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
차현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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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남자주인공은 연인과 너무도 힘들게 헤어져 함께한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려 기억삭제를 의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잊어버렸던 기억 속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그곳에 행복했던 너와 나의 시간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영화다.(물론 뒤에 이야기는 더 있지만 뭐 여기서 영화 얘기를 오래할 건 아니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이터널 선샤인>은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이라는 진부한 주제였다기 보다는, 추억을 소중히하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게 하는 영화였다. 왜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터널 선샤인>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책 역시 지나간 이와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추억을 소중히 대하는 법을 몰랐던 한 남자의 절규에 가깝다면, 책은 추억을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여자의 기억 어디쯤의 이야기다.

 

책을 보자마자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라고 했던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생각보다 좋은 책이었다.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는 담담하면서도 화자의 느낌이 정확하게 와 닿는, 쓰인 단어 하나까지도 계산해 넣은 듯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손이 가는대로 적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글이다. 투박하지만 소담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담길 글들까지 눈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드라마와 예능 작가 출신 저자의 많이 단련된 글솜씨가 넘치지도 않고 모자르지도 안았다고 느껴졌다. (이번에 처음 보는 저자였지만 말이다.)

 

맑고 높은 하늘, 그늘에 있으면 덥지 않을 만큼의 딱 적당한 온도, 부서질 듯 쏟아지는 햇살, 푸르른 공원의 싱그러움, 기분좋게 살랑이는 바람, 한 쪽씩 나눠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너가 좋아하는 음악, 무릎을 베고 올려다보면 보이는 너의 얼굴.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는 이렇게 따뜻한 상황에서 읽으면 좋을 법한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물론 책 속의 모든 이야기에 이렇게 따뜻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다 덮은 후에 드는 '그래, 사랑.. 좋지'라는 생각이다.  "나는 당신이 이 책을 단숨에 읽다가 누군가가 떠올라서 뛰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 제발, 보고 싶은 사람을 보는 일은 미루지 않았으면 한다." 라는 저자의 첫 문장은 이 책의 존재 이유이다.

 

책 속에는 총 8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모두 저자의 지나간 사랑들이다. 저자는 이들과의 만남부터 어느 순간까지 (그것이 열렬히 사랑하다 맞은 이별이 됐든, 사랑 그 근처 어디쯤에서 배회하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됐든) 그 순간의 자신의 마음을 남김없이 글로 꺼내어 놓았고, 자신을 바라봐 줬던 혹은 바라봐 주길 원하던 당시의 남자들의 행동들도 꺼내 놓았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남자에게서 느껴보았던 안정감,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없는 남자지만 편안함 속에서 저도 모르게 받아들였던 확신, 어쿠스틱한 비누 냄새가 났던 파란 눈의 조각상같은 남자와의 싱그러움, 장난치는 게 좋았던 나이 어린 연하남과의 조금은 과격했던 끝맺음, 마을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봄 나무 같았던 남자와의 낯섦에서 찾던 현실도피까지.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 남자들은 그녀가 반했던 포인트가 하나씩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고, 책을 읽는 나조차도 그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게끔 멋진 사람들로 등장했다. (물론 취향이라는 게 있어 모두가 '내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같은 추억이라도 다르게 적힌 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들이 온전히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기억은 아마도 그들과 직접 맞춰가야 제대로 된 퍼즐이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퍼즐이면 어떤가. 그저 그들이 그녀의 곁에 잠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그들을 가끔씩 꺼내보며 가슴 한켠이 따뜻해 질 텐데 말이다. 절절하게 눈물 나는 사랑이야기도 좋지만, 담백하게 여운이 남는 사랑이야기도 좋다. 특히나 남의 사랑이야기가 좋다. 내가 아닌 다른이가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이 보기가 좋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하고, 조금은 평범한 내 연애보다 아기자기한 그들의 연애를 보면서 불끈 의지를 다지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랑 감정들이 좋다는 것이다.

 

ㅡ 누군가가 내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것, 그 확신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 그가 보여주고 있는 마음이 만져진다는 것. 이걸 뭐라고 하는거지? 사랑의 그립감? (중략) 롱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무슨 상관이야? 마음이, 만져지는데. (61쪽)

ㅡ 어떠한 난기류라도 결국엔 다 지나간다고 분명 그가 말했었다. (105쪽)

ㅡ 나는 지금 본격적으로 용기의 시간으로 간다. (161쪽)

ㅡ 나는 노력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것'은 사랑한다. (287쪽)

 

그런 사랑 감정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지난날을 돌아본다. 나의 지난 연애들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만나게 돼서 행복했었고, 가끔씩 꺼내보면 하이킥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치했다. 그런데 누가 그랬다.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라고. 비록 저자처럼 예쁘게 사랑을 추억하는 일은 못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추억방식이 있는 거니까. 원래 사랑이야기를 보면 '아, 나도 사랑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현재 솔로라면 당연히 이 반응이어야 하고,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아, 남자친구(혹은 여자친구)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내겐 아직, 연애가 필요해>는 '누구는 잘 있나 모르겠네'라며 지난 추억을 뒤적이게 만든다. 유치한 추억이라도 다시 꺼내보며 빙그레 웃게끔 만들어준다.

 

사는 게 바빠서, 아프게 헤어져서, 이미 지나간 연애니까 등등 박스에 넣은 채 그 주위를 박스테이프로 밀봉한 사람들이 아마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렇게 밀봉해 한 켠으로 밀쳐둔 그 박스가 생각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붙여놓은 테이프에 칼집을 내 뚜껑을 열고 오랜만에 '너'를 추억해 보는 일도 생기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기억 속에 저장해 둔 나만의 기억은 언제나 그렇게 편집되는 거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기억 속 너를 꺼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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