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씨름하다 -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토마스 G. 롱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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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목회적 돌봄

 

안드레축제 때 데리고 올 친구가 저한테 그랬어요. 지금은 교회를 안다녀요. 그 이유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고 계속 안 좋은 일만 일어난데요. 하나님이 진짜 계신지도 모르겠고 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데요.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안다니는데 제가 그 친구를 교회로 데리고 올 수 있게 기도해 주세요.” 내가 지도하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제자가 건넨 기도제목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대했고, 반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께 실망한 10대 소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플까?

그러고 보니 내 10대 시절도 그랬다. 모두가 즐거워야 할 설 명절. 오히려 하나님은 내 아빠를 교통사고로 불러가셨다. 그때 내 나이 13,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린 나이 상주 노릇을 하며 조문객을 맞는데 눈물샘이 터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울었다. 영안실 옆 성당으로 향했다. 내 속마음을 드러내보이기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폭우가 내렸다. 2월의 어느 날 온 몸으로 맞는 비는 정말 추웠다. 성당 안으로는 감히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밖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 그러시냐고? ? ?”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눈물이 상처가 되어 흔적은 남았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저자가 고난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이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이것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의 일부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203).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던 항의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그렇게 믿었던 건 이유가 타파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숱한 삶의 타격 앞에 힘들어하는 자에게 나도 이렇게 극복했다는 말이 얼마나 무정하고 잔인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 고통으로 씨름하는 자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까?

토마스 G. 롱은 <증언하는 설교>로 유명한 설교학자다. 설교학자가 고통을 어떻게 다룬다는 걸까? 의아하다. 허나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그가 말한 대로 이 책은 설교자가 고통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지를 다룬다(16). 곳곳에 성도와 함께 호흡하는 목회자의 따뜻한 돌봄이 주의를 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설교적 충언이다. 궁극적으로 성도와 같이 서 있어야 하는 설교자들과 함게,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의 삶의 진실들과 어떻게 한데 어울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노력이다.”(18).

롱은 고통의 문제를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풀었다. 풀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하나님 당신이 원인이십니까?” 답부터 말하면, 아니다. 원수가 원인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악을 의도하지 않으셨고 이 악의 원인도 아니시며 이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심지어 그의 왼손으로부터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204) 그러면 이 원수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롱은 우리에게 비쳐진 빛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래서 악의 근원은 아쉽게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둘째 질문은 우리는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면, 없다. 인간에게는 가라지를 뽑아낼 말한 능력이 없다.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214). 그래서 주인은 가만히 두라고”(13:29)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또 다시 첫 항의로 돌아간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고통과 악의 가라지를 뽑아 버리시면 되지 않는가?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원하는 방법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219-220)이라고 답한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할 때 이 책의 백미다.

그는 인간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한다(220). 사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투사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격분한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221). 어떤 세상이 될까? 저자의 말이다. “모든 질병, 탐욕, 폭력, 증오, 나태함을 잘라내시며 큰 칼을 든 무자비한 농부로서 모든 가라지를 쳐내러 오신다고 가정해 보라. 그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악과 얽혀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악을 뿌리 뽑기 위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오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한다.”(221)

마지막 질문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것인가?” 종말의 때까지 지속된다. 가라지는 영원하지 않다. 종말의 때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신다. 그렇다고 그때만 바라볼 순 없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악을 다루고 계신다. 어떻게? 겨자씨와 누룩처럼 비밀스럽게, 몰래, 서서히 변화되다가 마침내 큰 나무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굴복을 통한 역설적 승리인 것이다.

