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이 책을 강압적인 교육의수단으로 삼지는 말았으면 합니다.D. P.
정세랑 작가는 캐릭터를 정말 잘 만든다. 웨딩드레스44에서는 한 장짜리 이야기에도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최근 소설을 읽는 게 좀 재미없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활력이 돋았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몇 번이고 남은 장수를 세어가며 책을 읽었다.심시선 여사의 가계도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그녀의 삶을 조금씩은 이어받은 그의 자손들은 각자의 이야깃거리만으로도 각 소설의 주인공을 맡아도 손색이 없다. 이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는 심시선 여사의 삶은 기구하고 그 시절의 한계를 가졌지만 끊임없이 싸워온 그의 생은 헛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의 아들은 어떻게 자랄까 늘 궁금했다.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내가 가진 권력을 인정하는 규림과 나보다 잘났던 아내보다 내가 잘 된 것이 불공정한 사회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는 명준이 그래서 인상깊었다.모두가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머물러 있기만 하는 사람이 없는 이 가족의 삶은 안타깝게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판타지다. 하지만 시선으로부터, 그 자녀들로부터, 그 손자녀로부터 끊임없이 뻗어나갈테다.
한국 사람의 부모 탓은 명준이 봐도 너무한 데가 있었다. 물론 자유분방한 집안에서 자란 것이 그런 실수를 하게 만든 데 일조를 했을 수는 있지만, 자유분방한 집안을 시선 혼자 만든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우리, 괜찮은 거지?"명준이 다시 물었다."응,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돌아와.""나는 우리가 라켓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쪽은 벽이었어?"
어떤 시대는 지나고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화수에게 시선은 어른 그 자체였고, 그 어른이 무겁고 더러운 사슬 같은 것을 앞에서 끊어줘서 화수에게까지 오지 않도록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여겼던 듯했다.나도 어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