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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진리를 선취하고 있다는 착각. 그게 문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는 점. 그거다.

 

아직도 <민주vs반민주>  <정의vs불의> 와 같은 프레임으로 <'우리편' vs 새누리당> 으로 이해하는 자들 덕분에 새누리당은 집권당이 되었고, 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많이 당선시켜주는 한 앞으로도 새누리당은 계속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나 또한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가 마치 자신들이 정의를 독점하는 양 행동하는 것이나 새누리당을 마치 악의 무리인양, 생각하고, 그걸 전제로 말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왔으므로

 

메세지의 부재 콘텐츠의 부재가 민주당의 문제라는 진중권의 이야기는 그것대로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강준만의 이 이야기와는 전혀 결을 달리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메세지가 문제냐 싸가지가 문제냐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고 이 문제는 그냥 차원이 다른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둘 다 문제이나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싸가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강준만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한다. 특히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령 실제로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나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만일 그런 나쁜 조건은, 언제나 그래왔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지언정. 그러므로 나는 그런 따위의 조건은 그냥 일단 상수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바꿀 수 없으니까. 혹여 그걸 변수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걸 결정적 변수로 놓겠다는 건, 스스로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이데올로기론. 이 책에서 이 얘기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선악의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새누리당에 투표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보니 그들의 학력수준과 그들의 투표행태를 연결지으려 한다. 일견 틀린 얘기는 아닐 가능성이 높긴하다. 실제로 뭐 거기까지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니 큰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언론지형으로 인해 가방끈이 짧은 많은 사람들이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서, 그러니까 가진자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언론을 통해 가지지 못한 자들을 거짓으로 구워삶아 그렇게 됐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는 것 또한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으나 이건 선을 전유하고 있는 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서사다. 이 이야기를 통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의를, 선을 가진 자가 되는거니까.

 

이 책에 대한 몇몇 비판적인 논평을 봤는데, 이 책을 읽고 하는 얘긴지, 그게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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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키 2014-09-0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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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팔리는 건, 그 팔할이 알랭 드 보통의 이름값 덕분인듯.

뭔가 좀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 이야기를 한참 재밌게 하다 중간에 끊긴 느낌.

주제 자체는 섹시하여 흥미를 돋게 하긴 한다.

다만 정론이든 황색매체든, 혹은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뉴스 그 자체가 가지는 우리사회에서의 기능을 문제삼으려 했다면, 그 뉴스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지,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뉴스가 중세의 종교와 같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이런 얘기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뉴스의 카테고리를 분류해서 보여주는 것 말고.

일종의 뉴스의 계보학 같은 것.

적어도 책 제목과 같이 <뉴스의 시대>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라면.

뉴스의 시대가 아니었던 시대와 지금, 뉴스의 시대인 지금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면,

바로 그 뉴스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해야 하지 않았을까.

<뉴스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뉴스인가?> 혹은 <누구를 위한 뉴스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그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가령. 이런거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증권가 찌라시나 조선일보나 kbs나 한겨레나 오마이뉴스나 일베나 디시, 혹은 트위터 따위를 통해 유통되고 생산되는 뉴스의 사회적 기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실 뉴스 바깥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그 뉴스가 유통되는 장의 한복판이 아니라, 바로 이 <뉴스의 시대>를 상대화해서 볼 수 있고,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다시말해 관점의 차이에 기초해서 어떤 뉴스가 어쩌고 저쩌고 하자는 게 아니라 뉴스라는 <공공의 이야기거리> 그 자체가 21세기의 인간의 삶 속에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했으 듯.

 

살짝 지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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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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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본을 대본으로 한듯 한데 왜 그랬을까요?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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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sifal 2014-08-1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프랑스어 원서로 번역을 했으면 한층 더 좋았을 터인데... 프랑스어로 경제서적 번역하기가 너무 어려웠나?

영어본이 2014-08-20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역 상대본인게 확실한가요?
중역이면 안좋긴 한데...

