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풂과 용서 -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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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라.

<베풂과 용서, 미로슬라브 볼프>

 

계속해서 쪼들리는 생계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몇 해 전 지출 리스트를 작성했다. 씀씀이의 진원지를 찾아 정리하면 계속 늘어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다소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헌금(십일조, 감사, 주일, 선교, 건축, 장학, 구제헌금, 당시 내가 섬겼던 교회는 헌금 종류가 참 많았다), 주유비, 관리비, 학원비, 생활비... 쭉 목록을 적어 가는데 도무지 줄일 것이 없었다. 이미 좌우에 날선 카드(?)로 막 긁는 것이 몸에 익은 나에게 몸집을 줄이는 것은 다이어트만큼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눈에 들어온 항목이 있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다. 신학대학원을 포함한 복지단체의 후원금이었다. 금액을 다 합쳐봐야 한 끼 식사 정도였지만 내게는 삭제 목록 0순위였다. 이 정도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정작 도움을 받아야 할 이는 이 가난한 목회자라고, 매달 드리는 헌금에 구제와 선교의 비용이 다 포함되어있다고, 더 이상 이중 구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런 내적 속삭임과 자기합리화로 결국 그렇게 베풂이 끊겼다.

   ‘처음의 여운은 길다. 내게는 교회 첫 사역의 기억도 그렇다. 처음의 설렘과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경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잊지 못할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주일학교 부장집사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장이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도 경험이 미천하여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부장 교사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기에 내가 중심이 되어 부서를 이끌었다. 교회 규모가 워낙에 작았기에 나 혼자 1인 다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배 후의 프로그램도 내가 이끄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그 날도 예배를 마치고 한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갑자기 부장 교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마이크를 확~ 낚아채더니 자기가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논의한 내용을 알 리 없고, 본인의 필대로 진행을 하다 보니 행사가 엉망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린 전도사라도 그렇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마이크를 뺏기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느꼈던 모멸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더 가관은 그런 작자(표현을 이해하시라)가 담임목사에게는 정말 잘했다. 이런 것을 두고 입에 혀처럼 한다고 할게다. 결국 그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역을 하다보면 그런 사람 한 둘은 꼭 있다. 혹자는 그런 이들이 있기에 목회자가 더 긴장하고, 기도하게 된다면 좋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백번 옳다. 허나 머리는 끄덕여지지만 가슴은 여전히 냉랭하다. 그럼 나는 그를 용서했나? 글쎄. 지금도 그를 잊지 못한 것을 보니 미용서인 듯 하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마따나 베푸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누가 베풀며 살려고 할까? 미국만이 아니라 소송하기 좋아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사는 그래서 도무지 용서를 모르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334p) 볼프는 바로 이런 물음을 갖고 인색하며, 잔뜩 화가 난 우리에게 얼마든지 베풂과 용서가 가능하다고 소리친다.

    ! 그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볼프는 그것을 닮음으로 풀었다. 베풂의 당위를 설명하는 볼프의 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똑같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닮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과 똑같이 베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과 비슷하게 베풀 수 있고, 의당 그래야 한다.”(97p) 용서의 당위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닮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과 비슷하게라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263p)

   따라서 하나님을 닮음이 관건이다. 그는 계속 말한다. 하나님은 베푸시고 용서하신다. 그러니 우리도 베풀고 용서해야 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해야 하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처럼 하면 된다고. 어떻게 베풀고 용서할 수 있는가?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된다고. 그러고 보면 그렇게 인색했던 것은 계속 내 지갑만 보았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했던 건 내가 입은 피해만 곱씹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유사하게 베풂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니 한결 가볍다. 사실 우리는 닮음을 같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냐고 처음부터 포기했다. 그러한 수준은 이 땅에서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일로 간주했다. 시도해 볼 엄두도 못낸 것이 사실이다. 허나 비슷하게라도 해 보라고 하니 해 볼 만하다. 하나님을 닮은 내가 먼저 베풂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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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신경 -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스캇 맥나이트 지음, 김창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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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는 내 질문에 최근 아들 녀석이 혼란스러워 한다. 6살 때부터 주입하여 취침 전 줄곧 말해오고 있는 목사가 되겠다는 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12, 초등학교 5학년인데 벌써 세상을 알아버린 것일까? 6년을 말했기에 차마 목사를 내려놓지는 못한다. 허나 좋아 보이는 다른 것들이 아들 눈에 들어오고 있다. 결국 저울질을 하며 갈팡질팡하더니 목사를 안 하면 안 되겠냐며 묻는다.

