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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ㅣ 동문선 현대신서 50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빨리빨리란 말을 많이 듣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빨리 해서 능률적으로 끝내는 것을 능력의 척도로 삼는 효율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느림의 의미를 다시 되새김질 하는 책을 보게 되어 많이 우려를 가지고 읽었다.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해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에 대해 많은 회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에서 느리게 사는 삶은 느림 자체에 의미를 더 두고 있었다. 느리게 사는 것이 건강에 좋고, 정서에도 좋고. 현실의 웰빙 바람에 편승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별로 의미있는 일 없이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의문을 그런 매체를 보면서 항상 품고 있었다. 이 책을 접하면서 이것도 거기서 얼마나 벗어나겠는가라는 의심을 했다.
이 책에서 얘기한 느림은 단순한 느림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묵상해 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목적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관계들이 부셔졌기에 느림(기다림)을 통해 서로간의 진정한 감정의 교류로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많은 인간들이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인간 그 자체의 중요성을 기다림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서 인터넷 중독의 대부분은 남자라고 한다. 인터넷은 남성 문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는 있고 감정의 교류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그 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것도 남자들이다. 여자들은 인터넷을 이용하더라도 관계 중심적인 삶의 구조로 인해 감정적인 교류를 더 중요시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삶(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길줄 아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 사용에 있어서도 남자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그것을 통해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본다는 것은 사고의 느림을 전제로 한다. 이 사고의 느림은 한가지 흐름의 생각을 보다 길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집중력의 증가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상황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이나 사물을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판단의 늦춤이 가능하다. 그러한 태도에서 무언가 하나를 소중하게 대하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최명희의 <혼불>에서는 길거리의 돌맹이 하나의 의미조차도 되새김질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밟고 거닐었던 길에 흔하게 버려진 돌맹이 하나가 가지는 의미조차도 놓치질 않으려고 한다. 내 삶의 주변에 버려진 의미들을 찾는 연습들을 해야 한다. 무심코 흘려버린 주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기다림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요구를 끊임없이, 나의 의지를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성령님이 내게 하시는 음성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을 때 가능해 진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내가 나의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끊임없이 내 의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자아가 죽지 않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가 질 수는 없다. 점점 분주해질 수 밖에 없다. 이 분주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느리게 살기 위해서)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완전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시적인 행위이다. 고요히 그 행위에 몰입해서 주변의 시간 흐름을 잊을 때 의식은 쉴 수 있다. 그러한 상태의 최상은 묵상이다. 내 영이 온전히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미세하지만 강력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 묵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느림은 세상으로 향하는 자아를 하나님 안에서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느려야 된다. 세상이 내게 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머뭇거림이 있어야 한다. 빠르게 즉흥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침묵속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현대인들 아니, 나는 느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느림은 무엇인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현대 문명에서 이 나약성은 하나의 죄악으로 취급당한다. 나약성은 무능력으로 취급되며, 나의 약점으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나는 약점,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위장하게 된다. 강한척, 완전한 척, 그런 나에게 느림은 타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겐 이 느림이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시간이다. 강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한 자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너무나 미약한 종족이기에 쓰임받기에 합당했을 뿐이다. 출애굽의 역사를 바라본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들이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을 의지했을 때 그들의 길은 순탄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구했을 때 그들은 패배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위대한 능력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내가 힘들이지 않고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기회를 버리고, 어렵고 힘들게 자신의 의지로 망할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느림은 섬세한 시각을 가진다. 섬세함은 사물의 의미를 살필 수 있는 시각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내게 허락하신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함이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휼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무더위에 흘리는 땀 한방울, 꽃 한송이, 바람들이 내게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통해 내게 말씀하신다. 끊임없이 내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듯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들은 그 말씀대로 살고자 했고, 사랑을 발견치 못한 자들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멸망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깨닫는가?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된다. 한순간 한순간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기다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