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여신 백파선
이경희 지음 / 문이당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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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영 중인 <불의 여신 정이>의 원작인 줄 알고 선택한 책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모티브로 삼고 있는 "조선 최초의 여자 사기장 백파선"이란 인물은 같으나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처음 생각과는 많이 다른 책이었지만, 호기심은 여전했다. 임진왜란 이후로 일본으로 끌려간 도기장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그랬고, 남편이 죽은 뒤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놓인 한 여성의 결단과 사랑 이야기라는 점도 그랬다.  

 

책 에는 두 명의 여자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시아버지의 제안으로 백파선의 그룻을 찾아 나서는 나'의 현재 시점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일본 아리타에서 생활하는 백파선의 과거 시점 이야기이다. 두 여자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로 맞닿는다. 양 끝에 있는 점이 가운데로 와서 만나듯이. 과거의 시간에서 끝난 이야기를 현실에서 마주 대했을 때의 그 느낌이란. 책의 시작은 백파선의 그릇을 찾으러 일본으로 떠나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현재와 과거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글씨체를 사용했다.) 고딕체로 쓰여진 '나'라는 현재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다 합쳐봐야 스무 장 정도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 짓는데 꽤 중요한 요소를 감당하고 있고, 결국에는 백파선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까지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에 꼭 필요했다고 본다. 조금은 아리송한 시작이었지만 끝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책 속에서 그려지는 도공들의 이야기는 가히 안타깝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동안 벌였던 바다와의 사투도 그러했고, 일본에 정착하게 되고 나서도 영주로부터 핍박받는 모습이 그러했고, 무엇 하나 마음대로 마음껏 할 수 없는 처지 또한 그러했다. 시게마사 영주는 만들어내는 도자기들마다 세를 매겨 자신들에게 이익이 많이 떨어지게끔 만들었다. 도공들은 그저 자신들의 세를 넓혀주는 하나의 도구쯤으로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아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가 조선 도공들의 처지였다. 적어도 조선에 있었더라면 그런 대우는 받지 않았을테지만, 일본에 따라가지 않는다면 모두 다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협박에 파선의 남편인 상근도 어찌할 수 없이 따라나선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공들은 도자기를 만든다. 도자기를 만들다 보면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생각하면서.


병 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 상근을 대신해 가마를 이끄는 대장 역할을 하게 된 파선에게 다가온 이는 다다오였다. 시게마사 영주의 오른팔 사무라이 다다오. 늘 차갑고 무섭기만 하던 그였지만 자신의 이야기도 하고 파선을 지켜주기도 하면서 둘은 서서히 감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다다오와 드러내놓고 사랑을 할 수 없어 파선은 자신의 마음을 그릇으로 만들어 전달했다. 이 그릇을 자신이라 생각해 달라고. 생각해보면 아주 강렬했던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다오는 어디서든 파선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파선이 있는 곳엔 소리없이 나타나곤 했지만 섣불리 다가가지는 않았으며, 파선 역시 다다오에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말이다. 강렬한 것은 없었지만 서로에게 스며든 사랑. 결국엔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조선 도공들의 애환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피어난 사랑을 보면서 애틋하기도 했다. 초라한 비석만이 조선 도공들이 존재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지만, 파선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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