   살짝 아쉽기도 했으나 괜찮다고, 아빤 네가 어릴 적부터 꿈을 가지며 살기를 원한다고, 그러니 네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목사가 아니냐고? 물론 아들의 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혹여나 아빠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어쩌나 살짝 두렵다.

   아빠 때문에.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긍정적 해석은 아빠같이 목회를 잘 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러면 정말 좋겠다. 아니면 아빠처럼 목회를 하느니 차라리 다른 것을 하는 게 좋겠어요. 이게 염려된다. 강단 위와 아래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르냐고. 교회와 집의 삶이 왜 틀리냐고. 시쳇말로 다중인격 아빠 때문에 목사가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나. 지금 내 꼴을 보니 가히 틀린 해석이 아닌 듯하다.

   결국 삶이 문제다. 말은 아주 그럴싸한데 삶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 아닌가? 아들의 꿈이 문제가 아니다. 강대상의 말과는 한참 함량미달인 내 모습으로 인해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에 맥 나이트의 예수신경은 무척 고마운 책이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떠올린다. 세례 문답을 앞두고 혹여나 틀릴까 싶어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조바심으로 외우던 기억이 난다. 어떤 이들은 의미 없는 암송의 폐해를 얘기하며 암송무용론을 펴기도 하지만 외우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문제는 기계적 반복이지 암송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예배의 순서 하나로 사도신경을 후딱 외워치우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 자체를 암송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신경을 입으로 읊조리지 말고 삶으로 읊조리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신경은 무엇인가? 책의 제목처럼 예수 신경이다. 예수 신경이란 예수께서 삶으로 살아내신 말씀이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가 삶으로 말한 고백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6:4-5) 이웃을 사랑(19:18)하는 삶으로 읊조리는 신경이다.

   저자가 말마따나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164). 아기가 어디서 태어날지를 묻는 헤롯의 질문에 미가서를 지목하며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던 제사장과 서기관처럼 우리는 성경을 아는 머리와 두뇌만 있다. 허나 우리에게는 그 아기를 찾아가는 겸손한 손과 발, 즉 아는 것을 삶에서 구현하는 것은 부족하다.

   이런 우리에게 저자는 예수 신경을 삶으로 말하게 했던(36) 예수님의 삶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삶은 예수 신경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삶이였음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그 어느 때보다 삶이 고픈 시대다. 그동안 화려한 말, 이목을 끄는 어휘, 호소력 짙은 설교자가 되는 것에 관심을 뒀다. 이제는 삶이다. 삶으로 읊조리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당신은 어떤가? 입이 아닌 삶으로 읊조리고 싶은 모든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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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묵상집
찰스 링마 지음, 권지영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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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예배 때 새해의 다짐을 적는 시간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성경을 1독하겠다. 큐티를 열심히 하겠다. 가정예배를 드리겠다. 등 소위 영적인 목표를 야심차게 걸었다. 그래서일까? 신년 성경통독 시간에 제법 많은 교인들이 참석했다. 큐티책도 평소보다 더 많이 팔려 사무실에서는 추가 주문을 했단다. 우리 집도 가정예배란 걸 드렸다. 이렇듯 우리는 새해를 맞이할 때 작년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런 몸부림에 신규과목이 개설되었으니 <본회퍼 묵상집>이다. 지금 과목도 따라가기 벅찬데 추가하려니 벅찰 수도 있겠다. 허나 신년의 기세로 한번 도전해 보시라. 자고로 책에 대한 평을 적으려면 마지막장까지 읽어야하나 그러지 못했다. 다만 오늘까지 정해진 분량을 소화했으니 지금까지의 느낌으로 대신해 보려한다.

