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한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위험해!‘라는 생각이 들면바로 움직여.‘좋아해!‘라는 생각이 들어도곧바로 움직이고.우리는 움직이기 위해 살아 있으니까.
요즘 너무 바빠 독서 진도가 안나간다.. 내 시간이 더 필요해.
낙인과 수용소에대한 고프먼의 연구는 사회가 그 내부에 일체의 존중의 의례가 사라지는 예외 지대를 마련해두고 있으며,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어서 배제와 조건부 통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신분주의와 싸워야한다 -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낡은 신분주의만이 아니라, 배금주의의 토양 위에서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새로운 신분주의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노동자=못 배운 사람‘이라는 등식이 지배하였고, 이는 조선 시대에 양반이 상민에게 그랬듯이 노동자를 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관리자가 노동자에게 나이에 관계없이반말을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고등교육이 일반화된 오늘날, 이런 종류의 신분 차별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실 1퍼센트를 위한 사회에서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대접받기 힘들다. 사람 위에도 ‘매우중요한 사람(VIP)‘ ‘매우 매우 중요한 사람(VVIP)‘ 등이 있기 때문이다.‘매우 중요한 사람‘ 앞에서 그냥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노바디‘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