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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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뻔하고 흔한, 그리고 식상할 법한 주제를 가진 책이더라도, 그런 뻔함의 미학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은 작은 소설이었고, 뻔한 스토리를 가졌지만, 느낀 점이 많은 소설이었다. 책이 발간됐을 때, 한국에서 굉장히 유행을 했었고, 대중적인 공감을 했었던 책이기도 하다. 왜 뻔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 책을 열광했었을까?


파견사원으로 일하던 아마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루저 20대였다. 희망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으며, 직장도 변변치않고, 생활도 쪼들리고, 친구도 없고, 외모도 뚱뚱한 이 주인공은 스물아홉의 생일을 기점으로 1년간 뼈 빠지게 돈을 모아서, 화려하게 그렇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영화와 같은 날을 보내며 가장 인생이 화려할 때 자결을 하기로 결정했다. 책의 제목은 그런 아마리의 결심을 상징한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다소 자극적인 책의 제목.


화려한 그 마지막을 위해, 아마리는 지금까지의 잉여 마인드를 버리고, 단 며칠을 위해 1년을 노력한다. 호스티스 바를 시작으로 누드모델 등등 돈이 되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치열하게 열심히 해 나간다. 어느 소설에서나 볼 직한 거창한 꿈이나 그런 동기부여가 아닌, 그야말로 누군가가 보기엔 의미가 없는 그런 화려한 유흥 화려한 죽음을 위해, 죽을 때는 잉여처럼 죽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모든 것을 걸고 최후의 도박을 시작한 주인공은 그 절박함을 딛고 일어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부분들을 발견하고, 인생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다. 책은 그런 인생의 가르침 등등을 현학적인 수사나, 거창한 문구로 치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고 초등학생이 문장을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솔직하게 꾸밈없이 주인공의 심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그래서 글을 보는 내내 몰두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저자는 물론 소설을 위해 각색한 부분도 있고, 억지스러운 교훈을 이끌어내서 감동을 주려고 하는 부분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진솔하게 썼었다. 가식과 포장이 아닌 최대한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글쓰기. 그런 글이라서일까, 뻔한 스토리 그리고 식상한 감동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감동이 일어났던 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아마리'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함께 할 수 있는 벗들은 굉장히 제한되기 마련이고, 요란 떨며 생일을 챙기던 그런 우정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들해지며, 자기 스스로 생일을 챙겨야 할 때도 많다.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갑인 상사 앞에서 쪼들리며, 스트레스받아 가며 일하고 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청춘들은, 구직을 위해 오늘도 자존심을 구기며 취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중소기업을 다니는 사람들 역시도 안정화되지 못한 직장과 대우에서 위태위태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경우와 상황은 달라도 청춘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는 공통점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주인공 아마리와 같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아마리와 같은 심리, 나이가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삶의 외로움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는 부분은 아마리와 닮았고, 그 감성적 공감은 책을 몰두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책을 보며 또 한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바로 꿈에 대한 부분이다. 이 책은 거창하고 거국적인 이상적 가치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어이없을 정도의 소망을 위해, 아마리는 분투하고 노력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꿈을 가져라, 남들과 차별화되는 꿈을 가져라고 교육받지만, 솔직히 그 꿈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찾는 청춘은 드물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마리와 같이 우리의 꿈이 무엇인지 모르고, '닥치는 대로' 살아왔었다. 세상은 그런 우리에게 꿈을 이야기했지만, 닥치는 대로 살아온 청춘인 우리는 그런 꿈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린 시절부터 꿈을 꾸라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꿔 온 꿈은 잠자리에서 꾼 꿈이 전부가 아닐까?


아마리는 그런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보단, 누가 볼 땐 소소한 것, 라스베이거스에서 화려하게 보내고 죽겠다는, 어이없는 그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전력적으로 분투했다. 꿈이라는 것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아마리는 거창하지 않는, 아니 아마리에게는 동기부여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꿈이라는 것에 어울릴 만한 단어 가령 예를 들면 야망, 대망 등등의 거창함으로 볼 때는 한없이 잉여스러운 가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적으로 분투했다.


굳이 번잡하고 복잡하고, 있어 보일 필요는 없다. 꿈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소하게, 꾸며 그런 소소한 꿈으로부터도 인생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젠가 어느 블로그 이웃님께, 블로그 제목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이웃님이 말하신 부분이 생각났다.


'아 이탈리아에 있는 그림 이름이에요. 한 번 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거든요.'