    우선, 다양한 본회퍼의 다양한 책을 맛볼 수 있다. 마치 본회퍼 뷔페와 같다. 보름밖에 되지 않지만 <나를 따르라>, <옥중서간>, <신도의 공동생활>, <그리스도론>, <자유를 향한 길> 이렇게 5권의 책을 읽었다. 물론 단편적이고 편집자의 취향을 따라 고른 구절이기에 전체 내용을 알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책의 핵심 구절을 콕 집어 다룬 것이니 요즘과 같은 시대에 더 없이 반갑다.

    둘째로 성경적 논증을 추구하고 있다. 본 회퍼 개인의 생각과 사색만 담았다면 아쉬울 뻔했다. 왜냐하면 그의 글이 모두 성경적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본 서는 그의 글을 다루기 전에 성경구절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글 하나하나가 어떻게 말씀을 살아낼 수 있는 지에 대한 샘플이 된다. 물론 성경구절은 본 회퍼가 아닌 전적으로 저자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글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이니 순서의 불편함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자료와 적절성을 찾기에 분주한 나같은 설교자에게 이것은 참 고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해설이 이해를 풍성케 한다. 거칠기는 하지만 굳이 본 서의 구성을 귀납법적 성경공부의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성경구절은 관찰이다. 본 회퍼의 글은 해석이다. 끝으로 저자의 해설과 기도, 사색은 적용이다. 따라서 저자의 해설은 2015년을 본 회퍼처럼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야 할 독자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하루 하루 본 회퍼의 뒤를 따르다 보면 묵상을 넘어 실천의 삶을 살 수 있을게다.

    올해는 본 회퍼와 함께 1년을 보내려고 한다. 말과 행동이 모두 빛나면 좋겠다. 글과 삶이 일치하기를 원한다. 그것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본 회퍼가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글을 유심히 읽으면서 본 받고 싶다. 무엇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의 한 절이라도 배우고 싶다. ~ 그럼 함께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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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읽는 설교 시리즈
화종부 지음 / 죠이선교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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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갈 때마다 이렇게 책이 많은데 또 다른 주제의 책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곧장 책을 내고픈 내 작은 소망에 강력한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이미 그런 책은 있는데 너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출판 업계도 힘들다고 난리인데 너까지 왜 그래?, 새로운 관점도 없잖아?,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써 놓았어? 뭐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떠오르면 이내 기가 팍 죽어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또 다른 설교집이 과연 필요할까? 도대체 다른 설교집과 차별성이 뭐냐? 더욱이 얇기라도 하면 몰라도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이렇게 두껍게 썼으니 종이 낭비 아냐? 그래서일까? 저자의 생각인지, 출판사의 의도인지 몰라도 읽는 설교라 명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제목이다.

   물론 설교는 현장성이 중요하다. 똑같은 설교문이라도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시쳇말로 은혜가 다르다. 또한 설교는 특정한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이다. 하여 공동체가 가지는 정서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의 보편성을 생각 할 때 여러 가지 제약을 다 아우를 수 있게 읽는 설교라고 명한 것은 신의 한수다. 왜 또 다른 설교집이라 묻는다면 읽는 설교니까. 이렇게 말해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여러분”(지면에서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이해하시라!)라는 특유의 음성 외에는 저자 화종부 목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모교에 개강집회 강사로 왔다기에 그때 설교를 잠시 슬쩍 들어보긴 했다. 가끔 극동방송 전파를 타고 운전할 때 잠시 들은 것이 전부다. 허나 이번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읽는 설교 시리즈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다. 설교의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러니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국교회의 강단이 다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너무 너무 은혜로운데 공공기관의 강연회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릴 때가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교는 오랫동안 잊어진 설교의 참 맛을 본 듯하여 너무 기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1세기 갈라디아교회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저자가 가진 탁월한 은사요 그가 그렇게 추구했던 로이드존스의 영향이리라.

