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 아베, 일본 우경화의 뿌리 살림지식총서 529
이기용 지음 / 살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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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일본산 불매 운동, 8월 2일에 있었던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 8월 22일에 발표된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연장 종료 결정 등의 일들이 진행되면서, 한일 관계는 무기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거의 전쟁 수준까지 간 것 같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원인은 결국 일본이 제공했는데, 그렇다면 왜 일본은 이렇게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한 걸까? 그 이유를 파악하려면 먼저 아베와 그를 위시한 일본 우익의 사상을 알아야만 한다. 아베와 그의 주변에 포진한 일본 우익의 핵심 사상에는 '정한론'이 자리 잡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과거사에 관한 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이 보이는 이런 태도의 근간에는 정한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을 진정한 반성의 길로 유도하려면 한일 관계를 파탄시킨 침략 사상의 원형, 정한론의 실상을 이해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한다. 더구나 현재 일본에서 정한론이 무서운 생명력으로 부활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규명과 시정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한론은 일본 근대화의 기점인 메이지 초기에 등장한 사상으로, 불행한 근대 한일 관계의 서곡이자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인식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의 침략 사상인 정한론은 메이지 초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정한론의 근원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건국 과정을 담은 <<일본서기>>는 일본의 기원과 형성 과정을 다룬 책으로, 한반도에 관한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너무 신화적인 데다가, 초기 기록자의 조작과 후세의 개작이 더해지면서 사실로 볼 수 없는 왜곡된 부분이 많다. 고대 천황제 국가에서 천황의 정당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편찬한 책이기에,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은 사실성이나 시기적인 부분에서 많이 왜곡돼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내용 중에서 아직까지도 일본인의 뇌리에 각인돼, 한일 간의 긴장 관계나 무력 충돌이 있을 때마다 상기되는 이야기가 바로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설'이다. 내용은 신탁을 받은 진구 황후가 신의 보호 아래 신라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종속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 허구의 설화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 기해동정이라고 불리는 쓰시마 정벌, 임진왜란, 메이지 초기 정한론 등, 한일 간의 긴장 관계나 무력 충돌이 생길 때마다 다시 포장되고 재생됐다. 이 설화의 내용은 일본을 천황 중심의 신국으로 보는 인식과 조선을 향한 멸시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삼한 정벌설이 등장했는데, 결국 일본에 침략적인 집권자가 등장할 때마다 이 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둔갑돼 침략 행위에 힘을 실어줬다.

 임진왜란 이후 등장한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선린우호의 길을 열었다. 이는 에도 막부의 문을 연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조선을 문화와 학문의 선진국으로 간주하고 다시 교류하길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한 정벌설에 근거한 침략적인 시각은 잠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삼한 정벌설에 입각한 '조선 멸시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에도 초기 유학자들이 형성한 '조선 존중론'과 대치하는 조선 멸시론과 속국론이 하야시 시헤이라는 사람에 이르러 침략론으로 발전한다.

 한편 정한론과 관련해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1853년에 미국의 함선을 이끌고 와 개항을 요구한 페리 제독의 행동에 자극을 받았다. 이에 그는 천황을 중심으로 서구를 무찌르자는 '존황양이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속 대상으로 조선과 아시아를 겨냥하는 침략론을 펼쳤다. 요시다 쇼인은 삼한 정벌설을 최초의 조선 침략으로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그 위에 자신의 침략론을 펼쳤다. 그가 구상한 조선 침략론의 중심에서 삼한 정벌설이 부활한 것이다. 이 사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주창한 '대동아공영권'의 원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멸시론과 침략론이 요시다 쇼인에 의해 집대성돼 체계화된 정한론으로 결실을 맺었음을 볼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 열강의 압박에 못 이겨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막부 체제의 무능을 비판하면서, 막번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천황 중심의 '국체론'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 이념의 근거는 삼한 정벌설이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은 존황국체론과 일치한다. 그래서 정한론은 천황 중심의 신국을 수립하고, 이 위세를 몰아 조선을 정벌하자는 '존황정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메이지 초기에 이르러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와 동조자들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세운다. 이는 도쿠가와 봉건 막번 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변모시킨 정치사회적 개혁이었다. 이 시기에는 열강의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논리가 통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도 내적으로는 민권을 탄압하고, 외적으로는 식민지 확장을 통해 국권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것의 첫 단계가 바로 정한론이다.

 메이지 정부 내에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해 정한론을 처음 발의한 사람은 당시 참의(각료)였던 '기도 다카요시'다. 당시 조슈 번(오늘날의 야마구치현)의 역할과 대조선 외교에서 보여준 지위를 감안했을 때, 그의 발언에는 영향력이 있었다. 메이지 정부의 집권자는 요시다 쇼인의 존황국체론을 계승해, 왕정 복고를 알리는 서계(공식 외교 문서)를 조선에 보냈다. 그런데 서계에서는 메이지 천황을 조선 국왕보다 위에 뒀다. 

