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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 신경질적인 도시를 사랑하며 사는 법에 관하여
김도훈 지음 / 웨일북 / 2019년 3월
평점 :
언젠가부터 에세이를 즐겨 읽었다. 특히 소설가나 시인, 출판사에 근무하는 편집자 등 글 전문가들, 또는 음악가나 미술가
등 예술가들의 에세이는 항상 좋았다. 아마도 그들에게 내재된 문학성이나 예술성이,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에 남아 일상을 살아가다 종종 떠오르는 멋진 산문을 쓰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의 이 산문집 또한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읽다가 샤프로 줄을 진하게 긋고 싶은 문장들에 행복해했다. 고양이가
내뱉은 털 뭉치만 한 낭만이 건져 올려진 것이 아니라, 우주만큼의 낭만이 길어 올려진 것 같다.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며 고양이가 내뱉은
털 뭉치만 한 낭만이라도 건져 올린다면, 나는 포르쉐를 사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p. 7)
초등학생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이사를 간 후 마음이 아파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편지를 보낸 에피소드, 에비앙을 좋아해 고양이에게도 무심코 에비앙을 따라 준 에피소드, 누르면
“삐이! 삐이!” 하고
경적 소리를 울리는, 자동차를 탄 크르텍이라는 체코의 캐릭터를 산 에피소드, 흑인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좋아했지만 인종 차별의 벽 앞에 좌절하다 경기 중 역사에 남을 반역을 남기고 은퇴한
선수를 지켜본 에피소드 등 진솔하며 재미있는 그의 이야기가 유려한 문체로 펼쳐졌다.
괜찮음과 안 괜찮음 사이에서, 품격과 허영 사이에서, 쓸모와
쓸모 없음 사이에서, 옳음과 현실 사이에서 떠도는 그의 에세이들을 읽으며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감흥의 유희를 즐겼다.
십여 년 간 잡지를 만든 저자의 잡지에 대한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휴식도 없는 글쟁이들의
지옥에서 탈출하려 잡지 회사를 나왔지만, 너무도 잡지를 사랑해 곧 다시 다른 잡지 회사에 들어가버린
에피소드에서 잡지에 대한 중독적이라 할 정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잡지는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저자는 온라인 매체에서 일한다. 그러나 잡지의 물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늘도 나는 새 잡지를
주문한 뒤 종이 냄새를 맡으며 안온함을 느낀다. 그건 매우 이율배반적인 행위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p. 76)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잡지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잡지사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국내 잡지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나 해외의 잡지들은 후대의 사람들이 계속 잡지의 콘텐츠를 볼 수 있도록 지면 전체를 아카이빙한다.
이에 대해 저자가 남기는 한 마디는 생각해볼 것을 우리에게 준다.
물성에의 매혹은 사라질
수 있다. 콘텐츠는 남아야 한다. 그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잡지들을 휴간하고 폐간하는 콘텐츠 회사들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책임이고 긍지다.
(p. 180)
잡지쟁이로서의 사명감도 인상적이지만, 개인적인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며 저자 개인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선장님이어서
일 년에 몇 달 집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의 부재와 큰아버지에 대한 사랑, 군대에서 축구를 못 해서 고생했던
이야기, 피겨 스케이팅 선수나 독서를 좋아했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삼삼했다.
나이가 들면 감추는 게 많아진다는데 나는
어째 나이가 들수록 글을 쓸 때 더 솔직하게 까발려버리고야 만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 독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솔직함을 믿는다.
(p. 239)
솔직하다 보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도훈 작가의 솔직함
앞에서는 모두 무장해제되어 책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우주만큼의 낭만으로
행복해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