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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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의 수수께끼

근대화라는 축복 덕택에 우리는 홉스가 이야기한 리바이어던의 세계, 즉 무질서하고 수단이 결과를 정당화하는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근대화의 단물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우연히 지금 환경에 던져졌을 뿐이지, 그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계몽의 과정이었다. 인류의 과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폭력과 잔학이 이살 깊숙이 뿌리박힌 피투성이 세계였다. 하지만 근대자유주의자들의 작업으로 근대 인류는 자유를 획득했고, 법치 시스템을 통해 질서 잡힌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 덕에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에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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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대화 시기를 겪지 못했다는 시간적 한계로 인해, 사람들은 현대의 문화가 당연하고 가장 진보적이며 가장 우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의 세계는 근대화되지 못한 저쪽 세계의 야만과는 다르다는 명확한 경계가 사람들의 사고방식 한쪽에 자리 잡았다.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 즉 유아 살해, 식인, 여성폭력, 학살 등등은 현대 국민국가 체계 아래에서는 반인륜적 범죄로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혹은 존중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고유한 문화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왜 저렇게 미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왜 우리랑 동떨어진 삶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을까? 혹자는 저들을 하루빨리 계몽시켜 국민국가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인류애적 충동이 싹틀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저들의 문화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할 인류 세계의 치욕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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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 마빈 해리스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저들의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는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화를 해석하는 데 미개함과 종교에서 찾는다. 특히 종교는 사람들을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란 점에서 주요한 원인으로 손꼽힌다. 암소를 숭배하는 힌두교의 교리로 인도 사람들이 지천에 널린 암소를 눈앞에 두고도 굶어 죽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그 책임을 종교에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특히 종교는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화하는 데 능숙하다는 점에서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대상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들은 단지 종교의 교리에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해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문화에는 감춰진 다른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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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저자는 생활양식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그 대답은 신밖에 모른다라고 대답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문화에는 각기 다른 사회,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답한다. 저자는 힌두교의 암소숭배와 이슬람교도의 돼지 혐오에서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원인을 찾는다. 수많은 경제학자는 암소숭배로 인해 인도의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오히려 그는 암소숭배가 인도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도의 소가 소비하는 사료 중 식용작물의 비중은 고작 20%에 불과하며 나머지를 인간이 먹고 남은 부산물로 충당한다. 저비용으로 소를 기르고 나면 소는 사람들에게 원료, 농기구, 유지, 가죽 등을 제공한다. 인도 소들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가치가 거의 없는 물건들을 인간에게 직접적인 가치가 있는 유용한 제품으로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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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힌두교의 암소숭배 관습은 저축과 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트 경제윤리보다 훨씬 탁월한 경제성을 나타낸다. 암소숭배는 문자 그대로 마지막 한 방울의 우유까지도 암소에게서 짜내겠다는 무자비한 결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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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의 유무는 가난한 농업 가구의 경제상태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소를 대량으로 도축한다면 그것은 집단의 복지를 위협할 것이 자명했다. 경제학자들이 소를 도축해야만 인도의 농업을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가난한 농민계층의 유일한 경제적 수단을 파괴하겠다는 뜻이다. 인도 대다수 농민은 암소숭배가 아닌 생계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소를 도축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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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도들이 돼지를 대하는 태도는 결과는 암소숭배와 같지만, 그 동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돼지를 혐오하기 때문에 돼지를 도축하지 않는다. 교리는 돼지가 더럽고 불결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돼지를 키우기에 중동지역이 여러모로 부적합한 지역이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돼지사육에 필요한 비용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아주 맛있는 고기로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종교적 지도자들은 야훼와 알라의 이름을 빌려 돼지를 금지해야만 했다. 종교는 단지 그 근거를 당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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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이라고 일컬어지는 원시 공동체 문화도 합리적인 경제토대 위에 서 있다. 뉴기니의 마링족은 돼지를 집단으로 도살하며 즐기는 카이코라는 축제를 일정 주기로 개최한다. 이 축제에서는 과도할 정도로 돼지가 도살되고 이후 이웃 적대 부락과 전쟁을 벌이지만, 정작 승전한 쪽이 패전한 쪽의 경작지를 차지하지 않고, 패자는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는 사뭇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를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돼지를 치고 룸빔이란 나무를 심은 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축제와 전쟁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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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축제가 반복되는 이 풍습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한다.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밀림이 우거져있어 화전을 통해서만 경작지 확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화전이 반복되면 지력이 떨어져 생산성이 낮아진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을 통해 지력을 고갈시키는 돼지를 도축하고 경쟁자들 내쫓아 지력이 고갈된 경작지를 회복시킨다. 전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성들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고, 이와 동반하여 유아 살해와 여성차별이 빈번해진다. 마링족의 성비는 150:100으로 극단적인 비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마링족에겐 전쟁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어 전쟁은 반복되었고 피임이나 낙태를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단도 부재해 여아살해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야만적인 폭력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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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문화전개 과정에서 이뤄진 여러 가지 사건도 단지 기독교적 교리와 야만적 폭력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메시아니즘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있던 식민지들이 제국을 전복하려는 투쟁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대민족의 혁명은 단지 유대인들의 전투적이고 게릴라적인 메시아니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로마 식민주의의 불공정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들을 이끈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신의 메시지였지만, 그 동기는 불공정함에 대한 반기였다. 평화적 메시아로 포장된 예수 또한 실상은 전투적 메시아 중 하나였다. 제자들에게 검을 지니라고 요구하는 점과 성경 구절에서 반복되는 모순된 말(예로 마태복음59절에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하는 반면, 마태복음1034절에는 화평이 아니오, 검을 주러 왔노라 라고 말한다)들은 그가 전투적 메시아니즘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단절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따르는 자들은 숱하게 죽었고 유대민족은 국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평화적 메시아로서 예수는 반로마 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후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가 해가 없다는 것을 로마에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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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뤄졌다고 생각된 마녀사냥은 사실 15~17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나 있었던 폭력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1000년 동안 마녀 같은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기시했다. 하지만 이 금기는 500년 후에 뒤집혀 1485년에는 마녀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왜 로마 교황청은 1000년 동안 이어져 온 원칙을 뒤집고 무고한 50만 명의 사람들을 숯덩이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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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적으로 이뤄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컸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든 신교 중심의 전투적 메시아니즘이 보편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봉건질서의 붕괴로 지역의 농민들은 경작지와 재산을 잃고 방황과 가난에 직면했다. 그들의 원한은 자연스레 지배층과 교회를 향했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을 단결시켰다. 전투적 메시아니즘은 그들 사이에 집단소명감을 주었다. 하지만 지배층은 마녀광란을 통해 사회위기의 책임을 교회와 국가에서 가상의 괴물인 악마와 마녀로 전가했다. 그 결과 가난한 자들과 무산자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고 문제해결 주체인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됐다.