 종래 선린우호의 격례와 양식, 내용과는 다른 서계를 본 동래부사 정현덕은 문서 수납을 거절하고 일본 사절을 돌려보낸다. 조선은 조선 시대 이래로 이어져 온 일본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이후 조선 정부가 일본에 서계 양식 변경을 요청했지만, 메이지 정부는 '황(皇)'과 '칙(勅)'이라는 문구를 고수한 채 사신을 보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요시다 쇼인의 존황정한론을 그대로 계승해 외교 정책에 반영한 결과다.

 조선이 계속해서 일본 사절을 돌려보내자, 메이지 정부는 1869년 12월에 쓰시마를 통한 대조선 교섭을 중단한다. 교섭을 중단한 일본은 당시 외무대록이었던 사다 하쿠보 등을 조선으로 파견해 실상을 파악하도록 한다. 그런데 사다 하쿠보는 조선으로 가기 전부터 삼한 정벌설을 사실로 규정하고 과격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1870년 4월에 돌아온 사다 하쿠보는 "조선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과격한 정한론의 주장을 담은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정한론은, 1873년에 사쓰마(오늘날의 가고시마) 출신의 집권자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 등 메이지 정부 내에서 파벌을 가르는 심각한 정치 문제였다.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불리는 '정한 논쟁'은, 왕정 복고를 알리는 문서를 조선에 보낸 후 교착 상태에 빠진 대조선 교섭에서 정한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실행 방법과 시기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메이지 정부의 내분을 초래한 정한 논쟁은 즉시 정한을 주장한 자나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한 자나, 정한이라는 대외관의 본질에서는 같았다. 따라서 이 논쟁의 진상은 권력 내부의 파벌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은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계승한 것이며, 메이지 정부 수립 직후 정치적 불안이 생기자 조선 침략을 통해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 서구 열강에 정치·경제·심리적으로 입은 압박과 손해를 보상받으라는 요시다 쇼인의 주장을 그의 제자와 동조자들이 실천에 옮긴 것이기도 하다.1876년, 드디어 조선 침략의 첫 단계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할 때까지 일관된 대조선 침략 정책을 수행했다.

 정한론자로 이뤄진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부국강병을 성공시키려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국민 통합이 필요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직후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는 1888년 6월에 추밀원에서 제국 헌법 초안을 심의한다. 당시 그는 "일본에서 중심이 될 존재는 오직 천황가뿐이다"라고 단정한다. 이 결과, '천황제'가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는 요시다 쇼인의 존황국체론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주의 침략 사상'과 도쿠토미 소호의 '대일본 팽창론'이 등장한다.

 현대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연합국 군정의 지배를 받는다. 전후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에 천황이 있다고 보고 천황제 폐지를 고려한다. 그러나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천황제 폐지 시 있을 일본 국민의 반발과 패닉을 생각해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점령 정책에 유리하게 활용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 천황은 책임을 면하게 됐다.

 1947년, 지금의 '평화헌법'인 일본 헌법이 제정되는데, 천황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천황이 면죄되면, 천황을 따른 국민들만 전쟁과 침략에 대한 반성을 통감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황의 면죄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렇듯 쇼와 천황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일본은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매듭 짓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 심지어 천황은 '더 비참할 수 있었던 일본을 구원했다'는 전후 평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전후 일본 우익의 천황 숭배와 정한론 부활의 씨앗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아베 정권 우경화의 원인이기도 한데, 아베도 천황 숭배자다.

 아베는 재집권 1년차인 2013년 12월 26일,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과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참배했다.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배경에는 과거 일본이 벌인 침략 전쟁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기시 노부스케를 향한 존경심이 깔려 있다. 

 또한 아베는 2006년 1차 집권 시부터 평화 헌법 개정을 주창했다. 재집권 후에도 그는 정치 생명을 걸고 다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평화 헌법을 자주 헌법으로 바꾸고, 자위대를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한 군대'로 만들자는 게 요지였다. 2014년 7월 1일, 평화 헌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헌법 해석 변경이라는 변법으로 각의 결정을 거쳐 집단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했다. 왜 아베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집단 자위권을 추진할까? 그리고 왜 그릇된 역사관에 기초해 망언을 일삼을까? 이를 알려면 아베의 배경과 본질 사상을 알야야 한다.

 아베의 고조 할아버지인 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에 청일전쟁이 있기 전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의 사령관이었다.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자, 전후 일본 우익 보수 정치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걸 봤을 때 아베는 뿌리 깊은 우익 집안의 구성원이다. 이런 아베가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묘소에 찾아가 참배를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아베의 고향이자 선거구인 조슈 번의 하기에서 사숙을 열어 천황 숭배와 정한론을 설파했다. 그렇기에 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살펴보면 아베 정권의 향후 방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지금도 아베 주변에는 2차 세계대전 전범과 관련되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한 사람들의 후손과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포진해 정권의 핵심 보직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우익 사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정한론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살펴봤다. 사실 일본과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 갈등의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정한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한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본을 상대한다면,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봉합 수준에 머물 것이며 우리의 이익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의 갈등이 첨예해진 이 시점에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한론을 학습해 일본 우익의 사고 체계를 파악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내가 외교 전문가는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본의 양심 세력과 전 세계에서 일본의 참회를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해 아베 정부를 압박해 나가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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