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공동체의 성서적 기원과 실천적 대안
차정식 지음 / 짓다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공동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셀이나 가정교회와 같은 세련된 이름이 아니라 지금은 잘 부르지도 않는 구역이 바로 그것이다. 명세기 목사가 심방을 가도 공부기계인 자녀들은 집에 없고, 있다 한들 인사를 하곤 곧장 지들 방으로 들어가 같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자녀들이 모두 구역예배에 참여했다. 물론 지금 추억해 보면 예배는 역시나 지루했다. 인도자는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내용의 일방적 전달했고, 다른 성도들도 눈치를 보니 입도 뻥긋하지 않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그렇게 모임이 마치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간식시간이었다.

그렇다. 내 공동체의 좋은 기억 8할은 먹는 시간이다. 기껏해야 삶은 달걀, 고구마, 감자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여전히 내게 군침 도는 순간이었다. 공동체의 저력을 확인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지금처럼 상조회가 활성화 되지 않는 그 때, 장례의 모든 순서를 교회 공동체가 맡았다. 하관을 하는 날, 성도들은 소고기국을 끊여서 짐차에 다 실고 먼 길을 같이 와서 조문객들의 식사를 일일이 책임졌다. 지금도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난 그 시절 교회 공동체의 수고와 헌신을 떠 올리며 감격한다. 이렇듯 난 교회공동체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 나게 흐뭇하다.

그런데 차정식 교수는 교회를 무조건 공동체로 전제하는 것에 딴지를 건다(376). 아니 교회가 공동체가 아니면 뭐가 공동체란 말인가? 사실 저자도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었다. 허나 달라진 사회와 그 속에서 더 달라진 사람들을 보면서 또 그 사람들이 몸 담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성과 너무 멀리 떨어진 현실을 보며 더 이상 교회를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조국 교회가 초대교회가 가졌던 공동체 이상을 담고 있지 못하기에 더 이상 공동체로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27).

그러고 보니 교회 내 소그룹들이 많이 변했다. 남녀노소유무식을 초월하여 누구든 섞여야 할 텐데 현실은 생활수준, 사회적 지위, 학력이 비슷한 자들끼리 묶어 달란다. 여전히 그곳에서는 성도와 성도간의 만남이 아니라 00교수, 00장관, 00박사란 호칭이 통용되고 있다. 결단을 하고 전체 소그룹 재편 작업을 했으나 외압에 그만 포기한 다락방이 생겼다.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그룹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소그룹이 또 다른 벽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명분을 그럴싸하지만 결국 조직의 운영을 효과적으로 하는 목적으로 소그룹이 전락해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저자의 진단이 맞다.

하여 저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성을 추적한다. 공동체적 관점으로 본 성경해석이라고 할까? 학자의 세밀함과 주도면밀함을 가지고 올곧게 밀어 부친다. 가히 공동체 부분에 기념비적 책이라고 하겠다. 그렇기에 공동체에 대한 실용적 담론에 머물러 있는 조국 교회가 이 책을 통하여 든든한 이론적 배경도 동시에 견지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전히 성경적 공동체가 이 땅에 소망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도구임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의 수려한 글 솜씨가 오히려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전적 부족이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인 문장으로 인해 분명한 이해가 어려웠다. 또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고 했으나 진부한 대안만 제시한 듯 하여 아쉽다. 공동체의 긴 추적에 비하여 결론적 대안은 조금은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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