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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평점 :
김은희는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관심이 많은 여중생이다. 친구를 사귀는 데도 서툰 은희에게는 같은 한문학원에 다니는 지숙과 남자친구 지완, 이 두 명만이 친구다. 부모님과 언니 수희, 오빠 대훈으로 이뤄진 집안에서 은희는 관심 밖 대상이다. 이 중 대훈은 아버지에 이어 집안 서열 2위로, 은희에게 폭력을 일삼는다. 이러한 오빠의 폭력은 은희에게 무력감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김영지라는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한다. 수업을 들을수록 은희는 영지에게 호감을 느끼고, 영지 또한 은희를 좋아하면서 한 인격체로 존중해준다. 둘은 점차 가까워지고, 은희가 영지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토로하면 영지는 그에 맞는 자신만의 답을 해준다. 영지의 조언을 들으면서 은희는 점차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을 허물어 간다. 그리고 1994년 그 날, 은희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해가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시나리오로 구성된 소설 <<벌새>>는 주인공 은희의 입장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인 1994년을 표현했다. 1994년은 김일성이 사망한 해였던 동시에 성수대교가 붕괴돼 한국 사회 전체에 충격과 슬픔을 안겨준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외에도 여러 일들이 1994년 한 해 동안 벌어졌다. 여중생 은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처럼 ‘다사다난’했던 1994년을 살아냈다.
한편 은희에게 1994년은 자신의 무기력했던 세계관을 깨뜨리고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친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날기 위해 1초에 아흔 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은희의 힘없는 세계관은 오빠의 폭력, 부모의 무관심, 학벌 지상주의에 점철된 학교 등으로 인해 생겨났는데, 이를 깰 수 있도록 추동한 존재가 바로 영지였다. 영지는 은희의 고민을 들을 때마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등의 말을 하며 은희의 벗이 됐다. 영지의 여러 멘트 중에서 은희를 가장 크게 뒤흔든 말은 단연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였을 것이다. 이는 자신을 향한 갖가지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라는 의미로, 이 말을 들은 은희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오빠 대훈에게 처음으로 큰소리를 내며 반항한다. 이로써 은희는 그간 오빠의 폭력 앞에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을 집어 던질 수 있었다.
은희가 기존의 세계관이라는 알을 뚫고 나오는 동안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그리고 이 참사는 은희가 믿고 의지했던 인물의 상실을 불러온다. 이제 더 이상 은희는 그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거니와 답을 얻을 수도 없다. 이 때문에 1994년은 은희에게 그동안의 무기력했던 세계관을 허물고 성장하기 위해 벌새처럼 날갯짓을 한 해이면서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을 잃은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은희가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부분에서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은희에게 1994년은 알을 깨고 나온 시기였을까 아니면 소중했던 한 사람을 잃었던 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