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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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은 '언약'(본 서에는 '계약'으로 번역되었다)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 때부터 계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담으로부터 모든 계약의 완성인 그리스도까지 계약의 관계를 맺으셨다. 이러한 계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조망한 것은 로벗슨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원서제목: 언약의 그리스도)이다.

저자는 계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約定)으로 정의한다. 특별히 계약은 유언이 아니므로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넘어서는 계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의 범위는 세상의 시작부터 세상의 끝까지 이른다. 또한 하나님의 계약은 구조적, 주제적 통일성을 이루는데, 특별히 계약의 핵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신약의 임마누엘 사상)이다. 이러한 계약적 의미는 창조의 계약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곧 선악과의 계약에서 피로 맺는 약정의 개념이 나타난다.

로벗슨은 창조 때 이루어진 피의 약정에 대한 처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창조 시에 인간과 맺은 계약은 인간의 파괴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아담의 시작 계약에서 시작되는 구속의 단계에서는 인간 구속의 역사는 인간과 그가 창조된 배경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그러나 실질적으로 로벗슨이 전체의 구속에 대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노아의 계약에서도 저자는 구원이 사회적, 문화적 존재로서의 전 삶의 양식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특별히 노아와 그의 가족 구원을 통하여 보존의 측면을 강하게 표명하신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임마누엘의 원칙을 자리잡게 하는 기초가 된다.

