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0엔 보관가게
오야마 준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른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하다. 물론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 어른들도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너무나 울림이 커서 너무나 좋아서 크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 법- 그래서 나는 정적이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보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흔히 '막장'이라고 이야기하는 요소들도 나오지 않고, 독특하지만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뭐랄까,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드라마로 예를 들자면, (한국 드라마는 특성상 에피소드 형식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없어 선뜻 비교를 하기 힘들지만)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 정도. 느낌이 확 오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위해서 주인은 여기에서 기다립니다. 보관가게는 기다림이 일이니까요.
분명 이곳은 모두가 돌아올 장소입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장소입니다. (p.55)


<심야식당>과 <하루 100엔 보관가게>는 비슷한 점이 꽤 있다. 일단 꽤 오랜 시간동안 가게가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는 특징이 있고,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것도 닮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 <심야식당>의 주인인 마스터는 요리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하루 100엔 보관가게>의 주인 기리시마는 물건을 맡기는 사람의 '사연을 들어줌'으로써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둘의 다른 점은 '마스터'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 '기리시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아, <하루 100엔 보관가게>가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하지 않았구나. 포렴(일종의 걸어둘 수 있는 천막)에 '사토(설탕)'이라고 적혀 있는 것만이 유일하게 표식인 간판도 없는 가게다. 어떤 물건이든 이 곳에 맡길 수 있다. 주인에게 맡길 때 보관료는 100엔. 아무리 값비싼 물건이라도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보관료는 100엔만 받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주인 기리시마는 손님의 목소리를 기억해뒀다 그 사람이 맡긴 물건을 찾아다 주곤 한다. 왜 기리시마의 눈이 멀었는지 비극적인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이는 사실 소설의 내용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기리시마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보관가게를 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5개가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들은 느슨하면서도 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옴니버스 식이라고 해야 맞는 것 같다. 앞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뒷쪽의 이야기에 잠깐 나오기도 하고, 그 사람이 맡긴 물건만 등장하기도 한다.  책의 시작은 기리시마가 왜 '보관가게'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각 이야기들을 설명하는 화자는 보관가게에 있는 '사물'들이다. 때론 맡겨지러 오는 '사물'이 화자이기도 하다. 사물이 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물건을 맡기는 사람의 생각이나 주인의 세세한 행동패턴까지는 알 수 없다. 사물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옮겨주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주 한정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껄끄러운 면이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레짐작하는 사물들의 생각이 참으로 순수하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직접 듣지 않아도 어찌되었든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들에서 추론할 수 있으므로 불편한 것도 없다.


늘 동경만 했던 달린다는 일. 그게 이루어졌다. 아스팔트가 기분 좋다. 돌아가는 바퀴가 기분 좋다. 바람을 느낀다. 바람은 물색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다. 나도 물색이다. 나와 바람은 하나가 된다. 달리는 건 짱이야. 이건 상상 이상이다. 아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빛나고 있다. 지금까지 인생 중에서 가장 빛나고 있다. (p. 69)


<하루 100엔 보관가게>를 쓴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물을 통해서 비춰지는 이야기들이 상세하면서도 눈앞에 바로 그려질 수 있듯이 서술한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다른 점은 좀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인데,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감각이 참 잘 섞여서 예쁘게 다가온 단락이 바로 위의 단락이다. 이야기의 화자였던 '자전거'가 길을 달리면서 느꼈던 기분을 서술했던 부분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해지는 느낌. 바람이 물색이라니, 굉장히 예쁘지 않은가.


책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책 <어린왕자>가 있는데, 여러가지 의미로 꽤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어린왕자의 해석은 퍽이나도 예뻐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옮겨본다.


소설 속에서 어린왕자는 여우로부터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배웠다.
보관가게의 주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소중한 것만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마음의 눈을 갖고 싶다. (p. 186)


참 독특한 이야기였다. 수수께끼 풀이 같은 단어와 알쏭달쏭한 표현, 마법 같은 혼잣말.

어른의 마음과 어린이의 마음이 교차했고, 그러면서도 일정한 질서 혹은 음악 같은 리듬이 있는 문장이었다. (p. 226)


몇 개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속에서 보관가게의 주인 기리시마는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들도 함께 나이가 들었다. 여전히 문을 열고 보관하러 오는 이를 기다리는 일을 하는 기리시마지만 말이다. 아래는 그가 '어쩌다 보관하게 된' 고양이가 책의 마지막에 뱉은 이야기다.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 생물조차 편안한 곳이라면, 여전히 이 시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장을 덮으며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인지 기리시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주인이 있는 세계에 와보니 이곳은 실제 세계보다 조금 더 아름다웠다.
매우 평화롭다. 주인도 행복하다는 걸 알고 나는 안심했다.
여기에서 기다린다. 나도 주인도 기다린다.
기적을 기다린다.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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