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무 대륙기 1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판타지 세계는 늘 신비롭다. 현실과 묘하게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고, 그렇다고 현실과 다르다고 밀쳐버리기엔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 흥미롭기 때문이다.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작품일 수록 글을 읽어가며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 (글 속에 쉽게 빠져들 수 없는 판타지라면 읽는 게
고역일 테고 말이다.) 2권, 800쪽이 넘는 분량인 <나무대륙기>는 장편 판타지 소설이다. 판타지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고
있다시피, 작가가 구축한 상상의 세계 속 뼈대가 튼튼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캐릭터들은 본래의 목적을 잃을 수 있다. 뼈대의
근본은 작가가 만든 상상력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얼마나 구현시킬 수 있느냐의 능력이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대륙기>는 켜켜이
이야기를 쌓으면서 기본 뼈대를 끊임없이 다져놓는다. 뼈대를 덧대는 작업은 그것들이 익숙해지게끔 하는 하나의 장치이자 노력이고, 눈에 얼추
익을때쯤엔 완전히 그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조금은 낯선 이야기들 속에 풍덩 빠질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을
테다.
사실 황금가지의 '블랙로맨스 클럽' 시리즈로
<나무대륙기>가 출간됐다고 했을 때 기대를 했었다. '블랙로맨스 클럽'은 기존 로맨스 소설과는 다른 조금 특이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소설들을 소개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WAKE>도 그랬듯이 온전한 로맨스 이야기라고 하기엔 담고 있는 내용들이
참신하다고 할까. 그리고 역시나.
계급이 있는 '인간'이 사는
세계, 그 곳에 형태가 없는 채로 살고 있는 심연에서 태어난 '어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는 빛에서 태어난 '옥',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용'까지. 판타지적 요소들은 등장인물들에서부터 드러난다. 각 분류별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채 의도치 않게 서로가 얽혔다.
굉장히 많은 비밀들을 갖고 있고, 대체로 그 사연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탐욕'과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이야기는 그들의 사연이
하나씩 밝혀질수록 생각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고 알고 있던 것들이 깡그리 바꿔버리곤 한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설명하고 있으니, <나무대륙기>는 일종의 '운명'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우연이란 건 없어. 아무데도. 그건 필연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야. 우리가 세상의 조각이듯이. 그러니까 만약에 우연이 일어났다면 인과를 찾아내야 해. (나무대륙기 1, 302쪽)
어쩌면 가장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비밀에 대해 살짝 귀띔 하자면(일명 반전이라고 한다), <나무대륙기> 속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신분' 혹은 '모습'의
변화가 많다는 것!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자주 오간다. 어떤 인물의 시점이건 그건 변하지 않는다. 사실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갑작스럽게 과거를 소환하는 이야기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라는 표시도 없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데 읽어보면 이건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몇 번 되돌아가 읽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다보면 그렇게 과거를 오가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과거를 보다 쉽게 분리할 수 있게 된다. (학습의 효과랄까) 작은 따옴표의 대화체가
있는 부분은 거의 과거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중일테니 참고하길.
<나무대륙기>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서
펼쳐진다. '서미'와 '무화'라는 두 소녀가 주인공이다. '서미'는 한 소녀는 녹옥공주의 딸이고, 한 소녀는 서민(혹은 천민)의 딸이다. 두
소녀는 생긴 것도 비슷하고 나이대도 비슷해 자매처럼 쌍둥이처럼 함께 자랐다. 유폐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녹옥공주를 대신해 유폐된 지역
바깥에서는 서민엄마가 두 소녀를 맡았고, 서민엄마가 일을 나갈 땐 녹옥공주가 돌보거나 둘이 들판으로 나가 놀거나 했다.
서미는 무화의 단 하나뿐인 친구다. 무화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나무대륙기 1,
324쪽)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둘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평화로웠던 소녀들의 인생은 서민쪽 소녀가 홍등가로 팔려가던 날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있은
후로 180도 변하였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사건 이후 서로를 굉장히 의지하며 오히려 둘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정도.