그 대답이 생각났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작은 소원도 굉장한 삶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구나, 나는 과연 나만의 소소하더라도 저렇게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꿈이 있는가? 나는 나만의 라스베이거스가 있는가? 거창하지 않고 소소하게나, 저런 꿈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마리를 보며 또 느낀 것은, 아무리 가치가 없는 꿈이더라도, 그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미생'에서 우리는 장그래에게 열광한다. 고졸 출신의 아무 스펙도 없는 그가, 회사에서 적응해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자화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이정표로 다가올 수 있겠다.


아마리와 장그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노력이다. 아무리 하찮은 꿈이더라도, 그 꿈을 이뤄 나가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미생'을 보며 내가 느낀 점은 장그래가 무역 사전을 3일 만에 외웠다는 사실이다. 이런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지 우리는 장그래가 될 수 있다. 이 정도 노력은 해야지,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장그래가 말하는 멋진 말들이나, 느낌이 오는 대사들만 기억하지, 장그래의 노력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라스베이거스를 가기 위해, 그녀는 지금까지의 잉여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장그래도 마찬가지다. 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 소박한 꿈 때문에 그도 휴일을 반납하고 노력한다. 둘은 그래서 닮았다.


아마리는 그러한 삶의 작은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고, 삶의 긍정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죽지 않고, 새로운 삶을 부여받아, 더 나은 삶을 열어갔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아마리는 죽었다. 기존의 잉여스러운 못났던 아마리는 죽었고, 새로운 아마리로 새롭게 태어났다. 1년이란 시간은 보이듯, 길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사람을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뻔한 플롯과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감동 있게 잘 봤던 책이다. 일본인이 써서 그런지, 현학적인 수사나 그런 부분이 없으며, 간결하고 단출하게 알기 쉽게 잘 써진 책이었다. 아마리를 보며, 나의 꿈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과연 작은 가치들을 너무 쉽게 지나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에서도 아마리처럼 생의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과연 나의 꿈을 위해 아마리처럼 목숨을 걸고 한 일이 몇 개나 있을까라고 생각해봤다. 부끄럽다. 나는 그렇게까지 노력한 경우가 거의 없다.


어떤 일을 할 때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야 한다. 무슨 일이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사소한 일이고 작은 일이더라도 쉬운 일은 없다. 노력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노력을 옵션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의 노력은 특별하다. 노력이 옵션의 가치를 부여받으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남들과는 다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니까, 아마리도 그랬고 장그래도 그랬다. 과연 나는 그렇게 인생을 살았는가? 부끄러울 다름이었다. 뻔하고 식상한 이 책은 나에게, 그런 부끄러움을 선사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나를 죽여야 한다. 타성에 젖은 나, 열정을 잃은 나, 행동하지 않는 나, 변명이 많은 나, 나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아마리처럼, 그러기 위해선 죽을 듯 노력해야 한다. 죽을 듯 노력해야 할 꿈, 가치를 생각해야만 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소소해도 그 소소함을 이루는 과정에서 삶의 성찰을 받는다면, 나의 타성의 모습을 죽여나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래서 나도 나를 죽이고 싶다. 1년이란 세월,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에 나도 목숨을 걸고 노력해야겠다. 우선은 1년만 그렇게 살아보련다. 너무 길게 계획을 잡지도 않고, 아마리와 같이 1년만, 죽기 아님 살기로, 그래서 나도... 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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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
귀곡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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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동양에서는 수사학이 발달되지 않았다고 그런다. 공자를 필두로 한 유가사상은 말하기에 대해서 극도로 부정적이다. 공자가 중시하는 것은 말보단 행동이다. 유가 사상에서 봤을 때 말하기란 본이 아닌 말로 견주했고,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유가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면서도 형식을 존중하는 모순적인 학파다. 유가가 존중하는 형식은 바로 인과 예다. 그들이 생각했을 때, 인과 예는 형식이 아닌 인간의 본성, 즉 선한 관점에서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본이었다. 그러나 도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에서는 유가의 그 인위적인 예를 가식으로 견주하기도 했다. <사기> 열전에서 노자가 공자에게 타박을 준 것도 이러한 부분이다. 유가가 지양했던 형식은 바로 말하기다. 실제로 <논어>에서는 얼굴빛을 꾸미고 말을 교묘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부정했다.


말이라는 것은 되도록이면 말하기보단 짧고 간결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설파했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런 유가 사상의 창시자인 공자. 그도 상당히 말을 잘 하는 선비였다. 동양 어느 경전에 봐도, 좋은 말은 죄다 공자가 다 했다. 그러면서 후학에게는 말을 절제하라는 부분을 보며, 서양의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관계도 생각났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소피스트들과는 다르게, 수사학을 돈을 받고 가르치진 않았다. 그는 극도로 수사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런 소크라테스 역시도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뛰어난 수사력을 가진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다. 동양의 성현과 서양의 성현은 그렇게 닮아있었다.


