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3물결 -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89년 11월
평점 :
변화의 새물결 =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
원리적인 면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게 된다. 하나하나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현실에 통렬한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이 책은 막연히 인간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파멸시키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즉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이 스스로 불러 일으킨 많은 재앙들 앞에서 과연 스스로 바뀔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변화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바로 창조의 운명을 지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 새로운 것일까? 인간이 만든 새로운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욕망의 충족은 인간마다 다 달라서 서로간의 갈등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많은 갈등으로 서로 싸우고 갈등하다 또 새로운 욕망의 창출로 달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저자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몹시 궁금해졌다.
저자는 현 시점의 갈등은 제3의 물결과 제2물결의 사이에서 경제와 제도 등의 충돌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제1물결은 농경사회 중심이었으나 산업혁명을 통해서 2물결시대가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교육된 인력수요와 공급을 위해 핵가족 구조, 공장형 학교제도, 대기업이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삶의 패펀을 변화시켰다. 생산과 소비가 자족적인 시대에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사회가 되었다. 남녀의 새로운 역할이 분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시장이 삶을 지배하게 되었고 남녀간 분열, 대립되었으며 결국 타락, 권력 독점으로 이어졌다. 제2물결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대의정치제도와 국민국가이다. 대의정치제도는 엘리트의 권력유지를 위한 핵심적 통합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업주의의 요구에 의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통합을 추진하고 통제하는 국민국가가 2물결 사회를 지탱하게 된다. 화석연로, 공장생산, 핵가족, 기업체, 대중교육, 대중매체에 의해 2물결 체제가 이루어진다. 생산과 소비이 분열에 기초에 의거해 엘리트에 의한 대의정치제도를 통해 체제가 강화된다.
이러한 2물결의 결과는 산업주의의 우월성을 추구하며 강화한다.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상정하고 인간의 이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사회진화론이 강조되어 약자에 대한 수탈이 정당화된다. 그리고, 정밀한 시간단위에 의해 시간이 직선화, 동시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정밀한 공간단위의 강조로 공간이 동시화된다. 그리고, 현실이 분리가능한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에 의해 기계론적 인과론이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원인만 찾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는 모든 일에 있어 기계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어 정신적인 비자율성이 확대되게 되었다.
제2물결의 규범인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집중화, 극대화, 중앙집권화는 효율성을 극대로 강조하는 원리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욕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케 할 것인가가 기본적인 논리이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을 비인간화 시킨다. 이런 사회의 주도자는 ‘통합자’가 권력전문가가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에서 보이는 그 신세계의 모습이 바로 2물결이 극도로 진행된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욕구를 즉시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회. 그 욕구를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즐기는 사회가 바로 신세계이다. 그 곳에는 개인이 없다. 인간은 없고, 욕구만이 존재할 뿐이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괴리되며 시장이 형성된 사회적 현실에서는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중앙집권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개발을 통해 생태계가 파괴되며, 더 이상 재생불능이 되는 에너지의 고갈로 인한 한계들이 나타나 산업문명의 소멸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3물결 시대에는 새로운 에너지로의 대체 현상이 나타나며, 새로운 첨단과학기술(컴퓨터, 우주, 해저개발, 유전자 산업)이 주도적이 되며, 매체들이 탈 대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컴퓨터의 발달로 대화위주로 모든 것이 조절되는 사회가 도래하게 될 때 더 이상 ‘문자해독’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된다. 또한 가내근무체제를 통해 가족 구조가 핵가족에서 개인생활자나 집합가족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합리와 효율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가족공동체 생활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제3물결의 등장으로 인해 정신적인 대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자연관을 통해 개발보다는 보존이 중시되고, 우주가 확대되어 인간의 사고 영역은 무한하게 확장된다. 또한 인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진화의 설계자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자치와 분리가 중요한 사회가 되며, 초국가 기업들이 출현하며, 지구의식의 확충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개인과 가정이 네트워크가 이루어져 소수세력과 반(半)직접민주주의에 기반둔 정치제도가 형성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들을 볼 때 ‘변화’한다는 것에는 나도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이책에서 변화된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변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적응하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치 판단의 준거를 적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른 방향’에 대한 탐구보다는 변화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바른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한 채 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암묵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과연 그럴것인가?
현재 우리 나라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극도의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는 사회이다. 학교에서도 경쟁, 효율을 강조한다. 평가될 수 있는 학업 성취를 주요한 잣대로 무차별적인 경쟁을 조장한다. 왜!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아래.
이러한 사회의 모습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해야 한다. 기존의 삶의 구조가 깨어진, 삶의 의미가 상실된 현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찾기에 부산하다.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임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현상황은 강력한 리더십의 붕괴로 다양성, 혼란함이 극도로 더해가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갈구한다. 정치적으로도 과거 회귀적인 향수 의식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의 시대에 대해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능률과 경쟁, 효율, 경제적인 성취가 주목적인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현시대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독단이 아니라 경청, 상상력, 제한적, 합의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율적인 삶을 통해 스스로를 살아가기보다는 타율에 의해 명령된 일을 성취하며 만족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아주 국가멸망을 시초로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져가는 시기임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현실을 보게 해주는 데는 긍정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계속 고민한 내용은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까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국 새로운 사고의 틀을 요구하는 데 우리는 어떤 사고의 틀로서 이 현실을 재단해야 할지 무지 고민된다. 변화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것이 결국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시류에 적응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역행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속에서 나의 취할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