그건아닌데 2014-08-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불어판은 작년8월에 출간됐고 영어판은 올해3월 영역 출간됨
2.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더 핫한 반응
3. 어떤 걸 대본으로 써도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굳이' 영역본을 대본으로 쓴 이유가 궁금하기는 함 (출판사는 불어판 판권자와 계약했으면서도 영어판으로 작업한듯) 아마도 불어원서를 대본으로 한 번역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그렇게 됐을 가능성. 어쨌거나 출간을 빨리 해야하니까. 뭐 이걸 크게 문제삼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음. 출판사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
4. 다만 3의 문제는 상도의의 문제가 있기는 함.(그렇다고 그게 심각한 건 아니지만) 왜냐면 영어판 번역자에게는 어떤 물질적 혹은 정신적 대가(감사의 표시 등)도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
5. 불어판과 영어판에는 미묘하게 번역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 물론 그게 국역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음. 문제는 그게 문제가 있는지여부와는 다른, 그런 차원의 문제일 것 같음.
6.영문판만 보고도 번역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판단하신건(실제로 별다른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으나) .... 그건 좀 아닌듯.
7. 이건 심각한 문제라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그냥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한듯. 오버라기보다는 그냥 슬쩍 제기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듯

그건아닌데??? 2014-09-1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원본이 불어판이라면, 저작권 계약하고 인계받은 책 자체도 불어판일 텐데, 이걸 영어판으로 번역한게 문제가 안되나요?
2. 미국에서 더 핫한 반응이라는 것이 미국판을 저본으로 번역한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음.
3. 원본이 아닌 영역본을 저본으로 번역한 것이 문제라면서도, 3~7번에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는데, 문제라는 건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문제이지만, 별 문제 아니다."가 님의 논점이신건가요?
4. 중국영화에 영어자막 입힌 걸로 한국어자막 다시 입히거나 더빙한 경우 얼마나 말도 안되는 번역이 많은지 못느끼시나요?
5. 본질은 상도의의 문제가 아니라, 이중역 때문에 오역의 가능성이 훨씬 더 커보인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급하게 여러 사람이 나눠서 번역한 모양인데, 그것도 이중역. 문제 많아 보입니다.

qqq 2014-09-1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씀들 참 많으시지만,
그게 문젠지 아닌지...
중요한건,
읽어보세요. 읽어들 보시고 말씀하시면 참, 좋겠는데.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리고 읽을 예정도 아니면서 말씀들만 많으셔들.
안타깝.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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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주문한 이 책을 오늘 받았다. 초반이지만 잘 읽히긴 한다. 번역이란게 애초에 단어 뜻풀이도 아니고 저쪽의 문화를 우리의 문화로 옮겨놓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떤 걸 판단할 때 명백히 틀렸다고 할 수 있는 영역도 있을테지만 그저 논란의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는, 그런 판단중지의 지점 또한 많을 거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좋은 책을 공들여 번역해준 역자와 출판사에게는 감사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의 역자와 출판사는 좀, 뭔가 넘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뭔가 화가 나 있는거 같다 이건 화낼 일이 아니다 그냥 잘못을 차분하게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화가 나 있는 것 같다는 나의 느낌이 그저 나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일까?

또 하나 아무리 그래도 기존의 번역이 0일 수는 없을텐데 그게 마치 0인걸로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걸로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걸로 취급해버린다. 이게 가당키나한 일일까? 자신감인가?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해줄 말이 이거다. 과유불급 특히 노란색 띠지의 워딩들은 어찌나 닭살돋는지 아무리 영업상 과장을 어느정도 한다는걸 감안하더라도 진실이 어쩌고 비밀이 어쩌고 속았다는 둥 어쩌고 하는건 너무 심하다 나라면 닭살돋아서 그런 워딩은 못골랐을텐데 ... 아무튼 그렇다

그런 식이라면 기존의 역자와의 대화는 불가능해보인다. 사실을 지적하기만 하면 대화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역자와 출판사의 생각에 일부 공감이 되면서도 마치 죽일놈을 만들어버리는 식으로 기존 번역을 취급해버리는 순간 서로간에 한 마디도 말이 오가기 힘들거라는 생각이다.

 

나머지는 좀 읽어보고 다시 써야겠다

 

책을 다 읽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싶었다. 새움판 역자 등등은 왜 이토록 흥분했을까. 대략적인 감상은 이렇다. 스스로 완전무오류를 참칭하지만 않았더라면, 다른 번역판을 굳이 그렇게 쓰레기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 수 많은 <이방인> 번역 판본에도 불구하고 새움판 번역도 나름 출간될 명분 정도는 있었겠다, 뭐 이 정도다.

