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리차드 미들톤 지음, 이용중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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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천국,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책이다. 천국이 얼마나 중요한 내 삶의 테제인데, 그것을 의견도 분분한 중간기나 중간상태로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343) 미들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전에 선방을 때리고 시작한다. 그의 말이다.

실제로 정경 전체(구약과 신약)에서 신자의 영원한 운명으로서의 하늘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다. 이 개념은 통속적인 기독교적 상상력(과 심지어 일부 신학) 안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성경 자체는 한 번도 실제로 의인이 하늘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107)

이 또 무슨 말인가? 천국은 사람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라고? 그러면 있지도 않는 것을 공연히 위로한답시고 천국, 내세를 그토록 은혜롭게 외쳤던 말인가? 그곳에서 쇼부(?)를 보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혹스럽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켠에 일었던 생각이다.

저자의 주장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에덴의 회복이다. 미들턴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땅의 회복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천국의 명확한 개념(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을 부정하는 것은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들턴이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를 알기에 그의 주장이 퍽 고맙다. 천국을 도피적 개념으로만 생각하기에 이곳에서의 삶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덮어 놓고 저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적 행태의 부조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안에도 이 도피의 무서운 유혹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에 직면하여 끈질기게 싸우기 보다는 버티고 대충 때우며 시간을 보내서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 생각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변화된 이 땅이라고 역설한다. 최종 종착지가 하늘에 있는 천국이라고 너무 확실히 믿고 있는 우리의 그 견고한 벽을 저자는 성경을 들어서 조목조목 부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결국 저자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의 말이다.

구원이 죽어서 맛보는 하늘의 떡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믿음과 일치되기 시작하는) 구체적인 변화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현세적인 상황에서 의로운 삶을 향해 실제적으로 변화되는 시나리오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311-313)

따라서 저자의 말마따나 종말론은 윤리와 분리되지 않는다”(411) 미들턴의 주특기인 세계관적인 발언이다.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든, 소명이라고 부르든 어떤 말이든 다 좋다. 이 땅에서 하늘로 살고, 이 땅을 하늘로 만들어 마침내 이곳에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구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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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의 성서적 기원과 실천적 대안
차정식 지음 / 짓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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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동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셀이나 가정교회와 같은 세련된 이름이 아니라 지금은 잘 부르지도 않는 구역이 바로 그것이다. 명세기 목사가 심방을 가도 공부기계인 자녀들은 집에 없고, 있다 한들 인사를 하곤 곧장 지들 방으로 들어가 같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자녀들이 모두 구역예배에 참여했다. 물론 지금 추억해 보면 예배는 역시나 지루했다. 인도자는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내용의 일방적 전달했고, 다른 성도들도 눈치를 보니 입도 뻥긋하지 않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렇게 모임이 마치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간식시간이었다.

그렇다. 내 공동체의 좋은 기억 8할은 먹는 시간이다. 기껏해야 삶은 달걀, 고구마, 감자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여전히 내게 군침 도는 순간이었다. 공동체의 저력을 확인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지금처럼 상조회가 활성화 되지 않는 그 때, 장례의 모든 순서를 교회 공동체가 맡았다. 하관을 하는 날, 성도들은 소고기국을 끊여서 짐차에 다 실고 먼 길을 같이 와서 조문객들의 식사를 일일이 책임졌다. 지금도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난 그 시절 교회 공동체의 수고와 헌신을 떠 올리며 감격한다. 이렇듯 난 교회공동체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 나게 흐뭇하다.

그런데 차정식 교수는 교회를 무조건 공동체로 전제하는 것에 딴지를 건다(376). 아니 교회가 공동체가 아니면 뭐가 공동체란 말인가? 사실 저자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었다. 허나 달라진 사회와 그 속에서 더 달라진 사람들을 보면서 또 그 사람들이 몸 담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성과 너무 멀리 떨어진 현실을 보며 더 이상 교회를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조국 교회가 초대교회가 가졌던 공동체 이상을 담고 있지 못하기에 더 이상 공동체로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27).

그러고 보니 교회 내 소그룹들이 많이 변했다. 남녀노소유무식을 초월하여 누구든 섞여야 할 텐데 현실은 생활수준, 사회적 지위, 학력이 비슷한 자들끼리 묶어 달란다. 여전히 그곳에서는 성도와 성도간의 만남이 아니라 00교수, 00장관, 00박사란 호칭이 통용되고 있다. 결단을 하고 전체 소그룹 재편 작업을 했으나 외압에 그만 포기한 다락방이 생겼다.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그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소그룹이 또 다른 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명분을 그럴싸하지만 결국 조직의 운영을 효과적으로 하는 목적으로 소그룹이 전락해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저자의 진단이 맞다.