유가가 국학으로 채택되며 동양에서는 어마 무시한 권위를 가지게 됐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대로 동방 여러 국가에 퍼져나갔고, 공자의 이념대로, 대체적으로 말에 대해서 절제하고 침묵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기게 됐다. 반면 서양에서는 이색적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올바른 수사학에 대한 부분을 고찰하고 있다. 더 나아가 대화편 자체가 소크라테스의 수사학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수사학을 발전시킨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맡는다. 그는 논리학의 시초인 <오르가논>을 제작했으며, 그 이래로 서양에서는 수사학이 굉장히 발달하게 된다. 동양과는 참으로 다른 부분이다. 서양인들의 관점은 말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검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그 위험한 검(수사학)의 위험성을 숙고하며 잘 휘두르는 법을 생각했다.


그래서 동양에는 수사학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유가가 공인되기 이전 춘추전국 시대에는 다양한 제자학파가 발달했는데, 특히 이 수사학과 외교학에 관련된 학파가 바로 '종횡가'이다. 그리고 종횡가의 대표적인 이론이 담긴 책이 바로 <귀곡자>라는 텍스트다.


어찌 보면 당시 전국시대의 중국은 지금 무한 경쟁 사회와 비슷하다. 구직자들은 구직을 위해 이 기업 저 기업에 원서를 내고 적절한 타이밍에 연봉 협상을 통해 이직을 하는 것이 보편화된 현대. 그 시대 중국도 마찬가지다. 선비들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군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자신이 선택한 군주가 그릇이 아니라면 배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사회. 두 사회는 지극히 닮아있다. 그것은 시대가 난세였기 때문이고, 그 난세를 틈타 능력이 있는 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시대가 바로 중국의 전국시대다. 선비들 역시 이러한 마음가짐이니,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약소국을 정벌하고, 자신의 세를 넓히기 위해 군주들은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받아들여야만 했고 시험해야만 했다.


<귀곡자>는 이 시기, 떠도는 유세객들에 의해 정립된 이론이었다. 당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선비는 군주에게 알현하여서 빼어난 말 솜씨로 군주를 사로잡아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느 기업이나 직장에 취직되기 위해 자소서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절 유세객들이 취직(?) 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독대를 감수해야만 했다. 올바른 계책이 있더라도, 그것을 잘 못 포장하여 내뱉었다간 그대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유세객들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집성한 학파가 바로 종횡가이고 그 종횡가의 대표적인 경전이 <귀곡자>라고 할 수 있다.


<귀곡자>를 보는 키워드는 다양하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읽으면서 4가지 관점에 입각하여서 책을 독해했다 하나하나 서술해보자면,


첫 번째 이 책은 앞서 말한 대로 동양의 수사학의 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귀곡자>의 가장 핵심은 바로 말하기다. 유세객의 입장에서 자신의 주군에게 취직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환심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런 환심을 사는 것으로 시작하여, 군주의 마음을 얻는 법, 그리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법, 심지어는 상대의 모략을 읽고 제거하는 법, 등등을 서술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유가의 사상과는 전혀 상반되는 현실 중심적 논리에 입각한 사상이다. 이 사상과 같은 계보에 있는 제자백가는 법가와, 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군주의 현실적 사상이 법가, 군인의 현실적 사상이 병가라면, 이 종횡가는 문인의 현실적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이 책은 약자가 강자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처세술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이 유세객들이 유세를 하는 대상은 바로 모든 것을 가진 군주다. 군주는 자고로 힘이 강하고, 모든 권한을 가진 반면, 유세객들은 지금 말로 하자면 직업이 없는 백수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말 한번 잘못했다간 힘의 논리에 의해 바로 유세객이 칼을 맞을 수 있는 경우도 많았기에, 그들은 극도로 신중하고 생존을 위해, 힘을 가진 군주를 살살 굴리는 방법을 연구했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들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부분이라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같은 현실론적 사상이더라도, 법가가 종횡가를 극도로 꺼리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겠다. 법가는 군주의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사상이고 종횡가는 신권에 대한 부분이 있으며, 심지어 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우는 방법과, 혁명을 해서 군주를 끌어내는 대목도 있으니, 왕조국가가 보편화된 동양에서 군주의 입장에서는 종횡가가 썩 미덥지 않은 점도 이해가 갔다.