이어서 계약의 꽃으로 불릴 수 있는 아브라함과의 계약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자신이 직접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계약 파기 시에 담당하게 될 죽음을 자신이 직접 치르실 것을 천명하신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할례를 실시함으로 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새 계약의 세례에서 성취된다. 시내산에서 수여된 율법(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속계약의 내용을 펼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정신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어서 다윗의 계약은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왕의 출현이다. 왕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백성들과의 계약의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 모든 계약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계약의 마침이며, 완성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의 새 계약의 의미를 살펴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본 서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계약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각 계약의 단계를 시작, 보존, 약속, 율법, 왕국, 완성의 단계로 설명하는 것은 계약의 진전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유익하다. 더욱이 각 계약의 초점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구속사역의 큰 줄기를 잡는데 유익하다. 또한 본 서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은혜가 되었던 것은 새 계약 안에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소개하면서, 그것은 안식일을 기대하면서 엿새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우주적 사건으로서 이미 달성된 안식 속에서 기뻐하며 일 주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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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
해돈 로빈슨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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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곳에서 강단의 권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과 미래의 변화 속에서 설교는 과연 목회의 중심(中心)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도대체 설교가 최종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회의적인 상황 속에서도 설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전제를 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바른 성경적 말씀의 선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른 성경적 말씀의 선포는 어떤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해돈 W. 로빈슨의 <강해설교>는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이 책의 저자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19년 동안 설교학을 직접 가르치면서 체득한 것을 거침없이 쏟아놓고 있다. 본 서는 강해 설교의 첫 단계인 본문 성경구절의 선택에서부터 실질적으로 강단 위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전달방법에 이르기까지 설교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고 있다. 필자는 본 서를 읽으면서 도전 받은 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필자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한 아이디어(idea)의 중요성'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한 아이디어(idea)'는 설교에 있어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중심의미이다. 소위 말해서 'One point meaning'이다. 이것은 인간의 척추와도 같다. 이것은 인간의 신경줄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저자의 주장에 비추어 본다면 필자는 지금까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중심사상에 초첨을 맞추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무차별적으로 말한 것과 같았다. 과히 '한 아이디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소'와 '보충요소'는 필자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 서에 수록되어있는 연습문제를 충실히 풀어보았지만,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따라서 저자가 강력하게 이야기했던 사고(thinking)의 훈련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본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철저하게 묵상하는 가운데 본문의 핵심 아이디어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것이며, 첫 단계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다음으로, 설교의 준비의 단계에 대한 서술이다. 책의 핵심부분을 차지하는 3장에서 8장은 성경본문의 선택하고, 선택한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 한 아이디어의 발견, 설명·증명·적용의 단계, 설교 목적의 설정, 본문에 따른 설교 형태의 결정, 인상적 시작과 완전한 마침을 위한 서론과 결론의 준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설교학을 왜 배워야하는지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고, 이러한 설교의 준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설교를 했다. 이를 보고, 함께 동역하던 부목사님은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러한 식으로 설교를 준비하시는 분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유명한 설교가들의 글에서는 자신의 설교 준비에 대해 이와 유사한 의견을 기록한 것을 보았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고투하고, 철저하게 준비함으로 위대한 설교가가 탄생함을 새삼 알 수 있다. 앞으로의 필자의 설교 준비에 있어서도 이러한 절차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전달에 대한 이해이다. 설교는 한편의 잘 작성된 설교문으로 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더불어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전달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아직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필자에게 이 같은 것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자의 용모, 몸짓, 음성... 청중의 배려차원에서 중요하다. 특별히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글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으로 본 서에서 필자가 도전 받은 것을 정리해 보았다. 본 서는 애송이(?) 설교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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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문화 거듭나야 한다!
양낙흥 / IVP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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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8년 전과 현재의 국민적 의식수준을 두부 자르듯 동일하게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 갱신이 이루어 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근본적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이것은 어느 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의식 수준은 왜 이렇게 미미한 것인가? 저자에 언급대로 그것은 일차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경험의 부재이다. 서구에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루어 낸 민주주의를 한국은 전쟁이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어쩌다가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민주주의의 역사가 수 백년이 된 서구사회와 그 의식을 판가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책임이다.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저자가 책을 읽어보면, 다분히 장로가 대통령이 된 것으로 인해 상당한 기대와 바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러한 기대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와 문화를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역시 그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 바른 인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저자도 언급한 대로, 한국 교회는 신실한 믿음과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야 한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인,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이루기를 원하는 신앙인,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 바른 소양을 가진 신앙인, 개인의 신변을 우선하지 않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신앙인... 이러한 신앙인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에 대한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 한국 사회는 보다 성숙한 사회로 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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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시대적 사명과 한국신학교육의 개혁
양낙흥 / 예영커뮤니케이션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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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8년 IMF의 시대적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온 나라가 IMF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국가적인 대 혼란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저자는 이것을 일차적으로 설교자들의 선지자적 말씀 선포의 부재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 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목사들이 시대적 상황과 안목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의 요구에 영합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온통 위로와 축복과 달콤한 회개로의 초청들이다. 어느 곳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온 것을 요구하는 선지자적 외침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은 목사의 시대적 사명에 대한 깨달음을 필자에게 강하게 주었다. 필자도 언급했듯이 목사의 모든 메시지가 선지자적 메시지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시대를 읽는 능력과 시대에 영합하지 않는 신념 그리고 위기의 상황에 대한 바른 인식에 대한 도전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사의 시대적 사명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국 신학교육의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학생 전도사 제도의 폐지가 있다. 특별히 이 부분은 필자의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에 상당한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는 저자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 저자의 열정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의사와 비교한다. 소위 영혼의 치료와 육신의 치료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목사의 준비에서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의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목사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너무 많다. 교회가 가만히 두지 않는다. 결국 쉽게 사역에 뛰어들고, 돌아오는 것은 준비의 부족과 육신의 피로, 자질의 부족이다. 물론 교회와 사역에 대한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강도사 3년의 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전도사의 경험이 오히려 교회를 보는 시각을 삐뚤이지게 하거나, 사역에 대한 적당한 준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준비부족이 장차 목사가 된 이후의 사역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우려한 대로 목사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자 또한 신학생 전도사 제도는 하루 빨리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학원 3년에 대한 학비와 생활비의 문제가 남는다. 물론 저자도 언급했듯이 교회와 노회의 추천으로 신학교가 위탁교육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교육의 모든 경비는 교회와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현실적 어려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신학생 전도사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은 쉽게 변경될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긴 시간을 두고 개교회의 목사들과 교인들의 의식을 전환하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신학생 전도사의 위치에 있는 신학생 스스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작 신학생 전도사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신학생 스스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3년의 신학교육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장에 학년을 조정하는 것은 시장성의 문제에서 득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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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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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또 한 권의 귀한 리더쉽에 관한 저서를 읽고 또 읽었다. 한번도 부족해서 두 번이나 정성을 다해서 정독을 했다. 적은 양이어서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읽는 순간 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저자인 헨리 나우웬이 지도자가 쉽게 저지르고 있는 모습으로 제시한 예들이 모두 나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가슴 조이면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주로 나의 시력이 멈추어진 곳은 제 2장과 제 3장이다. 우선 제 2장에서 나의 개인주의적인 사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저자의 상황만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계속적으로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한 다음에 모든 영광과 박수와 갈채를 받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스타가 되기를 원했고,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안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이 글을 읽는 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자가 44페이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훌륭한 리더쉽은 우리의 인도를 받는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오픈(open)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는 반드시 상호 보완적이어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유명세에서 목회로 가기 위한 방법이 고백과 용서라는 것에 귀한 통찰력을 찾았다. 사실 교육전도사가 뭔데...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지... 답답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제 3장에서는 나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우리 학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 세상은 온통 힘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힘만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굽씬거린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크고 강력한 것은 통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너나없이 힘에 의지하려고 하고, 가지고 있는 힘을 과시하기에 어념이 없다. 비단 이것은 한 사람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조직이나 단체도 동일하다. 특별히 이 점에서 나는 우리 학교가 건물에 의해서 소개되는 것이 안타깝다. 학교를 소개하는 것에는 어디든 학교의 잘 빠진(?) 전경이 빠지지 않는다.

저자는 61페이지에서 성숙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인상적이 말을 했다. 나의 삶에서 종종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기를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자존심이 막 무너지는 것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과 지배력의 리더쉽이 아니라 무력과 겸손의 리더쉽이라는 저자의 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현장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할 때 반드시 이러한 리더쉽의 덕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리더쉽을 가지기 위해서 신학적 성찰에 대한 훈련을 강조한다. 지금 나는 이러한 작업에 들어서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현실에서 대충 학업을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끊임없이 지도자로서 현실의 문제를 예수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따르는 자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이것을 인도를 받는 자들이 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함으로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받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관심과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평생의 작업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쁨으로 이 일을 감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매일 매일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맺는 말에서 지적한 대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기도하는 지도자, 연약한 지도자, 섬기는 지도자의 덕목의 나의 성향으로 굳어져서 나와 동역하며 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아름답게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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