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리뷰에 종종 <빨간 책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요즘엔 내 폰에서 팟캐스트를 지워버려서 가끔씩 몰아서 찾아듣는 편이지만, 예전에는 꽤나 열성적으로 들었었다. 이동진과 김중혁을 더 잘 알게 된 프로그램이자 책과 관련된 토론이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구나를 알게 해 준 프로그램. 퀄리티나 기타 다양한 면에서 다른 팟캐스트들과는 다르게 '전문성'까지 느껴졌던 <빨간 책방>을 더더욱 빛내준 건 아무래도 허은실 작가의 오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익숙한 시그널이 들리고 들려오는 동진님의 목소리. 그가 읽어내려가는 원고 속에서 사람살이의 고단함도 느끼고,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사색의 어느 한 켠도 느낀다. 거듭한 리뉴얼에도 불구하고 허은실 작가의 오프닝만은 매주 들려주는 이유,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을테다.

 


솔직히 말하자면, 허은실이라는 이름은 <빨간 책방>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그 전까지 읽어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작가에 대해 아는 거라곤 <빨간 책방>의 오프닝 원고를 쓰는 사람이라고밖에 정보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쓴 글에서 느껴지는 생각, 감정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내가 가늠하기에 그녀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사소한 것들에 시선을 두고 지켜보며 머물다가 또 다른 시선과 연결 시키는, 생각이 많고 조금은 느린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쓰는 글은 상상 이상으로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2페이지 남짓한 길지 않은 그 분량에서 그녀의 감성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창조, 창작의 '창(創)'자에는 '만들다, 비롯되다'란 뜻만이 아니라 '다치다, 상처 입다, 슬프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한 글자가 품은 두 가지 의미, 그저 우연이기만 할까요. 왜 우리는 아픔 속에서 울면서 태어나는 걸까요. 어째서 슬픔은 기쁨보다 감염되기 쉬운 걸까요. (92. 상처에서 비롯하다)

 


손쉽게 검색하는 게 아니라 어렵게 사색하고 힘겹게 모색하는 과정. 나만의 고유한 정의를 내린다는 건 사실 그런 치열함을 요구하지요. 하지만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라야 곁을 내주지 않던가요. (296.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재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엮어서 다듬는 것도 중요하다. 이의 극치는 "오늘 내가 지은 것은"이라는 글에서 최고조로 느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다른 모든 글들보다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심지어 마음도 짓는데,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미소를 짓게 했었나 생각해 본다는 그런 내용. (이건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찾아서 보는 게 더 나을 듯 싶다) 설명은 생략한다. 그냥 읽어보면 왜 좋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책이 좋아서 듣기 시작한 팟캐스트였고, 거기서 주옥같은 글들을 만났다. 어느날은 그곳에 나온 글이 너무 좋아 아이패드 메모속에 받아적기도 했었더랬다. 그 글들이 한데 엮어 나왔으니 이 얼마나 좋은 책인가. 나도 이동진이 된 것마냥 소리내어 읽어본다.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을수록 안타깝고, 다 읽은 후엔 내가 좋아하는 챕터들을 한 번 더 소리내어 읽어봤다. 이 글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세심하게 읽히기를 기다리는 한 권의 책입니다.
(227. 난독증의 시대에)

 


이동진이 읽어주는 오프닝보다 내가 직접 읽는 오프닝이 훨씬 매력적이다. 온통 마음에 드는 문장 투성이라, 곁에 두고 자꾸 읽고 싶어지는 묘한 책이기도 하다. 시적인 오프닝,이라는 말로도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그녀의 오프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그래서 더 좋은 것 같다.

 

오늘 리뷰의 끝은 아직 설날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새해와 시작과 관련된 글로 마무리한다.

"새해엔 당신에게 근사한 이야기가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시적(詩的)인 순간들을 더 많이 경험하길 빌어봅니다. 훗날 당신이라는 책을 들춰볼 때 밑줄 그을 수 있는 날들이 많은 그런 해였으면 합니다." (160.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