특히 유가 입장에서도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어쨌든 군주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이념이 있는지라, 같은 이단이더라도, 법가보다 종횡가를 더욱더 싫어했었다. 그래도 법가와 유가는 사상이 달라도 군주에 충성을 다한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반역과 택군을 논하는 종횡가 이론을 꺼려한 점도 이해가 간다. 이 부분은 이 책의 해설 부분인 '법가와 종횡가의 충돌 : 한비자 독살 옥사 사건을 중심으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세 번째는 바로 도가 계열과 음양학 이론이 스며든 부분이다. 사실 전국시대에 주목받은 현실론적 사상인 법가, 종횡가, 병가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도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귀곡자에서는 음양가들의 이론들도 보인다. 책은 생각보다 자세한 부분을 이야기하기보단 추상적이고 큰 틀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은 손무의 <손자병법>과도 일맥상통한 서술법이었다. 그 추상화 이론에 중심에는 음양학적 이론이 담겨 있었던 점도 눈에 들어왔다.


네 번째는 어쨌든 이 책은 현대적인 가치로 환원하여서 볼 때 협상과 외교학에 여전히 유효한 이론들이 많아 보였다. 좀 얕은 처세적 관점의 대목들도 보였지만, 의미가 남다르게 온 부분도 많았다. 몇 가지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본경내편 후반부 전부를 언급하고 싶다. 5. 비겸 -띄우면서 마음을 얻어라, 7. 췌정 - 전체 국면과 속셈을 읽어라, 8. 마의 - 부드럽고 은밀하게 다독여라, 9. 양권 -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라, 11. 결물 - 이로우면 속히 결단하라. 이 대목들이 인상적이다. 협상과 외교학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책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동양의 책략 이론들을 정립한 이론서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본경내편이다. 본경 1편에서 11편까지가 책의 가장 핵심을 다루고 있고, 본경외편과 잡편들은 논고가 난잡한 부분들이 보였다. 해설에서도 확연히 문체가 다른 것으로 봐서 후대의 첨삭이 보이는 부분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본경내편에 비해 흥미가 떨어졌다. 특히 잡편은 상당히 음양학적 지식이 많이 가미되어 좀 뜬구름 잡는 느낌도 많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예전부터 조용히 탐독했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중학교 때로, 공자에 대한 사상을 검색하다, 종횡가를 알게 됐고, 특히 병법서들을 탐독하다가 손빈의 스승인 귀곡자를 보고 검색하여 <귀곡자> 전문을 해석한 문서를 얻었다. 그래서 인쇄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당시 번역 텍스트가 전무했었다.) 사실 텍스트는 상당히 적다. <손자병법>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적은 양의 텍스트라서 마음에 들었다. 당시에는 <귀곡자>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 동양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금서였기 때문이었는데 최근에는 종횡가에 대한 이론이 많이 소개되고 있고, <귀곡자> 역시도 번역본이 세 권이나 나온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이 번역본을 구매했었다. 관심이 가던 책인데, 예쁜 단행본으로 나오니, 소장하고 싶어서였다. 다만 이 신동준 역본의 <귀곡자>는 581쪽으로 상당히 두툼하다. 사실 원문 번역으로 치면 A4용지 6장 내외로 출력할 수 있는데, 상당히 역자가 예시를 많이 들고, 주석을 본문과 합쳐서 편제하여서 쪽수를 많이 잡아먹은 느낌도 들었다. 인간사랑 동양고전에 대해서 한 가지 말을 하고 싶은 점은, 간혹 신동준 역본의 번역서에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는 타이틀을 자꾸 사용하는데,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국내 최초 완역본은 2007년도에 나온 학민사에서 나온 책이다. 다만 이 책은 상당한 오역이 있는 책이지만 최초 완역본은 이 책으로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2009년에 나온 지만지 시리즈의 <귀곡자>도 괜찮은 것 같다. 학민사 책 보다 가독성도 좋았던 것 같았다. 지만지 시리즈는 특이한 고전을 편역하여 전집을 내는 출판사인데, 이 <귀곡자>는 완역으로 냈었었다.


이 번역본의 불만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예시 사례가 너무 길다. 사실 고전 본문은 1/3밖에 되지 않고 예시가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누군가에겐 구체적인 사례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책 부피만 차지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전 번역본들의 사례와 중첩된 부분들이 많아서 흥미를 못 느끼는 점도 있겠지만... 두 번째는 주석의 처리다. 각주나 미주로 좀 처리했으면 좋을 부분들을 본문 밑에다가 그대로 처리하고 있으니 뭔가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한자 주석의 경우는 본문 어디서 이 한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작은 번호로 처리를 좀 해 줬으면 싶다.


