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다 -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
신혜정 글.그림 / 마음의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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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흐드러지다'라는 형용사를 보면 어떤 것을 떠올릴까. 나 같은 경우에는 길가에 무심히 활짝 핀 나무 위 꽃들, 적당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누군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올라탄 여린 꽃잎. 그러니까 꽃잎바람 정도로 함축할 수 있겠다. 꽃잎바람이 부는 어느 길가의 이미지.

'흐드러지다'라는 말 앞에서 가끔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 '매우 탐스럽거나 한창 성하다'라는 뜻의 이 형용사 앞에서 나는 가끔 무너진다. 봄날 누군가의 집 마당에서 풍겨오는 라일락 향기 같은 것을, 이 말은 담고 있다. (20쪽)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를 작가의 글에서 찾게 되자, 이 책은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향기'까지 생각하는 작가의 세심함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작가는 시인이라 했다. 그리고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내일쯤 공항으로 달려갈 수 있는 가벼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었다. 쓸쓸한 느낌도 가끔씩 드는 글들 속에서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고 행동하는 패턴도 달랐지만, 왜인지 그녀의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그녀의 글이 좋아서인지, 처음 접한 작가인데도 다가오는 느낌이 좋았다. 시인이라서인지 몰라도 단어를 고르는 그 섬세함이 마음에 들었고, 직접 그린 일러스트들은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원래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과 많이 끌리는 법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녀의 글들이 그래서 마음에 드는건가.


<흐드러지다>는 독일, 터키, 라다크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모든 감정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혼자여서 아름다웠던 지난 시절의 기록들'이다. 그 속에는 멈춰있는 시간 속의 그녀도,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녀도, 사랑했던 기억들을 다시 되돌려보는 그녀도,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는 그녀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감정을 빌려 책 속에 등장한다. 작가가 있었다던 그 도시들의 공기나 유적지 또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 수 없는 책이지만,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다름'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작가의 모습은 그 모습대로 괜찮은 읽을거리였다. 낯선 것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다 어느새 익숙해진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작가의 생각들은 보기 좋았으니까. 더군다나 좋은 문장들이 많았고.


'천성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있다. 방구석에 쳐박혀 있어도 웬만해선 지루하다거나 심심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텔레비전을 켜두는 것도 부지런한 것이라 생각하여 공회전 같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귀찮은 사람'(13쪽) 은 왜인지 나를 지칭하는 듯 했고, '습관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일지도 모른다.'(41쪽) 라는 문장은 어떤 이야기 끝에 따로 적어놓은 문장이지만 어디든 따로 떨어뜨려놓아도 좋은 문장이었다. 표지에도 적혀 있는 '그래서 가끔 나는 '여행하다'를 '우연하다'로 읽곤 한다.' (43쪽) 라는 문장은 굉장히 멋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인 '흐드러지다'처럼 굉장히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불안에 대해 생각한다. 이토록 불안과 의심이 많은 내가 어떻게 낯선 곳들로 떠날 마음을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있는지, 생면부지 낯선 이의 집에 머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쩌면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불안을 떨쳐벼리기 위한 연습을 하는 건 아닐까?'(106쪽) 처럼 자신을 위한 글들도 있고, '해가 지는 풍경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의 만남일 수도 있으며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해가 지는 풍경은 어둠으로 서서히 전환하는 순간에 이르러 마음이 아련하게 벅차오른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이 주는 고요와 차분함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되는 것이다.' (142쪽) 처럼 글의 시작에 멋드러진 자신의 생각을 적어넣기도 한다. '언젠가 내가 발음한 단어들이 나를 그곳으로 안내할 것이다'(184쪽) 이 문장 또한 함께 담긴 이야기와 잘 어울리지만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좋아도 또 적어놓은 문장.


훌쩍 떠나서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실은 무서워하지만 그 무서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당연한 듯 떠나는 사람.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한 번도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더라도 골목골목들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것들에 눈을 둘 줄 아는 세심한 그녀의 여행은, 우리의 여행과 비슷한 듯 달랐다.

가끔 바람이 되는 상상을 하곤 해. 바람은 '열에 의한 공기의 밀도 차이 떄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정의하지. 내 마음이 뜨겁게 달궈진다면, 어디 차가운 마음을 가진 곳으로 부드럽게 이동해 가는 바람이고 싶어. 어디든 자유롭게 물리적 한계를 벗어버리고 말이야. 그렇게 대기가 순환하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마음의 충만함 같은 걸 느끼며 살고 싶다는 말이야. (263쪽)

바람이 되는 상상을 하는 사람의 여행과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글쎄.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우연으로 점철된 것이므로 '우연하다'라 읽는다는 작가의 우연들을 모아서 만들어 낸 책 속에서, 작가가 말한 '흐드러지는 것'은 우연히 꽃피운 여행의 기억들이 책 속에 흐드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기억들이 책 속에 흐드러진다. 여행의 설렘보다는 담담함과 조용함이 잔뜩 담긴 책이지만, 그 속에서 너무나도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그녀는 아마 앞으로도 그런 조용한 여행을 더 다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또다시 돌아와 그 기억들을 흐드러지게 꽃피울 것이다. 또 다른 우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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