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50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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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빨리빨리란 말을 많이 듣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빨리 해서 능률적으로 끝내는 것을 능력의 척도로 삼는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느림의 의미를 다시 되새김질 하는 책을 보게 되어 많이 우려를 가지고 읽었다.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해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에 대해 많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에서 느리게 사는 삶은 느림 자체에 의미를 더 두고 있었다. 느리게 사는 것이 건강에 좋고, 정서에도 좋고. 현실의 웰빙 바람에 편승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별로 의미있는 일 없이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의문을 그런 매체를 보면서 항상 품고 있었다. 이 책을 접하면서 이것도 거기서 얼마나 벗어나겠는가라는 의심을 했다.
이 책에서 얘기한 느림은 단순한 느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묵상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목적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관계들이 부셔졌기에 느림(기다림)을 통해 서로간의 진정한 감정의 교류로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많은 인간들이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인간 그 자체의 중요성을 기다림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서 인터넷 중독의 대부분은 남자라고 한다. 인터넷은 남성 문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는 있고 감정의 교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그 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것도 남자들이다. 여자들은 인터넷을 이용하더라도 관계 중심적인 삶의 구조로 인해 감정적인 교류를 더 중요시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삶(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길줄 아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 사용에 있어서도 남자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그것을 통해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본다는 것은 사고의 느림을 전제로 한다. 이 사고의 느림은 한가지 흐름의 생각을 보다 길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집중력의 증가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상황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이나 사물을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판단의 늦춤이 가능하다. 그러한 태도에서 무언가 하나를 소중하게 대하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최명희의 <혼불>에서는 길거리의 돌맹이 하나의 의미조차도 되새김질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밟고 거닐었던 길에 흔하게 버려진 돌맹이 하나가 가지는 의미조차도 놓치질 않으려고 한다. 내 삶의 주변에 버려진 의미들을 찾는 연습들을 해야 한다. 무심코 흘려버린 주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기다림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요구를 끊임없이, 나의 의지를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성령님이 내게 하시는 음성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을 때 가능해 진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내가 나의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내 의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자아가 죽지 않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가 질 수는 없다. 점점 분주해질 수 밖에 없다. 이 분주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느리게 살기 위해서)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완전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시적인 행위이다. 고요히 그 행위에 몰입해서 주변의 시간 흐름을 잊을 때 의식은 쉴 수 있다. 그러한 상태의 최상은 묵상이다. 내 영이 온전히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미세하지만 강력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 묵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느림은 세상으로 향하는 자아를 하나님 안에서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느려야 된다. 세상이 내게 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머뭇거림이 있어야 한다. 빠르게 즉흥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침묵속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현대인들 아니, 나는 느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느림은 무엇인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현대 문명에서 이 나약성은 하나의 죄악으로 취급당한다. 나약성은 무능력으로 취급되며, 나의 약점으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나는 약점,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위장하게 된다. 강한척, 완전한 척, 그런 나에게 느림은 타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겐 이 느림이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시간이다. 강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한 자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너무나 미약한 종족이기에 쓰임받기에 합당했을 뿐이다. 출애굽의 역사를 바라본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들이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을 의지했을 때 그들의 길은 순탄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구했을 때 그들은 패배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위대한 능력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내가 힘들이지 않고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기회를 버리고, 어렵고 힘들게 자신의 의지로 망할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느림은 섬세한 시각을 가진다. 섬세함은 사물의 의미를 살필 수 있는 시각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내게 허락하신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함이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휼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무더위에 흘리는 땀 한방울, 꽃 한송이, 바람들이 내게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해 내게 말씀하신다. 끊임없이 내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듯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들은 그 말씀대로 살고자 했고, 사랑을 발견치 못한 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멸망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깨닫는가?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된다. 한순간 한순간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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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언어 그림언어