마녀광란은 사회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p310

 

3. 지금의 우리는 야만에서 자유로운가?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시도는 생활양식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 속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문화의 생활양식을 인류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방법을 통해 파헤치고, 그 의미를 곡해하고 왜곡하는 시도 전반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생존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끌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적 교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할 뿐, 우리가 ?’ 그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은 근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야만으로밖에 비칠 뿐, 그들이 취한 행동 양식 전반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저자가 비판하는 반문화는 객관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비지성적 능력과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난 의식을 추구한다. 그들이 이성이나 증거, 객관성 등을 경멸하는 태도는 반대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여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나 사회의 불평등과 불의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마녀의 복귀를 야기할 것이다. 이 마녀는 마녀사냥으로 조작된 희생자들이 아닌, 환각효과에 취해 현실을 분간하지도 못하는 마약쟁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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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접근법은 현대 사회에 도래할 수 있는 야만에 대한 경계로도 읽힌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본성은 변해왔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서판이기 때문에, 계몽된 교육을 받아 도덕으로 체화된 천사들인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 스티븐 핑커 교수는 이러한 의견을 반박한다.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잔혹한 악마와 선한 천사가 항상 공존하고 있으며, 그중 선한 천사를 끌어내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외생적 요인들이 있다. 그 요인 덕분에 우리는 폭력성을 억제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외생적 요인은 법질서, 교육, 사회화 과정 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외생적 요인들이 우리 내면에 악마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리고 그 악마들이 전 사회 공동체 안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야만의 복귀를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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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야기하는 과학적 객관성은 내면의 악마들을 불러오는 외생적 요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는 전언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영향력은 과거의 빛을 잃었다. 하지만 종교는 이념, 정치적 언사, 민족주의 등으로 대체되었고, 그것들은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방해하며 그들을 호도하고 있다.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대체로 가족을 잃은 노인, 외부에서 온 이방인, 그리고 여성이었다. 즉 당시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의 희생자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책임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된다. 유럽과 미국에서 난민들이 그랬으며, 혐오의 대상은 성 소수자, 노인, 장애인, 여성 등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트럼프 미 대통령은 차별을 의도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며, 근대적 인권 개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약자에 대한 혐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으며, 최근 군대와 대학에서 불거진 성소수자 배제 문제는 여전히 차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현대 문화의 현실을 절감할 수 있다. 차별을 조장하는 그들의 발언이 객관적으로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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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야기는 현대 문화가 과거 문화에 대한 과학적 객관성을 지닌 올바른 인식을 통해 발전해왔다기보다는, 과학 문명사회라고 하는 현대에서조차 무지·공포·갈등이란 의식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기아, 성차별, 착취와 같은 과거 문화의 잔재는 현대 문화에서 사라지지 않고 교묘하게 복귀할 수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의 극우주의 정당, 트럼프, 시진핑의 중국몽, 푸틴의 권위주의 등은 야만의 복귀를 알리는 전조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일상적인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여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객관세계의 진의가 무너지고, 비지성과 반지성의 마법이 우리를 합리적 판단을 현혹한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문화의 붕괴, 총체적 야만일 것이다.

 

우리는 경찰력과 군사력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육체적인 힘에 의존하는 전투술을 배제하고 보다 개선된 전투술을 개발해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되고, 경찰력과 군사력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희망하자. 순수한 성혁명(性革命)의 결과가 핵미사일 부대장이나 핵부대 사령관직을 남성 아닌 여성이 장악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원시 야노마모족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별로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p 107

 

전쟁이란 특수한 기술조건, 지형학적 조건, 생태학적 조건 등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의 한 부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는 전쟁이 항상 존재해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이 어떻다느니 전쟁의 동기에 괴팍한 어떤 것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때, 내부집단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수단이 전쟁을 대체할 것이며 우리는 이를 충분히 바랄 것이다.”

p122

 

우리는 일상적인 의식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건강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사회의 불평등한 요소를 우리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토록 희박하다면 생활양식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 속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장하는 것이 도덕적 지상명령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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