책 본문의 다소 번잡한 예시는 아쉬웠지만 책의 부록, 종횡가에 대한 고찰과, 법가와 종횡가의 충돌, 귀곡자와 종횡가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좋았었다. 신동준씨는 기존 학설에 동의하기보단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을 하시는데, 그 부분도 흥미롭게 읽었다. (그 부분도 구체적으로 쓰고 싶지만 지면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한다.)


노회한 정객 헨리 키신저는 이 책을 항상 침대에서 탐독한다고 전해진다.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동양 최초의 수사학, 기원전의 수사학과 책략의 고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다. 어느 분들을 이 책을 보면서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보시는 분도 많은데, 의외로 별거 없다는 소리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지금 현대의 수사학 이론이나 현실적 관점과 별다른 차이가 없기에, 그저 그런 책이네,라고 치부할 법도 하겠다. 그러나 무서운 점은 이 책은 기원전에 만들어진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이 익숙하게 보인다는 것은 현대나 기원 전이나 인간의 심리나 책략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는 점을 반증하는 예가 아닐까 싶다. <귀곡자>는 그런 인간 본성적인 심리를 최초로 고찰한 책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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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문답 - 조선의 군주론, 왕도정치를 말하다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 8
이이 지음, 정재훈 옮김 / 아카넷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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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특히 정치 고전은 그 시대상황을 철저하게 반영하는 저술들이 많다. 정치라는 부분은 크게 보거나 작게 보거나, 인류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된 행위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치를 논하는 고전들은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 고전 안에는 시대 상황이 태평성대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태평성대에서 고찰되지 못한 부분들을 밝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시대의 희망을 반영하고 있으며, 반대로 시대의 상황이 부정적이라면, 시대의 아픔을 고찰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시대의 희망이 반영되어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정치사상서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은 동 서양이 가릴 것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동호문답>이라는 책도, 아파왔던 시대의 조선의 모습으로부터 고민하던 율곡이 해결책을 제시한 정치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부제에는 '조선의 군주론'이라고 명칭 되고 있으나, 내가 읽어봤을 때, 이 책은 군주론에 국한되기보단 군주론을 넘어서, 조선의 정치를 포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상당히 짧았었고,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논의는 없었으며, 약간의 중국사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을 요했고, 조선 근세의 행정 체제에 대한 지식이 필요로 했지만, 이런 부분을 모르더라도, 주석이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읽는 것에는 지장이 없겠다. 다만 내가 읽어봤을 때, 적어도 이 책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나 근세의 행정은 주석으로 본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 흐름 특히 조선 전기부터 율곡이 살았던 조선 중기까지의 왕권과 신권의 구도, 사림의 위치 등등은 기본으로 이해하고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주석으로 최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만, 내 판단으로는 내가 지적한 흐름 정도는 간략하게 알고 책을 보면 좋겠다.)


율곡의 정치사상서는 대표적으로 두 권인데, 첫 번째가 바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성학집요>다. 이 책이야말로 조선판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대대적으로 보완하고 압축, 그리고 조선화하여 업그레이드 한 율곡 이이의 '군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동호문답>을 들 수 있겠다.

 


(율곡의 정치사상서 두 권)


사실 <성학집요>보다 먼저 나온 것은 <동호문답>이다. 동호는 동쪽 호수를 칭하는 것으로 지금 옥수동과 압구정 사이에 흐르는 한강을 일컫는 말로, 그곳에 국가에서 만든 독서당을 칭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으로, 나라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보내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율곡은 이곳에서 독서를 하며,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한 것이 바로 <동호문답>이었다. 이 당시 율곡과 동기였던 사람 중에는 유명한 '서애 류성룡'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지금 예시로 든다면 나라에서 제공하는 장기간 합숙 연구회에 참가하여, 최종 보고서로 제출한 것이 <동호문답>이었다. 독서당은 임금의 총애가 지대한 곳으로 매일 진귀한 음식과 좋은 말, 좋은 안장 등이 제공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실 학자들은 휴양을 온 기분으로 지낼 법 하지만 율곡은 그러지 않았다. 율곡은 깊이 있게 고민했다. 당시 조선은 심하게 부패하여 있었다. 그는 독서를 하면서도 민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현실의 고민에 대해 나름 고민하며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 <동호문답>이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동호에서 고민한 결과였다.


 그의 책은 두 명의 대담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바로 '주인'과 '손님'이다. 동호에 온 손님은 동호의 주인에게 현 시세를 묻는 인물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현세 분석을 하는 동호의 주인은 결국 율곡 자신이었다.