원제목 “What Shall We Say”를 고통과 씨름하다로 번역했다. 탁월하다. 고통의 문제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책을 덮으면서 여전히 고통스럽다. 저자는 줄곧 쓰나미, 대량학살 등과 같은 큰 주제를 던졌다. 그런데 결말에서 탐욕, 폭력, 증오, 나태함과 같은 개인적 수준으로 축소하여 결론짓는 것이 못내 아쉽다. 뭔가 시원함을 기대했는데 조금은 아쉽다. 그만큼 고통의 문제는 씨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도 숱한 고통으로 씨름하는 자들이여 이 책으로 씨름해 보자. 그래서 고난 당하는 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을 넘어 무슨 말이라고 건네 보자(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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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혁신 보고서 - Sunday School
김만형 / 규장(규장문화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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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드디어 전도사로써 첫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담임목사님의 강권(?)으로 인하여 사역에 문에 들어선 것이었다. 당시 군을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회적응 하기에도 바빴고, 그렇다고 군에서 군종병을 한 것도 아니고, 주교교사의 경험이라고는 1년 간 서기부에서 봉사한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그야말로 사역은 그 자체로 고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사역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SS 혁신 보고서>를 읽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에 나의 마음에는 더 큰 좌절감이 찾아왔다. 김만형 목사가 얘기하는 것은 당시 본인의 교회 실정에는 도대체가 적합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적인 방법론은 너무 빈약하고, 온통 이론적인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이론적 배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죽을 쑤고(?)있던 나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방법적이 측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에 교회에 비해 규모나 교육적인 환경이 모두 뛰어난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면서, 이 책은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아마도 그간 사역을 해오면서 나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페이퍼에서는 <SS 혁신 보고서>에 대한 귀한 통찰력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교육 대상의 특성에 맞게 효과적인 가르치라(P23) 저자는 어린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시기에 따라 어떤 특성이 있는지에 맞추어서 교육할 것을 말한다. 저장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동시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저자의 주장같이 교육대상에 대한 특성을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교육해 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역을 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특성과 발달과업등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은 초등3부(5,6학년)와는 전혀 맞지 않는 요구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연히 그 요구에 대한 반응는 냉담했다. 지금이라도 본인이 맞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특성을 공부하고 그에 따른 접근방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며, 다음달 교사회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교사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다. 아마도 나의 동역자 교사들도 학생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떠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집중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먼저 기획하라(P33)
저자는 교육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교육관, 교육관의 환경.. 등 누구보다 환경에 지배를 많이 받고 있는 아이들의 눈에 맞추어서 모든 것을 정비할 것을 말한다. 그렇다. 어느 교회나 주일학교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교육환경에 대한 관심은 없다. 사실 본인의 부서만 생각해도 유치부실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평균 60-70명의 아이들과 교사 13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면 그야말로 시장바닥이 된다. 좁은 공간에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다보니, 벌써부터 여름을 체험한다.

환경이 이렇다보니 아이들의 입에서는 “전도사님!! 더워서 짜증나요--”라는 탄식소리가 들려온다. 이러한 처지인데도 어떠한 대안이 없는 교회의 실정이 정말 안타깝다. 하루속히 교육관이 지어져서 좋은 환경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세째로.잠재력을 키워 주라(P93) 저자는 학습자를 보는 관점을 설명하면서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을 보고, 그의 달란트를 개발해 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역의 열매가 수적인 측면만으로 평가를 받는 실정이다 보니까 사역자들의 관심도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늘 예배에 몇 명 나왔는가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수적성장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지금 맡고 있는 아이들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설교가운데도 학생들에게 이것을 언급하고, 학생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아이들을 칭찬하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인정해 주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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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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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언약'(본 서에는 '계약'으로 번역되었다)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 때부터 계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담으로부터 모든 계약의 완성인 그리스도까지 계약의 관계를 맺으셨다. 이러한 계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조망한 것은 로벗슨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원서제목: 언약의 그리스도)이다.

저자는 계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約定)으로 정의한다. 특별히 계약은 유언이 아니므로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넘어서는 계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의 범위는 세상의 시작부터 세상의 끝까지 이른다. 또한 하나님의 계약은 구조적, 주제적 통일성을 이루는데, 특별히 계약의 핵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신약의 임마누엘 사상)이다. 이러한 계약적 의미는 창조의 계약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곧 선악과의 계약에서 피로 맺는 약정의 개념이 나타난다.

로벗슨은 창조 때 이루어진 피의 약정에 대한 처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창조 시에 인간과 맺은 계약은 인간의 파괴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아담의 시작 계약에서 시작되는 구속의 단계에서는 인간 구속의 역사는 인간과 그가 창조된 배경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그러나 실질적으로 로벗슨이 전체의 구속에 대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노아의 계약에서도 저자는 구원이 사회적, 문화적 존재로서의 전 삶의 양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특별히 노아와 그의 가족 구원을 통하여 보존의 측면을 강하게 표명하신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임마누엘의 원칙을 자리잡게 하는 기초가 된다.