   둘째, 그의 설교는 현대적이다. 어릴 적 설교자를 꿈꾸면서 설교자에 대한 불만(?)이 하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들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었다.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매우 지루했다. 옆을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의 설교는 현장성도 잘 살렸다. 대부분의 적용을 부부사이의 관계적 측면으로 전개한 것은 살짝 아쉽지만, 1세기 갈라디아교회 성도와 현대 교회 성도들을 잘 연결했다. 그래서 그때의 메시지가 오늘의 도전임을 잘 드러냈다.

   설교는 영광스러우면서도 고된 작업이다. 나와 같은 풋설교자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자와 같은 좋은 설교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어떤 이는 설교집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꼼꼼히 잘 챙겨본다. 표절이 아니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고 싶은 설교자가 하나 더 생겼다. 본문과 현장의 균형 잡힌 설교를 화종부 목사를 통해서 배웠다. 계속해서 읽는 설교가 출간되기를 고대하며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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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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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가나안 성도를 기대하며

 

신학교 시절 경건회에서 설교를 하던 선배 목회자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똑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후배들이 목회를 하는 상황은 더 어려울 거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러니 더 잘 준비해라. ~ 실감이 없었다. 어려워 진 들 얼마나 어렵겠어! 제대로 된 신학교육도 받지 못한 선배들도 저렇게 잘 해 오셨는데,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우리가 아니 나라면 충분하다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신대원을 졸업 10년차가 된 지금, 젊은 호기에 한없이 부끄럽다.

    그렇다. 목회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부흥하는 교회에 있으니 그런 소리 말라는 항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허나 부흥의 속내를 보면 대부분 교회이동이다. 주변의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교회의 구역원 전체가 통째로 등록했다. 등록의 기쁨도 잠시 아니 이제 그 교회는 어쩌나 염려가 몰려왔다. 교회를 이동하여 출석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이동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이동 후에 더 온전케 되는 성도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가나안 성도란다. 이게 또 무슨 말인가? 도서관 담당 목사는 제목이 은혜로워 구입을 했단다. 나에게 내용을 들은 그는 급하게 금서인 양 회수처리를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가나안 성도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자~ 뭐 이런 은혜로운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니 책 제목은 잘 지었다.

    목회고충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아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까지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다고!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본 서를 통해 내가 받은 첫 번째 감정은 당혹감이다. 큰 일이다. 이제 어쩌나. 아직 은퇴하려면 한 참을 남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자도 가나안 성도를 되돌리는 법 1, 2, 3과 같은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문제만 잔뜩 널어놓고 손에 잡히는 대안이 없어 살짝 아쉽다. 허나 대안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해서일 때가 많으니 힌트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두 번째 감정은 안도감이다. 늦지 않게 가나안 성도가 무엇인지 알아서 다행이다. 저자가 목회자들에게 계속 현상에 대한 안목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는데, 안목을 가지기 전에 현상에 대한 이해라고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 목회자에게 가나안의 탓을 다 지우는 것 같아 읽는 내내 힘들었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기에 지금 나의 사역의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마지막 감정은 불편함이다. 저자가 가나안 성도를 대변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허나 가나안 성도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의 접근은 못내 아쉽다. 너무 두둔만 했다. 나는 가나안 성도에게 말하고 싶다.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추구한다면 에라스뮈스, 존 밀턴, 김교신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라. 그냥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 안에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넌센스다.

     또 저자에게 따져 묻고 싶다. 가나안 신학을 얘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떠남을 말했다. 그것과 가나안 성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브라함이 떠난 것은 사명으로의 떠남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개입이 있었다. 가나안 성도의 떠남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3)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 문 밖에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자는 말이지 교회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점점 목회가 힘들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이 시대 목회자로 산다는 것이 버겁다. 위축된다. 그래도 목회는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은 제대로 잘 가고 싶다. 이 일에 이 책이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제는 가나안 성도의 의미가 역전되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도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가나안 성도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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