써 유로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극우주의의 경계이다. 독일은 인권의 선도국가인 마냥 난민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 되며 이를 타국에게 의무적으로 요구해서도 안 된다. 유럽 시민들이 난민으로부터 느끼는 공포는 실재하는 것이며, 이를 무시할 경우 극우주의 정당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독일과 각 유럽국가는 난민을 수용하기 이전 난민을 수용하는 절차의 신뢰성을 우선 유럽 시민들에게 납득을 시킨 뒤, 선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극우정당의 성장을 차단해야 한다. 브렉시트로 인해 역행한 유럽통합과정을 제자리에 놓기 위해서는 국제적 현실을 먼저 인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더 이상 과거의 몽상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독일은 이 문제에 대비할 의지를 갖고 있는가? 세계가 ‘disunited state’로 사분오열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강대국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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