책의 구성은 11장으로 구성됐으며, 크게 나누면 4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1장에서 3장까지를 군주와 신하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있었고 예시로 든 역사적인 지식은 중국사 중심적으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여기서 살펴볼 점은, 이 책은 선조에게 바쳐진 보고서이므로 결과적으로 군주를 중심적으로 풀어나가는 책이다. 따라서 군주의 눈높이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아마 역자는 '조선의 군주론'이라는 주제를 붙였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신하'에 대한 고찰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까지 군주를 다룬 책들은 신하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군주를 중심적 시각으로 두고 신하를 고찰하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책은 없었다. 가령 군주의 입장에서 어떤 신하가 좋은 신하인가? 신하를 볼 때는 어떤 부분을 봐야 하는가, 인재를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가 등등의 군주의 틀 안에서 신하를 고찰하는 부분만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하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책이었다. 군주의 입장을 강하게 논하는 동시에, 신하의 입장도 강하게 논하고 있는 책이었다.


이 부분은 율곡이 속한 사림과 연계해서 볼 수 있겠다. 이 시대에는 척신들에게 사회를 통해 사림들은 굉장히 위축되어 있었다. 다행히 선조 대에 이르러서 사림은 적극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아가고 있었다. 율곡 역시 사림학파 계보에 선 인물이므로, 전 시대의 사화의 혼란에서부터 사림과 군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최종적으로 이 책에서 고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신하의 입장을 대변한 제 2장인 '논신도' (신하의 도리) 제 3장 '논군신상득지난' (군신이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다)라는 대목은 지금까지의 군주론에서 전개하는 군주 중심의 시각에서부터 벗어나 신하의 입장 역시도 동등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즉 율곡이 생각한 이상적인 정치는 바람직한 '군신공치'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여기서 군주는 선조를, 여기서 신하는 사림이라는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 뒤 4장과 6장에서는 조선의 시세 판단과 거시적인 국가의 문제 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대목에서는 철저하게 한반도 역사를 중심으로 사례를 들고 있다. 특히 한반도 역사를 중심적으로 예시를 드는 부분에서 상당히 주체성이 두각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쉬운 예로 퇴계의 군주론이라 할 수 있는 <성학십도>의 경우는 전형적인 중국 이론 중심적인 논고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대의 유림들은 대체적으로 예시를 들 때 중국의 사례를 드는 경우가 태반인데, 율곡은 4장에서 기자를 시작으로 삼국과 고려를 크게 고찰하는 것으로 5장에서는 조선 초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군왕과 '신하'들을 고찰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세종과 성종에 대한 평가인데, 율곡은 이 두 군주가 아주 뛰어난 군주라고 칭찬하면서도 한계를 말한다. 그 한계는 바로 뛰어난 군주에 비해 뛰어난 명신이 없었다는 점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율곡의 생각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군신공치'의 이념과, 뛰어난 정치는 군주의 명석함만 있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신하의 명석함으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 역시도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내가 생각한 점은 같은 신권 우대를 하더라도, 율곡이 논한 신권론은 군주와 신하의 공치를 이야기하는 이 이론은 정도전의 신권 우위론적 사상과도 달랐다. 정도전은 지나칠 정도로 왕권에 대해 제약을 가했지만, 율곡은 군주와 신하(사림) 과의 공존을 모색했었다.


5장에서 또 엿보인 부분은 도입 부분이었다. '이전의 쓸데없는 것(1장 ~ 4장의 논의 즉 중국의 선례와 우리나라 고조선 ~ 고려의 선례)들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현재의 일에 대해 말씀하시죠.'라고 말하는 손님의 발언에서 강한 '현세성'을 느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유학이란 학문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율곡의 이런 논의에서 볼 수 있듯, 율곡은 유학이란 이념을 학문적으로만 추존하지 않고 적극적인 현실 타개의 매개체로 활용하였다.


1~5장까지가, 원론적 성격, 그리고 과거적 성격, 추상적 성격의 논의였다면 6장부터는 현세적 성격과 구체적 성격을 논하고 있었다. 핵심은 왕도정치에 있었다. 율곡이 말한 정치의 핵심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신하가 만나서 왕도정치'를 꽃피우는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한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7장에서 11장에 걸쳐 이야기를 하고 있다.


7장은 군주의 수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이 바로, 확장된 부분이 <성학집요>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의 군주 학습서인 <성학집요>의 큰 틀은 이미 <동호문답> 7장에서 다 밝혀놓고 있었다.


