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2018년 촉발된 미투 운동은 권력과 위계로 얼룩지어진 성폭력의 행태를 고발했다. 2016년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6명의 남성을 뒤로한 채 오직 여성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를 사회적 문제로 다루게 되었다. 여성들이 몸담은 세계는 여전히 위험한 세계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직접 말하고, 공적 언어 질서에 통합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담론화했다. 1990년대 대학 내에서 반성폭력 운동을 위해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은 지도 여성들이 일상적 젠더폭력과 젠더위계질서를 가시화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
.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는다.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넷페미니즘은 악의적인 남성혐오를 통해 혐오의 재생산만을 펼칠 뿐, 건전하고 생산적인 담론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의 여성중심주의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당사자성만을 위시하여 여성우월주의를 말했고 그 결과 페미니즘 이론이 이야기하는 여러 언어는 오해되고 곡해되었다. 페미니즘 운동 방법의 하나인 미러링은 사회적 피차별자가 겪는 비정상적 사회를 정상인들에게 투영해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남성들은 그들이 겪지 않을 성차별을 미러링을 통해 현재의 차별적 상황을 뒤집어 봄으로써 여성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러링은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지 못한 채 단지 ‘너희들도 당해봐라’ 와 같은 여성들의 유희, 복수 혹은 파괴적인 분노만을 담게 되었다. SNS와 언론들은 이러한 급진주의 담론만을 왜곡해 유통하여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을 지웠다. 페미니즘이 제시한 다양한 담론들은 직접 공부하겠다는 노력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게 되었다.
.
2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강남순 교수가 쓴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언어와 지향점들을 정리해줌으로써 페미니즘이 지닌 왜곡된 가면을 벗겨줌과 동시에 공통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준비운동을 제공해준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로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문화 급진주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각기 다르다. 둘째, 페미니즘은 ‘남성혐오’가 아니다. 세 번째, 페미니즘은 ‘여성지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섯 번째, 페미니즘은 ‘불평주의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섯 번째, 페미니즘은 남성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일곱 번째,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 또는 모든 남성이 ‘똑같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덟 번째, 페미니즘은 ‘복수의 정치’ 또는 ‘반전의 정치’가 아니다. 아홉 번째 페미니즘은 가정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은 종교를 반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으로 포장된 담론을 단편적으로 접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갖고 있을 여러 가지 오해를 풀기 위해 저자는 여러 지면을 할애해 가면서 페미니즘이 사용하는 언어를 재정의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그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번역해 표현하지 않고 페미니즘 그 자체로 음차해서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성주의라고 번역해버리면 페미니즘을 ‘여성중심주의’로 오해할 수 있고, 현대 페미니즘이 지닌 다양한 요소들과의 ‘교차성(페미니즘을 인종, 퀴어, 에코 등과 연결하여 그들의 입장을 포괄한 페미니즘 운동, 예로 흑인 페미니즘이 있다.)’을 간과할 위험이 있으며,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본질’에만 경도되어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
강남순 교수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이상향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위치를 변화시키려는 능동적 욕구다. |
2. 페미니즘은 모든 성의 평등성에 근거하여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며 이론이다. |
3.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에 따른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
4.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정치·사회·경제적 평등성에 근거해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
5. 페미니즘은 다중적 이슈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 거시적인 목적은 가부장제의 종식, 모든 여성의 정치·사회·경제적 평등을 성취하고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혐오, 계층차별주의, 나이차별주의, 장애차별주의, 폭력, 환경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
6. 페미니즘은 지역, 계층, 국적, 민족적 배경을 지닌 여성의 관심과 이익을 위한 정치적 표현이다. 다양한 여성의 각기 다른 필요와 관심에 부응하며 그 여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에 페미니즘들에는 다양성이 있고, 있어야만 한다. |
7.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다. |
이렇듯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이란 한 얼굴만을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사상이 아니다. ‘마리 쉬어’가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라고 말한 것처럼 법, 제도적 평등과 같이 ‘보이는 차원’에서 보장된 평등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통적 모델(모성애)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만연하는 차별(유리천장, 유리에스컬레이터)을 고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들의 급진성은 성차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와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뿌리물음’을 하면서 자연스러운 것의 ‘탈자연화’를 시도한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과 남성이 자연적 성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범주(인종, 계급, 민족, 성별, 지역, 종교, 나이, 교육, 언어 등)와 규율권력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여성 일반의 ‘공통된 경험’이나 보편적인 여성의 이상을 해체하는 데 일조했다. 즉 우리가 흔히 ‘자연스럽다’라고 여겨왔던 행위·사유방식·관계방식이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적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고 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목적이다. 페미니즘은 단지 해체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부당한 문제들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사적·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변혁’을 이뤄내고, 대안적 세계를 제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대안적 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성차별의 종식
2) 젠더 평등과 젠더 정의의 실현
3) 계층, 인종, 국적, 성적 지향, 장애 등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정의 실현
3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
강남순 교수는 자신이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은 “개별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인정에서 출발하여, 국적, 젠더,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장애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권리 확장과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배경으로 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정확히 어떤 목표를 지향하는가? 첫째, 여성, 남성, 간성, 트랜스젠더 등의 경계, 지역과 세계의 경계, 내국인과 외국인의 경계, 국민과 난민의 경계 등 다층적인 경계를 넘어서 지구 위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를 함께 이뤄내고자 하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의 삶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기에, 어느 정황에서나 ‘절대적 피해자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어느 집단에서 피해자였던 사람은 다른 사회 집단 속에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경우를 심상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얼터리티(alterity)의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얼터리티의 정체성’은 개별 주체의 다름을 포용함으로써 현대 페미니즘의 한계였던 여성들만의 ‘동질성의 연대’ 넘어 ‘다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단지 젠더 문제에만 주목할 수 없다. 또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추상적인 연대와 개입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대와 사회정치적 개입을 모색하며, 최종적으로 다양한 삶의 정황에 있는 이들이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서 동료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 모든 종류의 페미니즘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지향점을 드러내는 담론이며 실천이라고 말한다.