하여 저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성을 추적한다. 공동체적 관점으로 본 성경해석이라고 할까? 학자의 세밀함과 주도면밀함을 가지고 올곧게 밀어 부친다. 가히 공동체 부분에 기념비적 책이라고 하겠다. 그렇기에 공동체에 대한 실용적 담론에 머물러 있는 조국 교회가 이 책을 통하여 든든한 이론적 배경도 동시에 견지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전히 성경적 공동체가 이 땅에 소망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임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의 수려한 글 솜씨가 오히려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전적 부족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인 문장으로 인해 분명한 이해가 어려웠다. 또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고 했으나 진부한 대안만 제시한 듯 하여 아쉽다. 공동체의 긴 추적에 비하여 결론적 대안은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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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의 신학 -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김균진 저작 전집 8
김균진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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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업이다 보니 장례 예배를 인도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할 때가 많다. 고정적 레퍼토리는 천국 소망, 내세 소망, 영생 소망이다. 사랑하는 이를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 슬퍼하는 유가족들이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이겨내라는 말이다. 나도 천국을 믿는다. 굳이 성경을 들먹이지 않아도 천국은 내게 꼭 있어야 한다. 항상 그리운 아빠에게 따져 물을 것이 많다. 아니 하나님께 호래자식이란 소리를 들어도 왜 그러셨는지 묻고 싶다. 그러니 천국은 꼭 있어야 한다.

성도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믿어온 터라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인지? 어떻게 부활하는지? 부활이후의 어떤 삶을 펼쳐지는지? 알차게 묻지 않았다. 그러니 천국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잠시 동안 사후세계를 경험한 자들의 증언이 심심찮게 들리는 세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예리한 질문에 연구해서 알려드리겠다는 궁색한 대답만 했다. 도대체 사후세계는 어떻게 펼쳐지는지 나도 그게 너무 궁금하다.

내세에 대한 지침의 으뜸은 단연코 핸드릭슨의 <내세론>이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의 대부분은 그 책의 목차에 다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질문을 받을 때면 틈틈이 꺼내 보내는 책이다. 허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입장만 고수하여 다양한 의견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도 보수진영에만 속해 있는 필자의 목마름이라고 할까? 다른 의견도 듣고 싶은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서로 비교하면서 장, 단점을 파악하고 결론을 내리면 좋으련만.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책을 만났으니 김균진 교수의 <죽음과 부활의 신학>이다. 철저하게 현대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요소들을 잡 끄집어내어 성경적인 가르침을 준다. 특별히 죽음 후의 상태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성경적인 결론을 내는 5장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죽음과 부활의 의문을 해결하는 데 급급하지 않는다. 차분히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여 점점 현세 지향적으로 바뀌어 영원을 잃어버린 세대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하여 이 책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 것인지,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더 다급히 묻는다. 그러고 보니 사후세계에 대한 멋진 대답거리를 찾다가 내 삶을 잃어버린 듯 하여 화들짝 놀랐다. 저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듯 잘 죽을 수 있는 길은 잘 사는 데 있다(538).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내세론>과 함께 틈틈이 들 쳐 볼 책이 늘었다. 자주 넘겨보며 천국에서 만날 주님과 아빠를 고대하며 지금 잘 살아야겠다. 잘 살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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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는 네 거야 - 하나님의 양치기개로 평생 무슬림을 섬겨온 한 선교사의 유쾌하고 솔직한 인생과 사역 이야기
그렉 리빙스턴 지음, 손현선 옮김 / 좋은씨앗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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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렉 리빙스턴, 리비아는 네 거야좋은씨앗, 2014를 읽고.

 

목사로서 나에겐 개인적으로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다. 첫째는 교회개척이다. 얼마 전에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목사가 두 번의 개척교회를 하여 제법 교회가 성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회를 지어봐야 목사라고 했던가? 개척 얘기만 나오면 현실에 안주하여 편한 목회를 하는 것 같아 왠지 모를 미안함에 열등감에 솟구친다. 또 하나는 선교사이다. 지금도 교회에서 선교담당을 하고 있지만 선교 얘기만 나오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한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조국교회를 위해 이 땅에서 목회해야 한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그러나 선교사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은 경외감으로 휩싸인다.

