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를 부탁해>에 관해 분분한 비평과 관점들의 차이에 대해 몇 몇 검색을 통하거나 이 고원에서의 관련 글들을 통해 확인했다. 물론 소설을 읽기 전 까지만 해도 별 관심을 갖지 않다가 그것을 단 숨에 읽고 나서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고 해 두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나의 성향에서는 물론 신경숙의 작품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께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책상머리에 바로 문제의 <엄마--->가 놓여있기에 호기심에서도 처음 집었는데 중간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틈 빼고는 그냥 그 공간 안에서 단 숨에 다 읽어버렸다. 아니 그냥 단 숨에 읽히는 소설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는지 모른다. 간결하게 문장이 평이한 문체로 단박단박 끊어져 있고, 그리고 역시 그 평이의 궤도 안 속으로‘엄마’라고 하는 이미지가 무슨 강박처럼 계속적으로 단순 반복됨으로 결국은 그 모성적 신비의 중첩에 독자의 마음이 무쇠라도 허물어져 내리도록 장치되어 있으니 단 숨에 읽혀지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한 단순 반복은 요즘 소녀시대 류의 팝 음악 속에나 보이는 중독성 리듬과 박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도 그 리듬에 자연스레 느낌과 생각을 맡겼고 그것을 편하게 즐기고 있는 나를 또한 느꼈다. 
  

어쨌든 신경숙은 우선 글이 읽히는 신경과 대중적 성감대적 요령을 잘 학습, 그것을 손쉽게  타격을 잘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엘리트 코스를 통해 직진한 전문적이라는 포스가 느껴지는 그 일말의 밀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아서 신선하기까지 했고, 그러한 국면이야말로 시골에서 상경,‘공순이’의 자아 경계와 자기 저변을 관통, 마침내 자신의 글이라는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한, 한 사람의 개성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져서도 좋았다. 정해진 코스의 선택된 소수자가 아니라 그 위계의 분절선 마저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그 평이하고도 찐득, 질박한 감수성의 미감은 분명 그 희소성 차원에서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희귀종’의 개성적 권위를 점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누가 뭐랄 수 있을까? 
  

그리고 특유의 여성적, 신경숙만의 미끄러운 감수성, 그 렌즈에 의해 재배가 재편집되는 모성에 대한 기억 영상과 존재감, 역추적은 또 어떤가? 정확히 작가와 같은 나이, 같은 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그녀의 렌즈를 따라 가보는 모성애를 향한 탐색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로의 낯 선 여행 그 자체였다. 페미니즘적 대결적 성차에서 또 다른 성차의 세계만으로도 이렇게 기존의 묵고 침잠된 이미지가 새롭게 경험, 복권되고 있는 국면, 그러하게 세계차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마술로 작동되고 있다면 그 힘,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문체는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런 점을 긍정한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복수 화자에 관한 담론이나 인칭의 전도 같은 것도 스토리의 흐름을 더욱 산뜻한 차이로 격상시키는, 일종의 ‘넛지효과’쯤으로도 보아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문제가 소설에서 보여져야할 인식의 파괴력이나 인간과 세계를 더욱 유능하게 해석하고 대결시키는 치열성과 그에 연관된 전문적 역량이라면, 그 함량의 국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라면 또한 그녀에게서 어떤 결여를 맹렬히 변별하는 시각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부로의 섬예한 문제제기로서의 설정과 문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벌여놓거나 사적인 전회를 향하여 무난한 풍경기로서 봉합되고 마는 전체 흐름이 이러한 국면에서는 손쉬운 표적이 되는 것은 분명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가 그냥 편하게 그녀의 글을 따라가게 하는 것은 낮은 하향적 초월의 얼굴, 엄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엄마의 권위의 그늘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화자의 형제들의 편한 얼굴들이 아닌가? 성장기에 성공한 자녀들의 얼굴로 인해 엄마의 희생의 존엄이 구조적으로 구원되는 방식의 풍경기적 설정은 그런 경관임에 한해 상대적으로 전혀 그 희생의 존엄이 담보되지 못하는 수많이 또 다르게 희생되고 스러지는 탈신비의 어머니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비판을 또한 즉시로 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여전히 산티아고와 같은 우아한 격자의 여행은커녕 지방, 귀향인사도 어려운 경제적 불구자들, 실종된 엄마를 찾는 사례금을 삼백으로 할 것인가 오백으로 할 것인가 하는 형제간의 팔자 좋은(?) 논의는 고사하고 만성적자에 가계 빚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를테면 ‘하우스 푸어’아니면 몸과 마음, 어느 한 쪽에 절단이라도 난 곤궁과 결여가 득실거릴 수 있는 가족에 비한다면 작품속의 작가에 약사에 괜챦은 토목기사로 구성된 가족 면면들은 지나치게 또한 유년기의 결여로부터 손쉽게 보상받고자 하는 자위적 경관이 아닌가? 그러하게 안전한 경관기적 세계관으로 작가가 할 수 있는 국면이란 그렇다면 잃어버린 그 무엇에 대한 향수를 자극, 고무시키거나 고작 색다른 감수성 공간을 변별, 돌파하는 퇴행적 작업이 아니고는 또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들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녀의 희귀종 문체라고 하는 것도 누구나 은폐하고 싶은 전 시대의 가족사, 성장기에 저마다가 축적시킨 핍절한 자의식이 그녀로 해서 어떤 내밀한 치장이나 무늬, 통하는 미술로도 역전, 반전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짜릿한 면죄부로도 작동되고 있는 형국이므로 그녀의 문체가 아닌가? 그런 연유로 해서 그녀가 그렇게 잘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나는 신경숙을 읽은 첫 경험에서부터 사실 좀 얼얼한 기분이다. 그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를 해도 지워지지 않는, 끈적한 질감의 그 무엇이 남는 것을 느낀다. 통속인지 전문인지 그 손쉬운(?) 구분선으로 해서도 잘 정리되지 않는 끈적한 그 무엇이 여전히 나에게 남았다고 한다면 내가 너무 그녀를 좋게 본 결과, 어떤 기시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문체로 인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자의 도구, 맨 몸의 힘, 즉 어떤 보편에의 용기와 입지전적인 소망의 질료감 같은 것에 살짝 데인 것과 같은 어떤 그런 유쾌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