.
“지구는 둥글고 그 표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영구평화론』의 저자이자 국제적 협력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칸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공유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공유된 세계 속에서 환대받지 못한, 사람답게 살 환경조차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을 환대하는 일이자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정신을 실현 시킬 ‘연대의 장’이다.
4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여성 운동의 목표지점을 추상화한 문제점을 야기했다. 운동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만큼 페미니즘을 과도히 인간 일반의 평등과 정의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페미니즘의 존재 배경인 여성차별의 문제를 퇴색시켜버릴 여지가 크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이상향은 모든 진보적인 운동이 배경으로 삼는 가장 이상적이고 최종적인 지향점이다. 하지만 이 운동을 절대적인 가치판단 기준으로 모든 사회운동에 대한 해석의 기준으로 사용한다면, 여성의 자리를 인권이 대체하는 주객전도이다.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다층적인 계층에 속해있는 시민들의 평등과 정의를 위해 움직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광범위한 평등과 정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 명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지구적 협력이라는 것 또한 더더욱 불투명하다. “인민은 공공의 이익보다 그들 자신의 사적인 야심에 집착하고, 필요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선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을 토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사람들은 일단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을 일반화할 순 없지만, ‘쿠르디’의 비극으로 난민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유럽 각국의 노력은 난민들이 저질렀다고 여겨진 몇몇 범죄와 가짜뉴스로 인해 극우주의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점이나, 전 세계에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통해 인류애는 자국민 중심주의 앞에서 무력하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즉,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같은 대의는 개인의 안전과 이익에 부합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상투적인 말에 불과할 따름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지향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라고 불릴 수 없다. 저자는 여성중심주의로 여겨질 것을 우려해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지 않았지만, 오해를 줄이기 위한 꼼수다. 페미니즘의 중심에는 ‘여성’이 존재한다. 이를 교차성을 통해 인종, 노동자, 난민 문제와 함께 페미니즘을 다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과도히 확대해 ‘지구 위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를 함께 이뤄내’고자 하는 운동이 되어버린다면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인 여성이 사라지게 되며, 또한 여성들에게 세계적 시민으로서의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라고 하는 막중하고 과도한 임무를 부과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트랜스젠더 숙명여자대학교 합격자 입학 반대 논란’에 대해 혹자는 쉽게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거부한 여학생들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대 여성이 ‘절대적 피해자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가 불러들인 사건이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이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보편적 인권을 위해 포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자리는 점차 인권으로 대체된다. 운동이 추구하는 목적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 아래 무력해진다. ‘시민으로서 평등과 정의’는 무엇이 핵심인지, 사람들을 이끄는 동기는 무엇인지에 대한 선택의 폭을 과도히 확장시켜 ‘선택과 집중’을 불가능하게 한다. 페미니즘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 페미니즘은 성차별의 종식과 젠더 평등과 젠더 정의를 실현하여 여성 전반의 인권을 도모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선 모든 종류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은 페미니즘의 현실적인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사회운동이 꿈꾸는 최종적인 이상향이며, 페미니즘이 부담하기엔 너무나 큰 짐이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수식하는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한다.
5 지금 우리의 페미니즘
지금 우리에게도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했지만, 수많은 반대에 이기지 못해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나, 트랜스젠더 군인의 전역문제 등, 성별 갈등을 다루는 우리의 논의는 자연적 성에 대한 담론을 넘어섰다. 이젠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옛 방식은 다양한 사회현상에 의해 힘을 잃었다. 우리는 그 이후를 넘어서 더욱 다양해지고 다각화된 사회적 현상을 담아낼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페미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확대해서 이를 이상향으로 여겨야 한다는 작가의 외침은 이렇게 복잡적이고 다각화된 사회적 현상을 담아내기 위한 학문적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확장은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본질적인 물음, 즉 ‘여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퇴색시키는 위험을 야기했다. 자연적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의 이익이 대립하게 될 때, 페미니즘은 누구의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생물학적 여성의 손을 들어줬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 전반이 비판받을 순 없다. 오히려 현대 페미니즘이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표면 위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 문제들을 페미니즘이 모두 포용할 수 있는가? 아니면 페미니즘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운동이 등장해야 하는가?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어느 운동의 수식어가 되지 않고 그 자체가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현대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