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신경 -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스캇 맥나이트 지음, 김창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는 내 질문에 최근 아들 녀석이 혼란스러워 한다. 6살 때부터 주입하여 취침 전 줄곧 말해오고 있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2, 초등학교 5학년인데 벌써 세상을 알아버린 것일까? 6년을 말했기에 차마 목사를 내려놓지는 못한다. 허나 좋아 보이는 다른 것들이 아들 눈에 들어오고 있다. 결국 저울질을 하며 갈팡질팡하더니 목사를 안 하면 안 되겠냐며 묻는다.

   살짝 아쉽기도 했으나 괜찮다고, 아빤 네가 어릴 적부터 꿈을 가지며 살기를 원한다고, 그러니 네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목사가 아니냐고? 물론 아들의 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혹여나 아빠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어쩌나 살짝 두렵다.

   아빠 때문에.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긍정적 해석은 아빠같이 목회를 잘 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러면 정말 좋겠다. 아니면 아빠처럼 목회를 하느니 차라리 다른 것을 하는 게 좋겠어요. 이게 염려된다. 강단 위와 아래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르냐고. 교회와 집의 삶이 왜 틀리냐고. 시쳇말로 다중인격 아빠 때문에 목사가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나. 지금 내 꼴을 보니 가히 틀린 해석이 아닌 듯하다.

   결국 삶이 문제다. 말은 아주 그럴싸한데 삶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 아닌가? 아들의 꿈이 문제가 아니다. 강대상의 말과는 한참 함량미달인 내 모습으로 인해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에 맥 나이트의 예수신경은 무척 고마운 책이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떠올린다. 세례 문답을 앞두고 혹여나 틀릴까 싶어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조바심으로 외우던 기억이 난다. 어떤 이들은 의미 없는 암송의 폐해를 얘기하며 암송무용론을 펴기도 하지만 외우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문제는 기계적 반복이지 암송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예배의 순서 하나로 사도신경을 후딱 외워치우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 자체를 암송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신경을 입으로 읊조리지 말고 삶으로 읊조리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신경은 무엇인가? 책의 제목처럼 예수 신경이다. 예수 신경이란 예수께서 삶으로 살아내신 말씀이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가 삶으로 말한 고백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6:4-5) 이웃을 사랑(19:18)하는 삶으로 읊조리는 신경이다.

   저자가 말마따나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164). 아기가 어디서 태어날지를 묻는 헤롯의 질문에 미가서를 지목하며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던 제사장과 서기관처럼 우리는 성경을 아는 머리와 두뇌만 있다. 허나 우리에게는 그 아기를 찾아가는 겸손한 손과 발, 즉 아는 것을 삶에서 구현하는 것은 부족하다.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예수 신경을 삶으로 말하게 했던(36) 예수님의 삶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삶은 예수 신경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삶이였음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픈 시대다. 그동안 화려한 말, 이목을 끄는 어휘, 호소력 짙은 설교자가 되는 것에 관심을 뒀다. 이제는 삶이다. 삶으로 읊조리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당신은 어떤가? 입이 아닌 삶으로 읊조리고 싶은 모든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회퍼 묵상집
찰스 링마 지음, 권지영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송구영신예배 때 새해의 다짐을 적는 시간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성경을 1독하겠다. 큐티를 열심히 하겠다. 가정예배를 드리겠다. 등 소위 영적인 목표를 야심차게 걸었다. 그래서일까? 신년 성경통독 시간에 제법 많은 교인들이 참석했다. 큐티책도 평소보다 더 많이 팔려 사무실에서는 추가 주문을 했단다. 우리 집도 가정예배란 걸 드렸다. 이렇듯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 작년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런 몸부림에 신규과목이 개설되었으니 <본회퍼 묵상집>이다. 지금 과목도 따라가기 벅찬데 추가하려니 벅찰 수도 있겠다. 허나 신년의 기세로 한번 도전해 보시라. 자고로 책에 대한 평을 적으려면 마지막장까지 읽어야하나 그러지 못했다. 다만 오늘까지 정해진 분량을 소화했으니 지금까지의 느낌으로 대신해 보려한다.

    우선, 다양한 본회퍼의 다양한 책을 맛볼 수 있다. 마치 본회퍼 뷔페와 같다. 보름밖에 되지 않지만 <나를 따르라>, <옥중서간>, <신도의 공동생활>, <그리스도론>, <자유를 향한 길> 이렇게 5권의 책을 읽었다. 물론 단편적이고 편집자의 취향을 따라 고른 구절이기에 전체 내용을 알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책의 핵심 구절을 콕 집어 다룬 것이니 요즘과 같은 시대에 더 없이 반갑다.

