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숨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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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무거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안정적인 가정생활, 완벽한 커리어를 가진 여자 무용수가 안무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고 책소개를 내마음대로 각색해 대충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가볍게 책을 펼쳤지만, 책 한 권을 모두 읽는데는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불온한 숨>은 앞에서부터 글을 이끌어가는 여자 주인공 제인과 6장과 7장에서 비밀을 1인칭 시점으로 풀이하는 남자 주인공 텐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맥스와 마리에 관한 이야기다. 텐의 시점에서 그동안의 사건들을 정리하기 전까지,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혼란스러운 제인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무언가가 콱 막힌 듯 개운하지 않았다. 제인은 겉으로는 완벽했지만 속은 곪을대로 곪아 무너지기 직전의 사람이었으니까. "이 보잘것없는 밀실에 몸을 밀어넣을 때에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하루 종일 억눌렸던 감각들이 깨어나는 듯했다. 피부로 숨을 쉬는 양서류들처럼 나는 온종잉 햇빛 아래 피부가 바짝 말라 숨을 쉬지 못하다가 어두운 저수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느낌이었다. 쩍쩍 갈라지던 피부가 미지근한 물에 젖으며 다시 미끈거리기 시작했다.(31쪽)" 집에서조차 아무도 들이지 않는 밀실같은 방 한 칸에서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숨을 쉬는 공간이기도 했다. 

제인의 삶은 '떠밀림'과 '발버둥'의 연속이었다. 한국의 보육원에서 영국 여자에게 선택되어 싱가포르로 오게 된 후, 그녀의 죽은 딸 '제인'과 똑같은 삶을 강요받았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제인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정석대로의 춤을 완벽히 춰 내는 촉망받는 발레리나였으나, 그녀는 속으로 항상 불안했다. 백조의 발버둥처럼 그녀는 최고의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쳤다. 그러다 제인은 맥스의 춤을 보게 됐다. "맥스의 동작들은 기괴해 보였다. 이제껏 내가 익혀왔던 규칙과 규율들로부터 조금씩 비켜나가고 있는 동작들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그의 동작들이 나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나는 그의 기묘한 춤에 이끌려 그의 손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91쪽)" 규율과 규칙으로 얽매여있던 제인에게 맥스는 신선한 바람 혹은 동경으로 다가왔다.

제인과 맥스의 강사였던 마리는 맥스의 자유분방함을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숲에서 자유의 춤을 추었다. 그리고 몰래 숨어 그들을 지켜보던 제인이 그 춤에 합류하게 됐다. 셋 만의 비밀이었던 춤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고,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제인은 거짓말을 했고, 사건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스포가 될 수 있으니 많이 생략한다.) 되돌아보면 결국 제인에게는 자신의 답답함을 알아주는 맥스와 마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삶의 유일한 숨 쉴 구멍이었을 지도 모른다. "너는 늘 완벽에 가깝게 춤을 추고 있었지만 누군가 뜬 주물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지. 나는 이상하게도 너의 숨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어. 너는 숨을 쉬고 싶었을 거야. 너를 결박하고 있는 주물 같은 몸을 깨고 나와 너만의 춤을 추고 싶었을 거야. (139쪽)" 이렇게나 자신을 꿰뚫어보고 같이 호흡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룬 것을 놓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로 상황을 외면한다. 그리고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제인은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안무가 텐을 만나게 되지만,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그렇게나 숨기고 싶어했던 일을 헤집는다. 손등부터 이어지는 기다란 흉터도 그렇고, 숨기고픈 과거를 마음대로 꺼내놓는 것도 그렇고, 텐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감지하지만 커리어 때문에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소설 <불온한 숨>은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해야만 했던 제인이 숨을 내쉬던 것이 '불온하다' 규정했다. 그리고 그 불온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제인은 선택을 했다. 자신을 잃어버렸던 제인이 겨우 불온한 숨을 내쉬며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으려 했지만, 숨을 내쉰다는 것을 세상에 들키자마자 제인은 다시는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불온한 숨>은 처음부터 제인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싱가포르의 강을 묘사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강의 모습이 제인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강물은 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강은 사실 맑지 않다. 낮에 내려다본 강물은 녹이 슨 수만 개의 그릇을 씻어낸 뒤인 것처럼 싯누렇다. (중략) 바닷물은 끝없이 강물 속을 헤집으며 진한 모래를 게워낸다. 그래서 강은 맑아질 틈이 없다. 해가 떠오르면 밤새 도시의 불빛 아래 맑아 보이던 강물은 다시금 퇴색될 것이다.(8~9쪽)" 그래서 제인은 불온하지 않은 숨도 채 내뱉지 못한 채, 강물의 본모습을 들킬까 두려운 것처럼 굴었다. 자신은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겠니? 어둠 속에서 추는 춤만이 진정한 춤이라는 걸. 그런 춤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런 춤을 춰야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는 걸.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마. 오직 너의 춤을 춰, 제인. (153쪽)"
"그녀는 내 몸을 결박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나를 결박하고 있는 올가미로부터 나를 풀어주려 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나를 결박하고 있는 로프를 풀어내지 못했다. 좀 더 사력을 다해 어둠을 향해 뛰어들지 못했다. 그러다 끝내 삶도 죽음도 아닌 곳에 떨어졌다. 나는 죽음으로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저 먼지만 자욱이 쌓여 있는 무대 위에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군가의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154쪽)"

그러나 <불온한 숨>은 열린 결말이다. 앞으로 제인이 어떤 선택을 해 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는 제인이 자신을 되찾는 노력을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는 채로 사느니, 어쩌면 죽게 되더라도 조금 더 생기있게 날아올라 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 숲에서의 춤이 불온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미스터리하지만 슬프고, 꽤나 답답하지만 처연한 제인의 삶을 속으로 응원해본다. 당신은 이제라도 다시 걸어갈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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