게리 스맬리 / 요단출판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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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진심어린 말의 힘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언어는 비유적인 말로써 상대에게 관심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하셨다. 항상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 말씀하실 때 선명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세밀히 파악하시기에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음을 아시기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렇듯 그림언어는 관심의 언어이다. 상대에 대한 관심어린 세밀한 관찰이 먼저 있어야 한다. 상대의 필요가 무엇인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 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바로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문제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바라보아야 한다. 전체적인 조망속에서 그것을 이미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삶에 있어 목적중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중심의 생활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때 서로간의 감정의 교류가 일어난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일의 해결이 아니라 감정의 교류일 때가 많이 있다. 서로간의 교감이 있을 때 많은 갈등은 저절로 해소되는 경향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해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현실에서 어떤 언어를 주로 선택하는가? 대부분 한단계 기다리기보다는 바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직설적이고 설득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집에서 아이가 무엇인가 잘 안되서 칭얼대고 있으면, 바로 꾸중하고 왜 그것을 그렇게 해야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혼내고 다그친다. 아이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안아주고 쓰다듬고, 마음을 알아주는 언어보다는 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럴 때 아이의 마음이 닫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안아주고 공감하는 노력을 해보지만 잘 되지 않을때가 많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세밀하게 살피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의 삶속에서 자신의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조차 허덕이고 있을 때 어떻게 다른이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평강속에서만이 다른 사람들을 능히 살필수 있고, 관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 그림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려는 이기적인 소욕을 드러내게 된다. 한두번 그 의도가 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되게 되면 상대에게 강한 분노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먼저 나의 의도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편안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인지. 만약 나의 편안을 추구하는 것이 밑바닥에 깔린 의도라면 이것은 사용하지 않는 게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림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사랑의 마음이다.
그림언어라는 형식적 틀을 기교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속에 무슨 내용이 담기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타인의 행동을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그림언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타인을 돕기 위한 것이고, 나의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보다 관계 깊은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림언어의 힘이 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관계의 힘이 큰 것이다. 먼저 타인과 관계 맺음이 중요하다. <어린 왕자>에서 보이듯 나에게 소중한 장미 한 송이가 지천에 널린 더 화려한 꽃들보다 더 의미심장 한 것이다. 그 의미심장한 존재가 나에게 한 마디 할때 그 한마디는 태풍처럼 나를 흔들어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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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물결 -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 지음 / 한국경제신문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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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새물결 =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

원리적인 면에서 접근해야 함을 알게 된다. 하나하나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현실에 통렬한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이 책은 막연히 인간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파멸시키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즉 낙관론에 근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이 스스로 불러 일으킨 많은 재앙들 앞에서 과연 스스로 바뀔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변화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바로 창조의 운명을 지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 새로운 것일까? 인간이 만든 새로운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욕망의 충족은 인간마다 다 달라서 서로간의 갈등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많은 갈등으로 서로 싸우고 갈등하다 또 새로운 욕망의 창출로 달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저자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몹시 궁금해졌다.
저자는 현 시점의 갈등은 제3의 물결과 제2물결의 사이에서 경제와 제도 등의 충돌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제1물결은 농경사회 중심이었으나 산업혁명을 통해서 2물결시대가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교육된 인력수요와 공급을 위해 핵가족 구조, 공장형 학교제도, 대기업이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삶의 패펀을 변화시켰다. 생산과 소비가 자족적인 시대에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사회가 되었다. 남녀의 새로운 역할이 분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시장이 삶을 지배하게 되었고 남녀간 분열, 대립되었으며 결국 타락, 권력 독점으로 이어졌다. 제2물결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대의정치제도와 국민국가이다. 대의정치제도는 엘리트의 권력유지를 위한 핵심적 통합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업주의의 요구에 의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통합을 추진하고 통제하는 국민국가가 2물결 사회를 지탱하게 된다. 화석연로, 공장생산, 핵가족, 기업체, 대중교육, 대중매체에 의해 2물결 체제가 이루어진다. 생산과 소비이 분열에 기초에 의거해 엘리트에 의한 대의정치제도를 통해 체제가 강화된다.