    둘째로 성경적 논증을 추구하고 있다. 본 회퍼 개인의 생각과 사색만 담았다면 아쉬울 뻔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이 모두 성경적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본 서는 그의 글을 다루기 전에 성경구절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글 하나하나가 어떻게 말씀을 살아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샘플이 된다. 물론 성경구절은 본 회퍼가 아닌 전적으로 저자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글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이니 순서의 불편함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자료와 적절성을 찾기에 분주한 나같은 설교자에게 이것은 참 고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해설이 이해를 풍성케 한다. 거칠기는 하지만 굳이 본 서의 구성을 귀납법적 성경공부의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경구절은 관찰이다. 본 회퍼의 글은 해석이다. 끝으로 저자의 해설과 기도, 사색은 적용이다. 따라서 저자의 해설은 2015년을 본 회퍼처럼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야 할 독자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하루 하루 본 회퍼의 뒤를 따르다 보면 묵상을 넘어 실천의 삶을 살 수 있을게다.

    올해는 본 회퍼와 함께 1년을 보내려고 한다. 말과 행동이 모두 빛나면 좋겠다. 글과 삶이 일치하기를 원한다. 그것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본 회퍼가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글을 유심히 읽으면서 본 받고 싶다. 무엇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의 한 절이라도 배우고 싶다. ~ 그럼 함께 시작해 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읽는 설교 시리즈
화종부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점에 갈 때마다 이렇게 책이 많은데 또 다른 주제의 책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곧장 책을 내고픈 내 작은 소망에 강력한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이미 그런 책은 있는데 너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출판 업계도 힘들다고 난리인데 너까지 왜 그래?, 새로운 관점도 없잖아?,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써 놓았어? 뭐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떠오르면 이내 기가 팍 죽어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또 다른 설교집이 과연 필요할까? 도대체 다른 설교집과 차별성이 뭐냐? 더욱이 얇기라도 하면 몰라도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이렇게 두껍게 썼으니 종이 낭비 아냐? 그래서일까? 저자의 생각인지, 출판사의 의도인지 몰라도 읽는 설교라 명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제목이다.

   물론 설교는 현장성이 중요하다. 똑같은 설교문이라도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시쳇말로 은혜가 다르다. 또한 설교는 특정한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이다. 하여 공동체가 가지는 정서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을 생각 할 때 여러 가지 제약을 다 아우를 수 있게 읽는 설교라고 명한 것은 신의 한수다. 왜 또 다른 설교집이라 묻는다면 읽는 설교니까. 이렇게 말해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여러분”(지면에서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이해하시라!)라는 특유의 음성 외에는 저자 화종부 목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모교에 개강집회 강사로 왔다기에 그때 설교를 잠시 슬쩍 들어보긴 했다. 가끔 극동방송 전파를 타고 운전할 때 잠시 들은 것이 전부다. 허나 이번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읽는 설교 시리즈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다. 설교의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러니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국교회의 강단이 다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 너무 은혜로운데 공공기관의 강연회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교는 오랫동안 잊어진 설교의 참 맛을 본 듯하여 너무 기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1세기 갈라디아교회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저자가 가진 탁월한 은사요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로이드존스의 영향이리라.

   둘째, 그의 설교는 현대적이다. 어릴 적 설교자를 꿈꾸면서 설교자에 대한 불만(?)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들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었다.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매우 지루했다. 옆을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의 설교는 현장성도 잘 살렸다. 대부분의 적용을 부부사이의 관계적 측면으로 전개한 것은 살짝 아쉽지만, 1세기 갈라디아교회 성도와 현대 교회 성도들을 잘 연결했다. 그래서 그때의 메시지가 오늘의 도전임을 잘 드러냈다.

   설교는 영광스러우면서도 고된 작업이다. 나와 같은 풋설교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자와 같은 좋은 설교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어떤 이는 설교집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꼼꼼히 잘 챙겨본다. 표절이 아니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고 싶은 설교자가 하나 더 생겼다. 본문과 현장의 균형 잡힌 설교를 화종부 목사를 통해서 배웠다. 계속해서 읽는 설교가 출간되기를 고대하며 적극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역전의 가나안 성도를 기대하며

 

신학교 시절 경건회에서 설교를 하던 선배 목회자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후배들이 목회를 하는 상황은 더 어려울 거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니 더 잘 준비해라. ~ 실감이 없었다. 어려워 진 들 얼마나 어렵겠어! 제대로 된 신학교육도 받지 못한 선배들도 저렇게 잘 해 오셨는데,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우리가 아니 나라면 충분하다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신대원을 졸업 10년차가 된 지금, 젊은 호기에 한없이 부끄럽다.

    그렇다. 목회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부흥하는 교회에 있으니 그런 소리 말라는 항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허나 부흥의 속내를 보면 대부분 교회이동이다. 주변의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교회의 구역원 전체가 통째로 등록했다. 등록의 기쁨도 잠시 아니 이제 그 교회는 어쩌나 염려가 몰려왔다. 교회를 이동하여 출석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이동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이동 후에 더 온전케 되는 성도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가나안 성도란다. 이게 또 무슨 말인가? 도서관 담당 목사는 제목이 은혜로워 구입을 했단다. 나에게 내용을 들은 그는 급하게 금서인 양 회수처리를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가나안 성도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자~ 뭐 이런 은혜로운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니 책 제목은 잘 지었다.

