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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 : 점에서 점으로
쉬빙 지음 / 헤이북스 / 2015년 8월
평점 :
설마 글자가 단 한글자도 없을까 했다. 에이, 책인데? 그것도 소설인데? 어디라도 한 글자- 하다못해 어떤 글자라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글자가 하나도 없는 책'이라는 홍보영상을 봤지만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진짜로 글자는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단 한 글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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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자체가 너무 파격적이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출판사의 대표님이 이 책을 내려고 할 때 주위에서 뜯어 말렸다는 이야기를 직접 하실까. 시기상조였다는 이야기가 왜인지 와 닿는 건 이 책이 많이 낯설어서일테다. 소설책인데 글자가 없는 소설을 본 적이 있는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 그런 책을 보게 됐다.
처음엔 낯설었는데 자꾸 보니 작가의 생각이 참 신선했다. '번역'이 필요없는 소설책이라는 발상,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각자의 언어로 된 문학은 다른 나라에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번역이 필요하다. 소개 될 나라에 같은 의미의 단어가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작가가 의도한 그대로의 똑같은 단어' 혹은 '작가가 의도한 중의적인 문장' 등을 표현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해외의 출판물들은 어쩔 수 없이 번역가의 의도가 포함될 수 밖에 없고, 번역가들은 그것들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지서>는 그런 불필요한 작업들이 필요없다.
이 책을 쓴 작가는 중국의 쉬빙이라는 작가이다. 나는 <지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에는 그 흔한 '작가소개'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그가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됐을까. '이미지'만으로 소설을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생각. 해외여행 할 때 언어가 가장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만국 공통어인 '바디랭귀지'만 있다면 그다지 문제가 될 일이 없다고 들었다. <지서>는 그런 '바디랭귀지'와 다를 바가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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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친절하게 가이드북도 동봉해뒀지만, 사실 가이드북을 볼 필요도 없다. 그저 이 책을 보고 '자신만의 해석'을 하면 그 뿐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문학적인 장치들이 없다. 오히려 '내가 문학적인 장치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지서>를 보면서 창의적이라는 이야기는 이래서 하는 것이다. 그저 그림 이미지만을 보고 주인공의 하루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깐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미스터 블랙이라 작가가 칭한 이 남자사람의 24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일, 그리고 잠자면서 일어나는 일까지.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은 이미지들에서 읽는 이들에게 '친근함'을 전하고 있다. 미스터 블랙이 혹시 나인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이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그림들만 있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해석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그림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작가가 꽤나 열심히 이미지들을 모아서 사용한 탓에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처음만 시간이 걸릴 뿐, 점점 이미지에 익숙해질 수록 앞에서 봤던 이미지가 점층될 수록 이야기를 이해하는 속도는 빨라진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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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 다음에 '점에서 점으로' 라는 제목이 붙는데, 그 이유는 시작과 끝이 점으로 끝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미스터 블랙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고, 이야기가 끝날 때도 하나의 점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볼 때 제목이 참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건데, 우리 인간들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고나 할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않냐는 물음도 던지는 것 같다.
말이 없으니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어지고, 거기에 자꾸 내 생각을 덧씌우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책을 덮을 즈음에는 꽤 즐거운 작업(?)이 되었다. 뭐랄까. 내가 작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달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미스터 블랙의 오후 2시의 풍경이다. 내가 읽은 바로는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니 3시부터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사장님(혹은 부장님)의 메일이 와 있는 걸 발견한 미스터 블랙이 열심히 일을 하는 사이에 스팸전화가 왔다. 자꾸 전화가 와서 욕을 한바가지 하고 끊으려는 찰라 들리는 엄마 목소리- 할 일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엄마의 '결혼하라'는 잔소리는 쏟아진다. 낼모레 30인데 왜 여자를 만나지 않느냐며, 28살은 30살이나 같은거라며 시간이 없는데 자꾸 잔소리를 해서 알았다고 여자친구를 찾아보겠다고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통화로 시간을 허비해서 15분밖에 안남았다!!!!'는 내용이었다. 좀 더 재미있게 구상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이 페이지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해지는데-
얼마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줄거리는 이런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사람에게 보여줘도, 멕시코 사람에게 보여줘도, 인도 사람에게 보여줘도. (인도에도 스팸이 있을까 싶다만..;;) 사람 군상이 모두에게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건 이런 걸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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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경험해 본 <지서>가 굉장히 색다르게 다가오지 않나? 나는 이 책이 참 매력적이다. 어쩌면 작가 공부를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려는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려울 것 같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책. 번역 없이도 전세계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 책을 읽다보면 국제적인 브랜드들이 등장하는데, 그 브랜드들을 보면서 좀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책. 무엇보다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책. 살을 덧붙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땐 줄거리로 한 번 쭉 훑고, 다음번엔 살을 여기 저기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다.
글자가 없는 소설책이 또 나왔으면 하는 바람은 조금 무리수일까? 생각하며 혼자 살을 붙여보고 킥킥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