8장은 군주의 용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군주와 신하를 다루면서 군주 중심적인 신하론을 펼치고 있다. 뭐 다른 책에서 나온 논의처럼 간신을 간별하는 방법 등등을 원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7장과 8장은 다소 원론적인 해결책이라면, 책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9장과 10장은 자세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있었다. 바로 시국의 민생안정에 대한 부분이다. 9장과 10장은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9장에서는 민생안전을, 10장에서는 백성의 교화(교육)에 대해서 강하고 자세하게 비판하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동호문답의 챕터 중 9장이 가장 분량이 많으며, 그다음으로 긴 편이 10장이다. 그리고 9장과 10장에서는 이 전에서 볼 수 없었던 구체적인 사례와 시세 판단 그리고 율곡이 생각한 제도의 개혁 방안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9장과 10장의 차례를 보면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원래 기존의 지자층이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위에서 아래로 보는 시각을 끝까지 고수한다. 즉 백성들이 덜떨어져서 백성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지배자층이 하라는 대로 하도록,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교화라 하고 세뇌라고 하고 싶은) 정책을 주로 쓰기 마련인데, 율곡은 이런 타성에서부터 벗어나, 근본적으로 위에서 시작하는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개혁의 칼끝은 임금을 시작으로 사대부와 선비들이 의식을 가지고 구습과 악습을 철폐하여 일단 백성의 '민생'부터 바로잡은 뒤, 올바른 학교 교육을 통해, 백성들에게 선한 풍습을 배포해야 한다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율곡의 이런 지도층 비판은 비판을 나아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부분에서 의의가 있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9장의 논의들은 조선 후기에 조선이 채택한 제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이가 제시한 공납의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정의 개혁은 균역법으로 실행됐다. 조선 중기에 부르짖던 율곡의 외침은 결국 조선 후기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시행됐다. 그뿐만 아니라 노비제를 비롯한 10장의 학교 개혁론들 역시도 지금의 시대에 봤을 때, 굉장히 의미하는 바가 컸었다. 우리나라 역시 지금 교육이 문제라고들 한다. 율곡 역시 10장이라는 독립적인 장을 할애하여 국가 교육에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으며, 교육이야말로 올바른 풍습과 민생의 안정, 나아가 국가의 대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현상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많다. 시대에 대해서 무슨 일에 대해서 비판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율곡 이이처럼 '올바르고 깊게' 비판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물론 비판을 한다는 것은 문제 제기를 한다는 면에서 지극히 권장할 만 하고 좋은 일이지만, 비판 안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그 비판을 나름 해결하려는 해결책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비평가가 아닐까 율곡을 보며 생각했다. 율곡은 정확한 비판을 전개했으며,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했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시도됐던 정책들은 중기의 율곡의 틀에서 벗어난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만 봐도, 율곡은 뛰어난 선각자였던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11장이었다. 이 마지막 장의 이름은 '논정명위치도지본'(정명(正名)이 정치의 근본) 이 대목이었는데, 핵심은 아직까지 공신으로 추존되고 있는 죽은 윤원형 일당들을 일당들에 대해 죄를 청하고 정치의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부분. 이 부분에서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하고 안고 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발견했었다. 이이의 말대로 정치는 이름을 바로 세우는 명분으로 시작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상당히 명분론적인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율곡이 마지막 논의를 쓴 이유에는 사적인 원한 즉 죽어나간 사림들에 대한 억울함과, 사화에 대한 척신들의 악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동호문답>에서 율곡의 개혁론을 듣던 손님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너무 급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닌지?'라고 묻자 주인은 화를 낸다. '이래서 조선이 발전하지 않는 거라고, 사대부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나라 발전이 안되는 거 아니냐? 할 건 빨리 시행해야 한다. 지금 내가 제시하는 것은 가장 급한 문제들만 집어 낸 것들이니 이것들도 하지 않고 어떻게 나라가 바로 서 길 원하는가.'라는 입장으로 개혁을 촉구했다. 무서운 부분은 율곡이 급하게 경장을 외친 부분 중에는 군사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율곡은 지금의 군사 체제로는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방비가 어려우니 군대를 점검하고 체제를 점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런 율곡의 말을 듣지 않아서 임진전쟁 때 처참하게 무너진다.


 이 책을 선조에게 진상했을 때 퇴계는 같은 해에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진상했다. 퇴계의 글이 전형적으로 유학적 관점으로 임금의 마음공부에 치중된 글이라면, <동호문답>은 임금과 신하, 백성, 그리고 올바른 '정치'와 '민생' 현실 문제 그 자체를 제시하고 있었다. 퇴계의 글에 비해 율곡의 글은 어렵지 않았으며, 명료했고 형이상적 논의를 지양했었다.