    목회고충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아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까지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다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본 서를 통해 내가 받은 첫 번째 감정은 당혹감이다. 큰 일이다. 이제 어쩌나. 아직 은퇴하려면 한 참을 남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도 가나안 성도를 되돌리는 법 1, 2, 3과 같은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문제만 잔뜩 널어놓고 손에 잡히는 대안이 없어 살짝 아쉽다. 허나 대안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일 때가 많으니 힌트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두 번째 감정은 안도감이다. 늦지 않게 가나안 성도가 무엇인지 알아서 다행이다. 저자가 목회자들에게 계속 현상에 대한 안목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는데, 안목을 가지기 전에 현상에 대한 이해라고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 목회자에게 가나안의 탓을 다 지우는 것 같아 읽는 내내 힘들었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기에 지금 나의 사역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마지막 감정은 불편함이다. 저자가 가나안 성도를 대변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허나 가나안 성도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의 접근은 못내 아쉽다. 너무 두둔만 했다. 나는 가나안 성도에게 말하고 싶다.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추구한다면 에라스뮈스, 존 밀턴, 김교신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라. 그냥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넌센스다.

     또 저자에게 따져 묻고 싶다. 가나안 신학을 얘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떠남을 말했다. 그것과 가나안 성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브라함이 떠난 것은 사명으로의 떠남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개입이 있었다. 가나안 성도의 떠남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3)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 문 밖에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는 말이지 교회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점점 목회가 힘들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이 시대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버겁다. 위축된다. 그래도 목회는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제대로 잘 가고 싶다. 이 일에 이 책이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가나안 성도의 의미가 역전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가나안 성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9년 동안 신학공부를 했다. 학부 4, 대학원 3, 석사 2. 외국에서 박사과정까지 제대로 공부한 분과 비할 수는 없지만 나름 신학에 잔뼈가 굴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생경하다. 가르침 탓도 있겠다. 교수님도 제대로 모르는 분을 어찌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으랴~ 신학적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난 소위 성경만 죽어라 본다고 생각하는 왕보수주의 출신이다. 여전히 자랑스럽지만 협소한 신학적 스펙트럼은 아쉽다. 최소한 다른 소리도 있음을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걸~

    허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의 신학적 관심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난 실천신학자다. 학문의 상아탑에 갇혀 지적 유희만을 즐기는 것이 싫었다. 말은 무성한데 움직이지 않으려는 손과 발이 싫었다. 신학이 구현되는 교회가 내 관심이었다. 그러니 장황하고 길게 늘여져 언제 마침표가 나올지 모르는 칼 바르트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 내가 변하고 있다. 난 요즘 신학이 고프다. 16년간 교회 사역을 했으니 일은 겁나지 않다. 시쳇말로 노하우가 있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아쉬움의 진원지는 신학적 빈곤함이다. 아니 9년이나 신학을 했는데 그렇다고? 그렇다. 그래서 난 다시 신학생 자리로 돌아갔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 어느 잡지의 제목처럼 목회와 신학의 균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런 차에 만난 책이 칼 바르트의 <개신교 신학 입문>이다.

    입문이라 했기에 쉽게 생각했다. 큰 코 다쳤다. 은사인 유해무 교수가 번역도 물 흐르듯 매끄럽다하여 기대했으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번역가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 탓이다. 그러나 겁내지는 마시라. 그래도 읽을 만하다. 그러니 호기로 <교회 교회학>이나 <로마서 강해>으로 바로 뛰어들지 말고 이 책부터 읽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두 가지 큰 도전을 받았다. 우선, 칼 바르트가 가진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이것은 나와 같은 보수주의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다. 1부 신학의 자리(난 재료로 이해했다)에서 가장 먼저 둔 것이 말씀이다. 사실 이 책의 면면에 흐르는 것이 성경에 대한 신실성이다. 바르트는 말씀에 대한 우선적 관심과 그 의미에 대한 숙고의 필요성을 소리친다.

    나의 신학적 빈곤의 이유를 바르트를 통해 발견했다. 실천, 현장, 목회를 말하다보니 말씀을 놓쳤다. 말씀을 놓치니 사역이 얕았다. 온갖 방법을 찾아 기웃거렸다. 결국 한계점에 이르렀다. 시쳇말로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과 관계없는 교회, 말씀과 상관없는 사역이 된 것 같다. 따라서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수해야 하는 진지라는 바르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22).

    또 하나의 도전은 현장에 대한 관심이다. 신앙생활은 외줄타기와 유사하다. 자칫하면 율법적 혹은 무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와 신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씀, 말씀하면 이상하게 현실의 리얼리티가 준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르트는 계속해서 신학이 목회를 힘껏 돕는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가 말하는 성경의 강조는 옛 언어에 감금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는 새 언어를 뜻한다(189).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 연구의 언어가 가나안의 언어인 동시에 또한 애굽의, 바벨론의, 각각 현대적인일상 언어여야 한다.”(196)한다고 말한다.

    이같은 신학의 현재성은 앞서 말한 대로 나의 관심이었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결국 바르트의 그 유명한 말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허나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이것이 목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게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연구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전달은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영원한 과업을 안고 책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