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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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연속성, 거대한 틀을 이루는 서사. 일반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하나의 이야기를 누구의 시점이든지간에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내 생각일 뿐 꼭 그래야만 한다는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펼쳐지면 그만큼 읽는 이가 주인공에게 쉽게 이입해서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도 하고,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며 그들 나름대로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그래도 역시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열린 결말이든 정해진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이든 간에 하나의 결말을 향해서. 하지만 여기,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중이라 생각하기 힘든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야기를 이루는 서사가 뒤엉켜 있다고 해도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여러 소설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고 딱히 다를 것은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 (고등학교 시절의 풋풋함과 현재에 다시 만난 2가지의 사랑), 남자주인공이 살인을 하게 되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 여자주인공의 컴플렉스가 되어버린 가정환경 이야기와 이름이 같은 친구에 대한 이야기, 남자주인공이 고등학교 때 죽인 영훈이란 아이의 엄마가 남자주인공에게 보이는 집착 이야기까지. 늘어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도 극히 간소하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순서의 의문.

 

책을 읽기 전에 작두 같은 걸로 제본된 부분을 잘라내는 거야. 그러면 책이 종이 수백 장으로 흩어지겠지? 그 종이를 화투 섞듯이 섞은 다음에, 아무렇게나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중략)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순서로는 못 읽는 건가? 맨 처음에도? 여자가 물었다.

'제대로 된 순서'라는 거 자체가 없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사실 페이지는 늘 섞이고 있어. 책의 분량이 무한한 건 아니지만, 그 책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독서를 할 수 있는 거지. (18쪽)

 

책의 처음을 읽어나갈 땐 위의 대화를 보고 '왜 이렇게 책을 읽어야 하는데?'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보니, <그믐>이 '그런' 책이었다는 걸 작가가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진행된다. 동시에 진행되다가도 다시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기도 현재의 또 다른 시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야기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이라 어느 부분부터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앞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행동들은 뒤에서 설명이 되기도 하고, 뒤에서 설명이 되었기 때문에 앞의 내용이 처음과는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한 번 읽었다고 책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디든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이야기가 새로 만들어졌다.

 

비유하자면 아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과 비슷해. 이미 내용은 다 알고, 그걸 바꿀 수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매번 읽을 때마다, 중요한 대목에서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잖아. 주인공이 나중에 행복해진다는 걸 알아도 슬퍼질 수도 있고, 사건 진행 속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지.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17쪽)

 

이상하게도 봤던 부분이 새롭게 느껴진다. 남자주인공이 언뜻 의미없이 던진 말이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읽어보면 다 뜻이 있었던 부분인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가 없었으며, 기승전결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기승전결을 만들어보려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든 읽고 싶은 부분만 다시 읽으면서 책을 다시 읽어내고 있는 나에겐 처음과는 또 다른 기억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도 아마 이 책과 같지 않을까 싶다. 제목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의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만, 누구의 기억은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만 하는 것이, 어느 한 부분이 크게 부각되어 남아 있는 것이, 똑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그를 대변한다. 통째로 펼쳐진 시간을 어떻게 조립하고 채워나가는지는 각자의 선택 몫.

 

기억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없는데도 그 상황들을 반복하는 남자주인공의 상황은, 시작과 끝이 필요없는 상태. 아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자의 모든 상황을 꼬기 위해 살고 있는 아주머니의 상황은, 시작도 끝도 의미없는 이미 끝. 남자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와의 시간들을 사랑하는 여자 보람의 상황은 현재. 그래서 이야기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달려가고 있다.

 

시작이 없이는 끝도 없다. 시작과 끝이 필요없는 평행인 상태인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음에도 외로워보였고, 늘 끝이었던 아주머니의 광기는 이상하게 발현되었다. 하지만 끝이었던 아주머니는 새로운 시작을 생각했고, 남자는 죽음과 동시에 끝을 마주하고 다시 시공간연속체 속으로 돌아갔다. 어떤 것을 시작으로 정할지는 또 자신의 선택이겠지만, 또 다른 시작을 위해서라도 시작과 끝은 필요한 것 같다. 그 안의 내용들이 어떻게 뒤섞이든지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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