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석원이라는 사람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노란색의 <보통의 존재>라는 책으로 더 유명한 작가이자 뮤지션이다. 노래보다는 밴드 이름이 더 익숙한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멤버이기도 하고. 글을 주로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던 <보통의 존재>는 굉장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도 내가 산 책 한 권, 선물 받은 한정판 양장본 한 권 총 2권을 갖고 있었더랬다. 물론 같은 책이라 한 권은 다른 이에게 선물했지만 말이다.) <보통의 존재>는 어떤 부연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책이기에 그에 대한 설명은 살짜쿵 패스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석원이라는 작가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리고 나또한 그랬다. 그의 첫 소설집이 그렇게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때도, 또 그의 새로운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출간되었을 때도 말이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보통의 존재>로의 회귀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똑같은 산문집이지만, 그의 글과 생각이 주는 묵직함이 있었던 <보통의 존재>와는 달리 '소설인 듯 소설 아닌 소설 같은 글'이 담겨 있는 것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책이기 때문이다. 산문집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치 1인칭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또 어찌보면 1인칭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중간중간 마음 속 이야기인 양 칠해진 보라색 문장들 때문이다. 보라색으로 칠해진, 색이 다른 글들은 꽤 감성적인 글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의 '남자' 마음이기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 같으면서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가 닿으면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평범하지만 감성적인 글. 예를 들면

 

"난 갈수록 사랑을 모르겠어. 어딘가 고장난 걸까."
"고장 아니야.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게 될 걸." (166쪽)

 

"난 니가 좋은 게 좋아."
"어쩌죠. 저도 당신이 좋은 게 좋은데." (221쪽)

 

이 감성적인 글들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책 속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것. 맞다. 이 산문집 속의 큰 줄기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 남자 이석원과 '그녀' 여자 김정희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는 일종의 사랑이야기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크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부딪혀가며 이야기가 하나씩 전개되고, 그럴 때마다 드러나는 두 남녀 관계의 모호성, 그리고 그 모호성에 대한 해답들은 이 글이 '소설'처럼 느껴지는 큰 이유를 주기도 한다. 전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되어있는 글이고, 그렇기에 편파적으로 한 쪽의 의견밖에는 들을 수 없는 글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외려 자신의 생각을 적는 산문이지만 산문같지 않은 느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홀씨처럼 둥둥 떠다니다
예기치 못한 곳에 떨어져 피어나는 것.
누군가 물을 주면
이윽고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
그렇게 뿌리내려 가는 것.
ㅡ마음(26쪽)

 

1부는 생각지도 않은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김정희'라는 여자와의 만남, 그 하루동안의 이야기다. 소개팅이 잡혔으므로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이것 저것 이야기 하다가 알게된 자신의 이상형이 홑꺼풀의 단발머리라는 이야기부터, 어이없게도 살짝 비켜서 만나게 된 김정희라는 여자와의 만남까지. 그 와중에 '마음'에 대한 이석원의 생각은 참 예쁘다. 예쁘다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마음을 민들레 홀씨에 비유한 이 글은 두고두고 생각날 듯 한 느낌.

 

사근사근한 느낌의 1부가 끝나고 2부로 넘어가면, 갑자기 '불운 올림픽'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혹시나 이 이야기가 앞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꽤 열심히 읽었는데, 다 읽어보니 1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2부가 끝날 때쯤에는 3부와 4부도 이렇게 다른 이야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3,4부는 다시 1부와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2부는 왜 중간에 끼워 넣은 것일까?라는 생각은 책을 읽어본 모든 이들이 할 테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2부가 들어갔는지 이해가 되니 중간에 열내지 말고 책을 마저 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어쨌든, 3부부터 다시 시작되는 남자 이석원과 여자 김정희의 이야기는 1부의 설렘보다는 답답함이 먼저 다가온다. 아무래도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남자의 1인칭 시점으로 쓰인 글이니 여자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고, 그저 남자에게 대하는 그녀의 태도만 단편적으로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일반적이지 않은 희한한 만남을 이어나갔고, 그것은 독자에게도 그리고 이 일반적이지 않은 만남을 쿨하게 인정한 남자에게도 답답할 뿐이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남자는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게 한 번 뿐이기 때문. 사랑도 고통도 하늘도 꿈도 바람도. (192쪽) 이런 말을 되새기며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 뿐.

 

자신이 이야기한 대로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만 가'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있는 것이던가. 마음을 주지 않으려 해도 이미 마음을 줘 버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홀로 기억할 때 그 순간은 나만의 것이 된다. (138쪽)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순간을 혼자 기억하거나 바라고 또 바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338쪽) 포기하지 않는 것 정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책 제목은 남자가 여자에게서 들었던 말들 중 가장 좋아하는 '뭐해요?'라는 단어를 이야기한다. 이 단어가 문자로 도착하면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언제 들어도 설렜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각해본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란, 누구에게나 주관적인 것인데 왜 이렇게 제목을 지었을까 라고. 누군가에겐 '밥 먹었어요?'라는 스치듯 지나는 안부 인사가 세상 가장 좋은 말 일 수도, '다음에 또 오세요'라는 흔한 배웅말이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일 수 있는데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책 제목은 단순하게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었던 '뭐해요?'의 그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잘 가. 언제 들어도 슬픈 말. (297쪽) 언제 들어도 슬픈 말 쪽을 적어 놓았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가장 현실스러운 이별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책은, 인생을 살아내느냐 아니면 견디느냐에 관한 문제. (339쪽) 라면서 결론적으로 그녀와의 이별에 힘들어하는 본인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는 듯 끝을 맺으려던 맨 마지막,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열린 결말을 두고 마무리가 된다. 에필로그식으로 쓰여진 'au revoir', 프랑스어로 '또 봐요'라는 뜻처럼 말이다.

 

가볍게 읽었으면 좋겠다라며 작가의 말을 써 놓은 그의 글을 보며, 가볍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금방 읽었으며 그리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어도 됐었다는 말도 함께. 하지만 가끔씩 쿵하고 박히는 글들은 이번에도 참 좋았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아마도 다음 이석원의 글 또한 나는 읽어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책을 덮는다. 'au revoir'를 외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