이러한 2물결의 결과는 산업주의의 우월성을 추구하며 강화한다. 자연을 개발대상으로 상정하고 인간의 이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사회진화론이 강조되어 약자에 대한 수탈이 정당화된다. 그리고, 정밀한 시간단위에 의해 시간이 직선화, 동시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정밀한 공간단위의 강조로 공간이 동시화된다. 그리고, 현실이 분리가능한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에 의해 기계론적 인과론이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원인만 찾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는 모든 일에 있어 기계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어 정신적인 비자율성이 확대되게 되었다.
제2물결의 규범인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집중화, 극대화, 중앙집권화는 효율성을 극대로 강조하는 원리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욕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케 할 것인가가 기본적인 논리이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을 비인간화 시킨다. 이런 사회의 주도자는 ‘통합자’가 권력전문가가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에서 보이는 그 신세계의 모습이 바로 2물결이 극도로 진행된 사회의 모습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욕구를 즉시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회. 그 욕구를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즐기는 사회가 바로 신세계이다. 그 곳에는 개인이 없다. 인간은 없고, 욕구만이 존재할 뿐이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괴리되며 시장이 형성된 사회적 현실에서는 표준화, 전문화, 동시화, 중앙집권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개발을 통해 생태계가 파괴되며, 더 이상 재생불능이 되는 에너지의 고갈로 인한 한계들이 나타나 산업문명의 소멸이라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3물결 시대에는 새로운 에너지로의 대체 현상이 나타나며, 새로운 첨단과학기술(컴퓨터, 우주, 해저개발, 유전자 산업)이 주도적이 되며, 매체들이 탈 대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컴퓨터의 발달로 대화위주로 모든 것이 조절되는 사회가 도래하게 될 때 더 이상 ‘문자해독’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된다. 또한 가내근무체제를 통해 가족 구조가 핵가족에서 개인생활자나 집합가족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합리와 효율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가족공동체 생활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제3물결의 등장으로 인해 정신적인 대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자연관을 통해 개발보다는 보존이 중시되고, 우주가 확대되어 인간의 사고 영역은 무한하게 확장된다. 또한 인간이 유전자 조작을  통한 진화의 설계자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자치와 분리가 중요한 사회가 되며, 초국가 기업들이 출현하며, 지구의식의 확충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개인과 가정이 네트워크가 이루어져 소수세력과 반(半)직접민주주의에 기반둔 정치제도가 형성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예측들을 볼 때 ‘변화’한다는 것에는 나도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이책에서 변화된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변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적응하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치 판단의 준거를 적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른 방향’에 대한 탐구보다는 변화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바른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한 채 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암묵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과연 그럴것인가?
현재 우리 나라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극도의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를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는 사회이다. 학교에서도 경쟁, 효율을 강조한다. 평가될 수 있는 학업 성취를 주요한 잣대로 무차별적인 경쟁을 조장한다. 왜!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아래.