이어서 계약의 꽃으로 불릴 수 있는 아브라함과의 계약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자신이 직접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계약 파기 시에 담당하게 될 죽음을 자신이 직접 치르실 것을 천명하신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할례를 실시함으로 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새 계약의 세례에서 성취된다. 시내산에서 수여된 율법(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속계약의 내용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정신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어서 다윗의 계약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왕의 출현이다. 왕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백성들과의 계약의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 모든 계약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계약의 마침이며, 완성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계약의 의미를 살펴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본 서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계약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각 계약의 단계를 시작, 보존, 약속, 율법, 왕국, 완성의 단계로 설명하는 것은 계약의 진전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유익하다. 더욱이 각 계약의 초점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구속사역의 큰 줄기를 잡는데 유익하다. 또한 본 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은혜가 되었던 것은 새 계약 안에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소개하면서, 그것은 안식일을 기대하면서 엿새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우주적 사건으로서 이미 달성된 안식 속에서 기뻐하며 일 주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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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
해돈 로빈슨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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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곳에서 강단의 권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과 미래의 변화 속에서 설교는 과연 목회의 중심(中心)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도대체 설교가 최종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회의적인 상황 속에서도 설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전제를 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바른 성경적 말씀의 선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른 성경적 말씀의 선포는 어떤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해돈 W. 로빈슨의 <강해설교>는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19년 동안 설교학을 직접 가르치면서 체득한 것을 거침없이 쏟아놓고 있다. 본 서는 강해 설교의 첫 단계인 본문 성경구절의 선택에서부터 실질적으로 강단 위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전달방법에 이르기까지 설교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고 있다. 필자는 본 서를 읽으면서 도전 받은 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필자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한 아이디어(idea)의 중요성'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한 아이디어(idea)'는 설교에 있어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중심의미이다. 소위 말해서 'One point meaning'이다. 이것은 인간의 척추와도 같다. 이것은 인간의 신경줄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저자의 주장에 비추어 본다면 필자는 지금까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중심사상에 초첨을 맞추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무차별적으로 말한 것과 같았다. 과히 '한 아이디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소'와 '보충요소'는 필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 서에 수록되어있는 연습문제를 충실히 풀어보았지만,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따라서 저자가 강력하게 이야기했던 사고(thinking)의 훈련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본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철저하게 묵상하는 가운데 본문의 핵심 아이디어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것이며, 첫 단계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다음으로, 설교의 준비의 단계에 대한 서술이다. 책의 핵심부분을 차지하는 3장에서 8장은 성경본문의 선택하고, 선택한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 한 아이디어의 발견, 설명·증명·적용의 단계, 설교 목적의 설정, 본문에 따른 설교 형태의 결정, 인상적 시작과 완전한 마침을 위한 서론과 결론의 준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설교학을 왜 배워야하는지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고, 이러한 설교의 준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설교를 했다. 이를 보고, 함께 동역하던 부목사님은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러한 식으로 설교를 준비하시는 분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유명한 설교가들의 글에서는 자신의 설교 준비에 대해 이와 유사한 의견을 기록한 것을 보았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고투하고, 철저하게 준비함으로 위대한 설교가가 탄생함을 새삼 알 수 있다. 앞으로의 필자의 설교 준비에 있어서도 이러한 절차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전달에 대한 이해이다. 설교는 한편의 잘 작성된 설교문으로 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전달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아직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필자에게 이 같은 것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자의 용모, 몸짓, 음성... 청중의 배려차원에서 중요하다. 특별히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글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으로 본 서에서 필자가 도전 받은 것을 정리해 보았다. 본 서는 애송이(?) 설교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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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문화 거듭나야 한다!
양낙흥 / IVP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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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8년 전과 현재의 국민적 의식수준을 두부 자르듯 동일하게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 갱신이 이루어 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근본적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이것은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의식 수준은 왜 이렇게 미미한 것인가? 저자에 언급대로 그것은 일차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경험의 부재이다. 서구에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루어 낸 민주주의를 한국은 전쟁이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어쩌다가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민주주의의 역사가 수 백년이 된 서구사회와 그 의식을 판가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책임이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저자가 책을 읽어보면, 다분히 장로가 대통령이 된 것으로 인해 상당한 기대와 바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러한 기대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와 문화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역시 그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 바른 인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저자도 언급한 대로, 한국 교회는 신실한 믿음과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야 한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인,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이루기를 원하는 신앙인,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 바른 소양을 가진 신앙인, 개인의 신변을 우선하지 않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신앙인... 이러한 신앙인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에 대한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 한국 사회는 보다 성숙한 사회로 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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