'서미'는 녹옥공주의 딸이자 반공주로 살아가고, '무화'는 서민의 딸이자 서미의 그림자 무사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반전은
있고, "네가 나를 위해서 뭘 하건, 그건 모두 너 자신을 위한 거야. 무화."(나무대륙기 1,
211쪽) '너는 달이고 그 애는 별이다.' 서미는 오른손을 움켜줘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했다. 별이 내는 빛을 반사할
뿐. (나무대륙기 1, 214쪽) 두 문장을 남기며 이들의 설명은 이쯤에서 마친다.
(나무대륙기 1권의 표지는 무화, 2권의 표지는 서미이다)
무화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인 어둔 '밤', 그리고
무화의 왼팔인 '어스름', 천재 연금술사 '아라킨'은 모두 '어둔'이다. 밤과 어스름은 무화와, 아라킨은 서미와 얽힌다. 적공자 '반하', 그와
함께 다니는 무사 '단풍'은 무화와 서미 모두와 얽히며, 일찍 죽는 단풍 대신 반하는 <나무대륙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무화와 서미 둘 모두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해적 '야르스'와 '카르파'는 대체로 무화와 얽히며 그들의 보물인 '클로버'를 찾는다. 악공
'수련'은 '연제군'의 과거와 현재에 얽히며, '마노'는 잘 등장하지 않는 듯 하나 굉장히 중요한 축을 맡고 있으며 무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렇게 얽히지만, 이들 중에서는 동일인물이 몇 있다. 또한 자신의 본모습으로 변화하는 이들도 있다. 그건 책을 직접 읽으면서 찾아보는 걸로.
(등장인물들을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조금씩이라도 하자니 너무 길어지고, 그렇다고 아예 안하자니 좀 뭔가 비는 것 같고. 이래저래 고민하다 누가
누구와 얽히나 정도만 정리했다. 더 복잡하게 얽히지만 그것은 서평에서는 차치하기로 한다.)
서미와 무화는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여자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들은 말하는 재산이지 사람이 아니었다. (나무대륙기 1, 34쪽) 같은 상황이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여자의 위치란 그저 종족보존과 혼인을 위한 재산
정도로밖에 치부되지 않던 목국에 살았다. 여자들이 목소리를 자주적으로 낼 수 없는 시대. 권력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나의 수단이 돼 누군가에게
시집을 가 획득해야만 하는 시대.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소녀들의 발버둥은 작은 파장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내는 듯 했으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거는 분석하고 증명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거예요. 인간은 시간을 존재케 하지만, 그런 순간은 아주 짧죠. 그러니까 과거는 과거인 채로 두고 오늘을 살아요. 그래야 내일이 오죠. 아니면 영영 어제에 갇힐 거예요. (나무대륙기 2, 124쪽) 이라 이야기하면서 희망이란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다. 얼른 가. 너무 늦기 전에. (나무대륙기 2, 360쪽) 다른 결과를 맞이하려 애썼던 노력들은 물거품이 되어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결국 예언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예언을 지키고자 예언 실행을 막고자 하던 이들의 절박함도 끝을 맞이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나무대륙기> 속 '운명'과 현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운명을 봤거든. 사람들은 운명을 기다려. 하지만 그걸 만나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고, 막상 코앞에 다다라도 감당할 용기를 내는 사람도 거의 없어. 나는 이미 한 번 운명을 놓쳤고 두 번 후회할 생각은 없어."
"운명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
"마주치면, 알게 돼. 모른다면 운명이 아니지." (나무대륙기 1, 382쪽)
<나무대륙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정해진 운명으로 걸어간다. 과거에서 벗어나 어제에 갇히지 않기 위해 걷고 또 걸어도 결국 또 다른 길을 찾기보다는 정해진 길을 걸어간다'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그 운명을 막아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얘기다. (무화와 서미가 그렇게 바꾸려 했으나 바꾸지 못했듯이.) 정녕 정해진 것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 더 나은 결론은 없는지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전수전을 겪었다 이야기해도 좋을만큼 만신창이가 된 무화는 그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선택으로 더 나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생각해봤다. < 나무대륙기>에서 이야기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그저 정해진 길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져 버릴 거라고 피지 않는 꽃은 없어. 죽을 거라고 삶을 멈추려는 생명은 없지. 맺어지지 못할 거라고 사랑이 멈춰지진 않아. (나무대륙기 2, 375쪽) 새로운 선택은 또 다른 운명을 낳고, 그 운명은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운명이란 녀석은 끝날 때까지 결코 안도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멈출 수 없다. 비록 막다른 벽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