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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탐구생활
김현진 지음 / 박하 / 2015년 9월
평점 :
<육체탐구생활>이라는 육감적인 제목을 가지고 이렇게나 단정한 글이 나오기도 힘들 것 같다. 제목만 들어서는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고, 은밀한 일들이 벌어져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단정한 느낌. ㅡ내게 <육체탐구생활>의 첫 느낌은 그랬다.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몸'에 깃들어 있다
작가의 말의 제목이 이렇다. 성공회 신부인 매튜 폭스가 쓴 글이 어느정도 실려있는데, 작가는 이 글을 보면서 '육체'라는 단어를 오래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는, '뱃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도덕적 격분과, 돌이켜보기 싫은 몸의 기억과, 상심했던 시간들과 내가 멸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내 육신이 실은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었음을 나는 아주 늦게 깨달았다. (11쪽)' 라는 자신의 생각이 다다른 깨달음을 이야기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 책은 육체에 대한 그녀의 글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육체로 한정지을 수 없는, 정신과 기억과 추억과 몸에 대한 이야기다. 사전에 나오는 '육체'라는 단어의 뜻에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음에도 책 제목이 퍽 잘 어울리는 것은, 그녀가 책 안에 꾹꾹 눌러담은 이야기들이 다른 의미로는 '육체'라는 단어 속으로 충분히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탐구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를 오래토록 곱씹고 되새기고 생각하고 다시 곱씹어서 그것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하고 나서야 뱉을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탐구하면서 얻은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당신의 경험은 나도 경험해 봤어요. 그러니 당신의 경험이 당신의 것이라고 슬퍼만 하지 말아요. 당신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내는 나같은 사람도 있잖아요' 같은 느낌. 전혀 위로를 전할 것 같지 않은 제목에서 위로를 얻었다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긴 한데,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일은 참 멋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거 좀 웃긴다라는 글들이 나오다가도 그러니 그녀가 책 속에 담은 결코 가볍지 이야기들을 마주 할 때면, 나는 살면서 얼만큼 탐구하고 있나 고민도 하게 되고 말이다. 회사를 다닐 때 괴로움을 느꼈을 때 타인에게 받았던 위로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읽는 이에게도 위로를 전해주는 이런 이야기들은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아가,라고 불러주면 대책없는 안도감이 온돌처럼 포근하게 찾아왔다. 아직 너는 세상에 애송이니까 더 깨지고 울어봐도 된단다, 너는 아직 아가니까 아직 깨질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단다 아가, 뭐 그런 의미들을 나 혼자 멋대로 읽어내다 보면 할머니가 아가, 하고 부를 때 암담해 보이기만 하던 남은 날들이 아주 조금은 희망적으로 보이는 주문에 걸리곤 했다. (62쪽)
"있잖아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경찰관의 얼굴은 매우 곤란해 보였다. 그는 잠시 캄캄한 하늘을 쳐다봤다가 땅바닥을 쳐다보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서툰 손길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그거, 다 젊어서 그런 거예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요?"
"그럼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72-73쪽)
그녀가 적은 단어들 중, 회사를 그만 두고 난 뒤 내뱉은 '낭만적인 낙오자'라는 생각은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낙오자임을 쿨하게 인정하고, 지금 당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느낌을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즐기는 것.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종종 거리며 다른 직장을 찾는 누군가에게는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회사를 퇴사한 슬픔은, 말하자면 이런 거였다. 단순히 직업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절대 견디지 못한다는 증거, 결국 나는 하자 있는 제품이라고 도장 찍혀버렸다는 것,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큰 결함이 있다, 라는 총체적 증명. (51쪽)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경쟁 시대에서, 누군가는 낙오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무실에 들어앉아 있을 때 즐기지 못했던 가을 정취 속을 개를 데리고 천천히 걸으면서, 인정했다. 그렇다 나는 낙오자다, 또한 하자품이다. 그리고 아주 낭만적인 낙오자다. 지금은 이것으로 좋다. (52쪽)
그래도 명색이 <육체탐구생활>인데 육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 나와서는 쓰나. 물론 등장한다. 남자들의 스키니진은 엉뽕 같다면서 여자들의 가슴을 모아주는 보정 속옷과 다를 바 무에 있냐며 스키니진에 대한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 손이 이쁜 여자가 좋다는 말에 손톱을 길러 케어까지 받아봤으나 하는 직업상 손톱이 금방 부러져버려서 하등 소용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저자의 아빠가 만든 채무로 집이 경매로 넘어가 자신들을 쫓아내러 온 용역 깡패의 탄탄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지만 엉뚱한 느낌이 나는 이야기들이 대다수.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잘 생기면 성희롱이 아니고 안 그러면 성희롱이다'라는 글 부분이다. 물론 그 뒤의 해명 글 부분도 재미있었다. 남자들의 밑도끝도 없는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에 관한 글이었는데 여자들이라면 한 번씩은 꼭 공감을 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그에 반해 '격렬한 손길이 애정이라 생각했다'라는 제목을 쓴 글은 책 속에서 가장 슬프게 읽은 부분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냈는데,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맞고 자라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며 상대방에게도 계속 맞을 짓을 하게끔 행동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잘못했을 때엔 엄마한테 꽤나 맞고 자랐는데도 불구, 그녀의 '생각' 자체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진심으로 '애는 때려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말리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어땠길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은 곧 등장했다. 레슬링 기술을 걸리는 건 기본, 연발로 맞기도 했던 것 같다. (무척이나 두루뭉술하게 표기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딸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상상도 안되면서 꽤나 안쓰러웠던 이야기였다.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은 것이 다 그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 '누군가 내 몸을 함부로 해도 그러려니 하는 어떤 체념'의 상태까지 간 것에 대해서는 말이다.
사는 게 강퍅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떠올린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악에 받쳐 잘 살겠다는 것들은 안 이쁘지만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 다음부터 나는 함부로 비둘기 징그럽다 말 안하기로 했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235쪽)
그래서 그럴 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책 속에서 찾았기에 덧붙여본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죽겠다고 약도 털어넣고 팔목에 칼도 가져다 그어본 그 시절의 작가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인 것도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의 이야기들은 웃기는 부분이 있을 지언정 가볍지는 않았다. 가벼울 수 없었다. 그녀는 고된 삶의 육체노동에 자신을 던져보기도 하고, 남들은 다가가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는 농성장들에 다가갔으며, 굉장히 슬픈 죽음에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뭔가를 잃은 기억이 많아지는 거라고 나는 서른도 넘긴 나이에 알게 되는 모양이다. (22쪽)' 어른이 된지 한참인데 아직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야기 하면서도, '꿈을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져 우리는 그냥 이렇게 죽는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면 뭘 못하냐는 식으로 흔히 하는 그 말은, 정말로 죽고 마는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무색하다. (261쪽)' 현실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녀의 글들은 합일점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마음대로 내던져 지는 듯 하다.
그래서 책을 처음 열었을 때의 즐거움보다 책을 닫을 때는 차분함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것들을 사랑하였고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이렇게나 만신창이처럼 보이는가. 그녀의 몸에 깃든 것들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인 듯 하여 안쓰러움도 한켠 마음에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생각은 온전히 그녀의 모든것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해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도 함께 자리잡았다.
가볍지 않다. 가볍지 않은데 글 속의 위트들은 피식 나를 웃게 한다. 참 아이러니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