그렇게 한 편은 선교가 아닌 목회로, 또 다른 편은 부러움 가득한 경외심으로 리빙스턴의 <리비아는 네 거야>를 읽었다. 이 책은 사생아였던 자가 프로티어서 선교단체의 설립자로 세워지기까지의 스토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본 서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조차 들어 쓰신다는 희망을던져준다. 그렉의 위탁모 루스 링글이 소리쳤듯이 주님이 그렉을 쓰셨다면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 하나님이 쓰지 못할 사람은 없다. 세상은 잘 준비된 사람들이 쓰임 받는다. 실제로 준비된 그들을 통해서 큰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은 준비된 사람만 찾고, 준비된 사람만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주님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 , 그렉처럼 순종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준비유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이런 순종이 있을 때 우리의 빈그릇이 주님의 능력으로 채워질 것이다.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기에 그렉을 통해 내 사명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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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과 용서 -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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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라.

<베풂과 용서, 미로슬라브 볼프>

 

계속해서 쪼들리는 생계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몇 해 전 지출 리스트를 작성했다. 씀씀이의 진원지를 찾아 정리하면 계속 늘어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다소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헌금(십일조, 감사, 주일, 선교, 건축, 장학, 구제헌금, 당시 내가 섬겼던 교회는 헌금 종류가 참 많았다), 주유비, 관리비, 학원비, 생활비... 쭉 목록을 적어 가는데 도무지 줄일 것이 없었다. 이미 좌우에 날선 카드(?)로 막 긁는 것이 몸에 익은 나에게 몸집을 줄이는 것은 다이어트만큼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항목이 있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다. 신학대학원을 포함한 복지단체의 후원금이었다. 금액을 다 합쳐봐야 한 끼 식사 정도였지만 내게는 삭제 목록 0순위였다. 이 정도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이는 이 가난한 목회자라고, 매달 드리는 헌금에 구제와 선교의 비용이 다 포함되어있다고, 더 이상 이중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런 내적 속삭임과 자기합리화로 결국 그렇게 베풂이 끊겼다.

   ‘처음의 여운은 길다. 내게는 교회 첫 사역의 기억도 그렇다. 처음의 설렘과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잊지 못할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주일학교 부장집사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장이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도 경험이 미천하여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부장 교사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기에 내가 중심이 되어 부서를 이끌었다. 교회 규모가 워낙에 작았기에 나 혼자 1인 다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배 후의 프로그램도 내가 이끄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그 날도 예배를 마치고 한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부장 교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마이크를 확~ 낚아채더니 자기가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논의한 내용을 알 리 없고, 본인의 필대로 진행을 하다 보니 행사가 엉망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린 전도사라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마이크를 뺏기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느꼈던 모멸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더 가관은 그런 작자(표현을 이해하시라)가 담임목사에게는 정말 잘했다. 이런 것을 두고 입에 혀처럼 한다고 할게다. 결국 그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역을 하다보면 그런 사람 한 둘은 꼭 있다. 혹자는 그런 이들이 있기에 목회자가 더 긴장하고, 기도하게 된다면 좋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백번 옳다. 허나 머리는 끄덕여지지만 가슴은 여전히 냉랭하다. 그럼 나는 그를 용서했나? 글쎄.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한 것을 보니 미용서인 듯 하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마따나 베푸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누가 베풀며 살려고 할까? 미국만이 아니라 소송하기 좋아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사는 그래서 도무지 용서를 모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334p) 볼프는 바로 이런 물음을 갖고 인색하며, 잔뜩 화가 난 우리에게 얼마든지 베풂과 용서가 가능하다고 소리친다.

    ! 그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볼프는 그것을 닮음으로 풀었다. 베풂의 당위를 설명하는 볼프의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똑같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닮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똑같이 베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과 비슷하게 베풀 수 있고, 의당 그래야 한다.”(97p) 용서의 당위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과 비슷하게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263p)

   따라서 하나님을 닮음이 관건이다. 그는 계속 말한다. 하나님은 베푸시고 용서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베풀고 용서해야 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해야 하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처럼 하면 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할 수 있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된다고. 그러고 보면 그렇게 인색했던 것은 계속 내 지갑만 보았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했던 건 내가 입은 피해만 곱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유사하게 베풂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니 한결 가볍다. 사실 우리는 닮음을 같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냐고 처음부터 포기했다. 그러한 수준은 이 땅에서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일로 간주했다. 시도해 볼 엄두도 못낸 것이 사실이다. 허나 비슷하게라도 해 보라고 하니 해 볼 만하다. 하나님을 닮은 내가 먼저 베풂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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