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역전의 가나안 성도를 기대하며

 

신학교 시절 경건회에서 설교를 하던 선배 목회자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후배들이 목회를 하는 상황은 더 어려울 거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니 더 잘 준비해라. ~ 실감이 없었다. 어려워 진 들 얼마나 어렵겠어! 제대로 된 신학교육도 받지 못한 선배들도 저렇게 잘 해 오셨는데,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우리가 아니 나라면 충분하다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신대원을 졸업 10년차가 된 지금, 젊은 호기에 한없이 부끄럽다.

    그렇다. 목회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부흥하는 교회에 있으니 그런 소리 말라는 항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허나 부흥의 속내를 보면 대부분 교회이동이다. 주변의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교회의 구역원 전체가 통째로 등록했다. 등록의 기쁨도 잠시 아니 이제 그 교회는 어쩌나 염려가 몰려왔다. 교회를 이동하여 출석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이동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이동 후에 더 온전케 되는 성도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가나안 성도란다. 이게 또 무슨 말인가? 도서관 담당 목사는 제목이 은혜로워 구입을 했단다. 나에게 내용을 들은 그는 급하게 금서인 양 회수처리를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가나안 성도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자~ 뭐 이런 은혜로운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니 책 제목은 잘 지었다.

    목회고충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아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까지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다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본 서를 통해 내가 받은 첫 번째 감정은 당혹감이다. 큰 일이다. 이제 어쩌나. 아직 은퇴하려면 한 참을 남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도 가나안 성도를 되돌리는 법 1, 2, 3과 같은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문제만 잔뜩 널어놓고 손에 잡히는 대안이 없어 살짝 아쉽다. 허나 대안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일 때가 많으니 힌트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두 번째 감정은 안도감이다. 늦지 않게 가나안 성도가 무엇인지 알아서 다행이다. 저자가 목회자들에게 계속 현상에 대한 안목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는데, 안목을 가지기 전에 현상에 대한 이해라고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 목회자에게 가나안의 탓을 다 지우는 것 같아 읽는 내내 힘들었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기에 지금 나의 사역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마지막 감정은 불편함이다. 저자가 가나안 성도를 대변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허나 가나안 성도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의 접근은 못내 아쉽다. 너무 두둔만 했다. 나는 가나안 성도에게 말하고 싶다.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추구한다면 에라스뮈스, 존 밀턴, 김교신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라. 그냥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넌센스다.

     또 저자에게 따져 묻고 싶다. 가나안 신학을 얘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떠남을 말했다. 그것과 가나안 성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브라함이 떠난 것은 사명으로의 떠남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개입이 있었다. 가나안 성도의 떠남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3)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 문 밖에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는 말이지 교회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점점 목회가 힘들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이 시대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버겁다. 위축된다. 그래도 목회는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제대로 잘 가고 싶다. 이 일에 이 책이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가나안 성도의 의미가 역전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가나안 성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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