 

사소한 거 하나. 이건 그냥 궁금한거다. 뫼르소가 부고를 듣고 휴가를 신청했다. 지금 <이방인> 책이 없어서 페이지 등 구체적인걸 확인할 수는 없는데, 새움판의 경우 사흘이라고 했다. 그런데 난 이상해서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문학동네판을 대조해봤다. 그런데 거긴 나흘이라고 돼 있다. 목요일 오전에 부고를 듣고 그날 오후 2시차를 탔으니 뫼르소는 사장에게 아마도 목요일 오전중에 휴가신청을 했을 거고 금요일에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아침에 일어났더니 토요일이었다. 그러니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나흘동안 휴가였던 셈이다. 사장 입장에서는 목요일 금요일 이틀 휴가를 준 셈이고. .. 뭐 나로서는 원서 영역서 등은 물론이고 번역판도 문학동네판 말고는 없는 처지라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새움판의 경우, 좀 이상한데, 사실이라면 사소한 오류 되겠다.

 

뭐 사소한 오류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이거다. 이 새움판 역자가 너무나 자신만만, 혹은 그 이상으로 너무 지나치다는 점. 그거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시는지.

 

결정적인 안타까움이 있다. 번역노트라고 두껍게 있는데, 다 읽지는 않았다. 처음에 읽다가 굳이 읽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이런 얘기가 있었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정당방위. 이건 카뮈의 <이방인>을 삼류추리소설로 만들자고 작정한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뫼르소를 향해 묻는다. 왜 쐈냐고. 태양때문이라고. 이걸 읽은 새움판 역자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과 그런 의문은 뫼르소의 소설속  변호사라면 할 수 있고, 뫼르소를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변호할 때나 끄집어낼 수 있는 레토릭일 뿐이다. 하지만 새움판 역자는 이제 비분강개. 흥분하기 시작한다. 아니! 우리는 지금껏 속아왔다는거 아닌가!!! 어쩔 수 없다. 나라도 해야지. 뫼스로가 총을 쏜건 이유가 있었다는거다. 그리하여 정당방위.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보태기도 민망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새움판 역자 등등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뭐 이건 내 견해다. 혹시 당신들이 이 글을 본다면 이렇게 생각하시라. 나와는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지만, 당신들은 김화영의 인격과 성과를 쓰레기로 취급해버렸다. 뭐 반드시 이게 옳은건 아니겠지만, 혹시 억울하다거나 굴욕감을 느꼈다면, 역지사지 해보시길.

 

읽기 전에 나름 기대를 가졌었는데, 아주 후져서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번역은 아니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의 번역도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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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의 이딸리아 맛보기
박찬일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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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팬이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아마 읽는 내내 즐거울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여기서는 책 얘기 말고 딴 얘기를 써보려고 한다.

 

창비 책은 조금만 읽다보면 짜증이 치민다. 이 책의 경우 첫번째 페이지 두 번째 문장부터였다. 바깡스. 대체 그 이해할 수 없는 표기법에 대해서. 대체 어느 나라가 외국어나 외래어를 표기할 때 창비식으로 하는 지 알 수 없다. 한 번 따져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식의 표기법은 한국어를 아주 모욕하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에는 질서가 있고, 그 질서는 가능하면 실제 존재하는 수 많은 변수들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입말보다 글말은 당연히 더 보수적이고 안정성을 추구한다.창비식의 표기는 한국어를 마치 발음기호로 전락시켜버리는 일과 같다. 어떤 언어든 실제 발음과 표기되는 방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창비 편집실은 그것의 불일치를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수십년간 우리가 포르투갈이라 쓰고 에스파냐라고 썼던걸 굳이 원어발음과 일치시켜야 한다는 원칙 하나로 뽀르뚜갈, 에스빠냐라 표기해야 한다는, 별로 설득력 없는 강변. 창비가 말하는 그 원칙, 그러니까 현지발음을 준용해야 한다는 원칙도 우리가 외국어나 외래어를 표기할 때 참고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유일한’ 원칙이 되면 곤란하다. 그 원칙 말고도 몇 가지 다른 중요한 복수의 원칙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론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반대로 영어나 한자의 경우 한국어와 달리 그렇게 표기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긴 할 것이다. 실제 발음과 철자가 다르다고 해서 철자 한 두개를 넣거나 빼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한자도 마찬가지로 획 한 두개를 넣거나 뺀다는 건 글자 하나를 새로 만들어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임의로 표기법을 고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Paris라 쓰고 프랑스인은 빠히(에 가까운) 라고 읽고 미국인은 패뤼스라고 읽는다. 대체 이게 뭐가 문젠가. 미국인도 프랑스인과 같이 그걸 빠히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심지어 철자를 임의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웃음거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 이름, 가령 베네치아를 영어에서는 베니스라 읽는다. 철자도 다르고. 이게 뭐가 문젠가. 이걸 문제삼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나는 없다.

