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나이는 7살이다. 오늘 처음으로 운동화를 샀다. 결론적으로 아들은 운동화를 사 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내 새 운동화를 신고 있다. 문제는 이 운동화가 내 아들 최초의 새 운동화라는 점이고, 그 아이의 나이가 다름 아닌 7살이라는 점이다.
7살이 되도록 새 운동화를 한 번도 사 주지 못 할만큼 형편이 나쁜 건 아니나 누나들이 신던 운동화를 별 말 없이 잘 신기도 했고, 때마침 운동화를 물려주던 동네 형도 있어서 그렇게 됐다. 아들은 운동화를 사 오는 내내 날라서 왔다. 늘 웃는 얼굴이지만 유난히 밝은 미소로 뛰며 날며 집에 와서 누나에게 새로 산 신을 마음껏 자랑했다.
"이제 그만 벗어둬."라는 말에
"내가 너무 좋아서 그래요."란다.
더이상 벗으라는 말은 못 한다. 어찌 더 할 수 있겠는가. 저 아이는 지금 '난생처음'을 경험하는 중인데 -
난 본래 궁핍하게 자랐다. 내 집에는 생존을 위한 최소의 것만 있었다. 방도 하나뿐이었고, 책은 교과서뿐이었다. 옷도 계절별로 한 벌 뿐이어서 교복 자율화 시대에도 나는 나만의 지정 교복을 입어야 했다.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우리 집엔 성한 우산이 없었다. 비가 올 걸 뻔히 아는 날마저도 우산을 집에 두고 갔다. 차라리 못 가져 왔다고 하는 것이 찢어지고, 살이 부서진 우산을 드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졌으므로 그랬다. 난 나의 궁핍이 싫었는데 정말 싫었던 건 궁핍을 이겨내지 못하는 내 초라한 자아였다. 그때 누군가가 핑계가 아닌 진실로 가난을 이길 힘을 내게 가르쳐주었다면 나는 한 벌뿐인 내 옷을, 살이 부러진 내 우산을, 김치뿐이던 내 도시락 반찬을 그렇게 부끄럽게 만들진 않았을 것인데- 난 내 궁핍이 부끄러웠고, 궁핍을 부끄러워하는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아이들을 결핍으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살이 부서졌어도 비를 피하게 할 수만 있다면 우산으로써 충분히 가치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고 요구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다. 멋드러진 무엇을 통해 폼내고 싶은 욕구를 접고 궁핍과 결핍의 가치를 숭고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모리 교수의 말처럼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는 삶을 가르칠 수 있다면 더 좋은 것 먹이고, 더 좋은 교육시키고, 더 좋은 옷 입히고 싶은 마음을 날마다 힘써 거부해 보리라.
변변한 장난감이 없어서 달력 종이로 온갖 것을 만들며 자란 아이들이 부디 가난 속에서도 충분히 당당한 삶을 살며, 가난을 무능으로 보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이들은 그리스신화 퀴즈 놀이를 하고 있다. 아들이 문제를 내고, 딸이 대답한다. 대단한 실력들이다. 아들은 지금도 운동화를 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