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잘 먹는 것 - 삼시 세끼 속에 숨겨진 맛을 이야기하다
히라마츠 요코 지음, 이은정 옮김 / 글담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먹방부터 시작해 쿡방으로 이어지고 있는 요즘, TV를 틀면 요리하는 남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전문 셰프들'은 물론 '그냥 남자 사람들'도 말이다.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의 줄임말 요섹남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남자가 요리하는 것이 더이상 이상한 시대가 아니게 됐고, 오히려 남자가 요리하는 것을 부추기는 시대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내가 살아왔던 그 수 많은 날들 중에서 '요리'에 이렇게나 열광했던 적이 또 언제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먹는 것에 열광하고 있다. 하루 세끼 챙겨먹기 귀찮아 하고 어떻게 하면 밥 먹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한 끼를 잘 챙겨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단 얘기다. 한 때 유행으로 지나갈지 아니면 이 트렌드가 한동안 계속될지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이 먹을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 트렌드에 따라 요리에세이도 많이 등장했다. 현재 방송을 타면서 유명했던, 혹은 유명해진 셰프들이 쓴 에세이들이 말이다. 예전에 냈던 책들도 다시금 출판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미각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이 책도 그런 류가 아닐까 했다. 일본에서 유명한 푸드 저널리스트라고 했고, 트렌드에 맞춘 요리 에세이니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를 읽자마자 그런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갔다. 이건 어디선가 봤던 그런 에세이가 아니었다. 섬세하면서도 특별하고 독특한 에세이였다.

 

세상에! 손가락이 또 하나의 미각이라니! 잊고 있었다. 고소한 동태전을 집어 든 것도, 부드러운 생크림 케이크의 크림을 콕 찍어든 것도 손가락이었다.

추천의 글_박미향 (한겨레신문 맛 전문 기자)

 

책의 맨 첫 에피소드. 그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에피소드는 책을 읽고 있는 이가 자신의 무릎을 탁! 치게끔 만든다. 박미향 기자가 이야기 한대로 '손가락'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촉감, 그것이 또 하나의 미각이 아닐까 생각한다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인도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느꼈던 그 생소하면서도 즐거운 느낌, 복숭아 껍질을 벗길 때 느껴지는 느낌. 살면서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생각해본다면 아마 없다는 결론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사용한다. 하지만 손가락 너머에서 느껴지는 촉각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 작은 차이를 발견해 내고 이야기해준다.

 

 

 

 

슬쩍 집어 먹는 건 손가락만 할 수 있다. 젓가락 같은 걸 쓰면 흥이 깨진다. 아무도 몰래 살짝 맛을 볼 수 있다.

까칠까칠, 매끌매끌, 촉촉, 서늘서늘, 미끌미끌. 손가락이라는 또 하나의 혀를 업신여길 수 없는 게 이 때문이다. (p. 18 :손가락)


 

돌은 대단하다. 돌이 아니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맛이 있따. 아니, 맛만이 아니다.

돌이 아니면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모습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분명 돌이 태고의 기억을 전해 주기 떄문일 것이다.

거칠하고 미끄럽고 차갑고 딱딱하게 닫힌 이 유기물 덩어리에는 분명히 지구의 1분 1초가 퇴적되어 있다.

주방에서 갑자기 돌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의 세월을 생각한다. (p. 252 :돌)

 

 

 

 

 

묵묵히 먹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 말 없이 먹는다.

맛있다, 맛없다, 조금 간이 덜 된 게 좋다, 시치미가 있으면 좋겠다,

너무 오래 조리한 거 아니냐 같은 말은 절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묵묵히 젓가락만 움직인다. 그러면 온몸에 만족감이 퍼지면서 안정을 느낀다.

식은 밥은 그런 것이다. (p. 76 :밥)


 

밥은 식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저금이 줄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고마움을 알 듯,

무겁고 차가운 밥에는 씹으면 씹을수록 올라오는 듬직한 단맛이 난다.

밥이 식으면 쌀알 속에 숨어있는 무언가가 스멀스멀 정체를 드러낸다. (p. 77 :밥)

 

 

 

 

 

책을 일고 있노라면 금방 산 빵과 바싹 말린 양파의 맛이 떠오른다.

몇 십권, 몇 백권의 책이 가슴 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맛과 냄새가 쌓여간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면 그 맛과 냄새는 어느새 확실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이미 먹은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참으로 제멋대로고 묘하고 이상하다. (p. 57 :책)


 

어둠이 천천히, 천천히 녹아간다.

아무리 바쁜 순간이라도 촛불의 불빛을 보고 있노라면 거친 파도와 같은 일상이 순식간에 잦아든다.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 덤으로 열어 놓은 창문으로 여름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 발은 공중에 뜨고 혼은 두둥실 떠다닌다. (p.282 :촛불)


 

책에 등장하는 것들은 뭔가 대단한 요리나 레시피가 아니다. 식탁에서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소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을 빛내는 데 쓰이는 재료들과 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그릇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이런 게 요리 에세이야? 생각할 만큼 제목들 옆에 적힌 '소재'들을 보면 요리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작가는 요리가 아닌 주변으로 물러나 있는 것들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의미들은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것들이거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있고, 에세이라는 것이 원래 작가의 취향이 반영되는 거라지만, 그렇다기엔 작가의 취향이 나와 너무도 잘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자이기에 엄마로서 살아왔고, 그래서 주방에 있는 게 익숙하다. 그 오랜 시간동안 (딸아이의 도시락을 18년간 쌌다는 대목을 보건대 작가는 꽤 나이가 있는 듯 하다) 주방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껴왔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을 땐 자연히 여러 이야기들이 잘 섞여서 등장한다. 엄마의 시선처럼 따뜻하고 여자의 섬세함, 소녀의 섬세함까지 갖출 수 밖에 없는 '나만의 공간' 주방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들. 자신이 애정을 갖고 있는 것들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진다.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라면 몇 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겠다 생각할 만큼.


<냉장고를 부탁해>의 털그래로 활약중인 박준우 기자는 추천의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는 '먹방'과 시청률을 위하여 만들어진 '쿡방'에 정신을 놓고 있을 때, 그녀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일상의 순간들을 찾아낸다. 달콤한 꿀이 가득 차 있는 과일의 껍질을 잡아당기는 손가락, 홍차에 레몬을 담그는 단 2초의 순간, 그리고 벗기지 않은 껍질 아래 씹히는 연근에서 스며 나오는 맛처럼 말이다." 라고 말이다. 이 책은 일상에서 잊고 있었던 순간들을 기분좋게 다시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박준우 기자가 말한 문장이지만 너무 좋아 내가 다시 쓴다)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공감이 가득하고, 더불어 읽는 내내 맛있음이 솟구치는 이 에세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잠시의 편안함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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