이러한 사회의 모습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해야 한다. 기존의 삶의 구조가 깨어진, 삶의 의미가 상실된 현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찾기에 부산하다.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임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현상황은 강력한 리더십의 붕괴로 다양성, 혼란함이 극도로 더해가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갈구한다. 정치적으로도 과거 회귀적인 향수 의식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의 시대에 대해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능률과 경쟁, 효율, 경제적인 성취가 주목적인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현시대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독단이 아니라 경청, 상상력, 제한적, 합의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율적인 삶을 통해 스스로를 살아가기보다는 타율에 의해 명령된 일을 성취하며 만족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아주 국가멸망을 시초로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져가는 시기임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현실을 보게 해주는 데는 긍정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계속 고민한 내용은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까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국 새로운 사고의 틀을 요구하는 데 우리는 어떤 사고의 틀로서 이 현실을 재단해야 할지 무지 고민된다. 변화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것이 결국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시류에 적응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고, 역행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속에서 나의 취할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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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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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참 읽다보면, 왜 이렇게 다 아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가 우리 국민을 교육의 전문가로 인정하면서 그 전문가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나열하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저자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 따른 문제제기도 하나의 해결의 의의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사회학자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현상의 원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적 측면의 나열에 치중한 듯한 느낌이다. 그냥 이정도는 교양 강의 정도에서 써먹지 왜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준식의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라는 책을 보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을 홉스테드의 이론에 기대어 분석하고 있다. 문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드러난다. 그에 비해 이 책은 학자로서 원인에 대한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아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학교 교육의 문제점에서 출발해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시시콜콜히 나열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서열화를 꼽고 있다. 입시를 통해 대학이 서열화됨에 따라 공교육이 부실화되며, 그로 인해 파벌이 확대 재생산되어 우리 나나라는 서울대의 나라가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외국의 대학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전문화, 특성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비교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로 상하구조를 들고 있다. 이 상하구조가 학교의 서열화와 상호보완되어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서열화와 상하구조는 개인적 자율성 성취를 가로막고 있어서 집단주의적이고 다른 이의 눈치만 보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창의적인 사고의 틀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 지적은 일견 정당하게 보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뭐가 위장되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위장이라는 것은 아닌 것을 그런 것 처럼 가리는 것을 의미하는 데, 도대체 이 학교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좋은데, 단순 나열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책은 아주 다양하다. 단지 그 다양성에 한 권을 더한다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찾을 수 없다. 최소한 학자라면 그러한 문제가 파생된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최소한 원인을 진단해 줘야 책을 읽는 우리가 앞으로 해야될 일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칠까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칠까를 고민해야 된다. 현재 고민의 부재 시대에 현실에 안주하고 매몰되어 있는 현실에서 근본적인 교육의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적인 자율성이 확대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현장에서 평가의 잣대가 다양화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교육의 관점에서 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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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또 다른 시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김성기 외 47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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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서평집이 독서목록으로 올라와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면서 책을 집어든다. 도대체 이 서평집을 통해 무엇을 발견해야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이 서평집에 실린 모든 책을 읽은 것도 아니기에 단순히 서평을 통해서 무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옥죄어 온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결국 주어진 내용을 받아들임에 있어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다. 주어진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쓴 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타락된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학문을 통해 원리와 진리를 알아가면서 쓴 책은 당연히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읽는 우리들은 그 왜곡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 왜곡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바로 성경(말씀)밖에 없다.
유홍준이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말한 글귀가 떠오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결국 내가 제시된 책을 소화하려면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읽을 수 없고 비판할 수 없다. 또한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해서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내가 가진 스키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이 책은 50권에 대해 50인의 학자가 책에 대한 서평을 적은 글이다. 따라서 서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0권의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읽지 않았지만 이 서평을 쓴 학자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동일한 이야기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다양성이라고 할까?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장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지적해서 새로운 견해를 부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견해들의 옳고 그름을 책을 읽는 내가 판단해야 하는 판단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결국 말씀에 비추어 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내가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본다.
이 다양성 속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태도야 말로 주체적 인간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책을 읽다보면 전혀 상반된 이야기에서 이 사람 말도 옳게 느껴지고, 저 사람 말도 옳게 느껴진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이 있다.
그렇게 될 때 나는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판단의 근거를 다른 사람의 견해에 두고 있음이다. 결국 사람이 내 안에서 우상이 되어 버린 현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가장 질투하는 우상을 내 마음 안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 다양한 세상의 모습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부여잡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지적인 능력을 키울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기위해서는 독서의 폭을 넓혀야 됨을 알았다.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모르는 부분은 내가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이었고, 그에 관련된 어떤 직접적 경험이나 간접적 경험(독서)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소한 학생들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다양한 독서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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