 

 

가령 영어의 s로 표기되는 단어는 대개 영어의 z발음(한국어 철자체계에서는 이걸 표기할 길이 없다)이거나 우리말 발음으로 ㅆ(쌍시읏)발음, 둘 중 하나다.(그런데 사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케이스바이케이스인데, 왜냐하면 말이라는 게 가령 자음동화 등과 같이 특정 철자의 전후에 있는 철자를 발음의 영향으로 쉽게 발음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서, 구체적인 단어마다 미세하게는 다 다르다.) 아무튼 영어의 s가 우리말 ㅅ(그러니까 스)으로 발음되는 경우는, 내가 아는 한, 없(거나 거의 없)다. 창비가 bus를 어떻게 표기했었는지 가물가물한데, 창비식이라면 그것도 버쓰라고 표기해야 할 것이다. 내 기억에 kiss를 키쓰라고 표기했으니 버스가 아니라 버쓰라고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한국어는 그저 외국어를 현지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발음기호로 전락시켜버리게 되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현지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는 원칙 말고 다른 원칙은 뭐가 있을까. 첫 번째. 지금까지 해당 외국어나 외래어를 어떻게 표기해왔는지를 감안하는 것이다. 가령 인명 중에 이런 인명이 있다. Slavoj Zizek. 어떤 사연이었는지 이 사람의 저작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될 때 슬라보예 지젝이라고 표기됐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한 참 지나서 사실 알고보니 현지발음과는 많이 다른 발음이었다. 현지발음은 슬라보이 지제크에 가깝다. 창비와 비슷한 표기법에 대한 원칙을 공유하고 있는 한겨레는 이를 놓치지 않고 슬라보이 지제크라는 표기로 바꾼지 꽤 됐다. 여전히 창비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창비는 현지발음과 동떨어진 표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이 경우는 다른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점은 창비가 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점이다. 나는 이유야 어찌됐든 그 표기가 이미 대세가 돼버렸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유태계)독일 출신 Karl Marx와 (유태계)폴란드출신 Karl Planyi의 표기 문제다. 아마 Marx가 우리에게 마르크스라고 표기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일본의 문자체계에서는 그렇게 표기할 수밖에 없으며, 그걸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걸 북한이나 1980년대 이후 남한에서 맑스라고 표기했던 건 현지발음에 대한 고려 외에도 일제잔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이 반영돼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냐 맑스냐에 대해서 똑부러지는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실제 표기할 때 나는 마르크스라고 쓴다. 그렇게 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고유명사를 대세와 다르게 표기해서 득될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표기해왔다면, 옳든 그르든 그게 한국어체계의 안정정 체계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니 굳이 그걸 흔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는데, 위의 두 사람의 저작을 모두 출판한 길출판사의 표기법이다. 길출판사는 위 두 사람을 카를 마르크스, 칼 폴라니라고 표기한다. 창비야 나름 일관성이라도 있지만, 일관성도 없는 이건 뭔가 싶다.

 

두 번째는 나름의 원칙을 공유하는 테이블을 마련하여 결론이 정해지면 창비나 한겨레와 같이 임의의 독자적인 원칙을 가지고 ‘색다르게’ 표기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일단 정해지면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따라야 한다. 아직 그런 테이블이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게 조직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각 출판사들이 가능하면 색다른 원칙으로 색다르게 표기하는 것을 일단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Susan Sontag을 검색하기 위해 수잔 손택, 수잔 손탁, 수전 손택, 수전 손탁 등등을 일일이 검색해봐야 하는 불필요한 수고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여기에 한 가지,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도 일정하지 않은 원칙 때문에 종종 고생한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덧붙여두고자 한다.(이건 외국인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다) 가령 요즘은 여권발급을 대행하는 구청 등에서 아버지 성과 자식 성의 영문표기의 일치여부를 따졌지만, 그러기 이전에는 아버지와 자식 성의 영문표기가 다른 경우도 꽤 있었다는 점,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외국어 표기에 대해 무원칙한지를 알려주는 지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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