퇴계와 율곡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현실 인식이다. 퇴계는 현실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학문 연구에 몰두한 반면, 율곡은 사회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율곡의 경장론이 더 마음에 갔다.


 율곡의 다른 저서인 <성학집요>와 비교를 해 봤을 때, <성학집요> 역시 제왕학 중심적으로 고찰을 하고 있는데 반해, <동호문답>은 <성학집요>보단 짧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제왕학의 범주를 넘어선 부분이 돋보였다. 정치라는 큰 틀로 보면 <동호문답>이 범주가 더 넓다고 할 수 있으며, 군신공치 제왕론의 세부적인 부분으로 고찰할 때에는 <성학집요>가 더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성학집요>가 여러 유학 경전들의 인용으로 완성된 책이라 다소 원론적이고 추상성이 내포된 책인 반면, <동호문답>은 중국 경전들의 인용보다는 주체적인 모습이 더 두각 되고, 현실적인 부분들을 더 고찰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율곡의 상소문인 <만언봉사>와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맞물릴 수 있겠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경장론을 가장 돌직구적으로 토해내는 상소가 바로 <만언봉사>이기 때문에, 두 책은 상호보완적인 입장이라고 할 만하다.

 


서구의 정치사상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해보자면 <군주론>은 패도의 사상, 그리고 왕의 전제정치를 논하고, 대신들과 권력을 나누지 않고 왕권의 강화를 설파한 책이다. 그에 반해 <동호문답>은 왕도의 사상을 논하고 있었으며, 왕의 전제정치보다는 신권과 왕권을 동등하게 규정하며,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에 기대를 걸었다. 사상적 차이가 보이는 부분이다.


즉 무조건적인 왕권 주의를 주장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신권 주의도 주장하지 않았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는 재상중심주의 즉 신권 우위적 정치를 주장했는데 반해, 율곡은 신권 우위론적인 정치도 주장하지 않고 왕권을 최대한 포용하며 명신과 명군이 합치된 정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군주와 신권 어느 한 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어쨌든 무게중심에서 기울기 마련이다. 그러나 군신의 공치를 주장하는 이 <동호문답>은 어쩌면, 한반도 최초의 리더십과 팔로워십 양자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최초의 팔로워십에 대한 논고는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잘 밝혀놓고 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신권 중심주의로 흘러가, 결국 그 논의 때문에 그는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율곡도 내심 속마음으로는 억눌렸던 사림이 이제야 기를 펴고 정치에 전면에 나서므로, 신권 우위론을 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왕권과 신권 어느 한 군데에도 무게추를 돌리지 않고 둘의 화합적 정치를 일궈내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율곡의 철학과도 상당히 밀접하다. 율곡의 철학은 화합의 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는데, 퇴계의 주리론과 화담의 주기론을 적절하게 섞은 이통기국론을 주장하는 부분에서 그가 형이상학적으로 추구하던 이념의 화합, 그리고 현실 정치에서도 군신 어디에도 무게추를 두지 않고 화합으로 결론을 도출한 부분에서도 유효했었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의 글에는 이런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런 화합과는 다르게, 사림은 율곡 사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기 시작했으며 지질한 붕당정치로 이어갔다.


어떻게 본다면 율곡은 실패한 정치가로 인식될 수 있다. 뛰어난 혜안을 가졌음에도 선조의 의중을 돌리지 못했으며, 그의 후학들 사림은 붕당으로 쪼개졌다. 그는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대책을 밝혔지만 '실현시키지 못 했다.' 그래서 그는 반쪽짜리 경세가라고 할 법도 하겠다. 하지만, 이 부분은 <동호문답>에서 고찰했듯,


정치는 '율곡' 즉 명신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다. 군주와 여러 신하들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율곡의 책임이라기보단, 그 시대의 관료들이 과오였으며, 결정적으로 조선의 군주인 선조의 책임이 가장 컸다. 어쨌든 율곡은 자신의 경장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했고, 그러한 사상을 저술로 세상에 남기는데 각고의 노력을 다 했었다.


선조라는 임금은 뛰어난 자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혈통상 서자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졌다. 핏줄에 대한 정통성의 약화와 사림의 진출은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선조 입장에서는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신하들을 견제하려고 노력했었고 신하들을 누르려고 노력했었다. 사림 역시도, 지금까지 권신들에 억눌렸던 기세를 이제야 펴리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약화된 왕권은 결국 신권의 강화로 이어져갔다. 선조 이후, 조선사는 사실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대립을 불러왔다. 율곡이 바라고 바랐던 군신공치와는 전혀 반대되는 부분으로 역사는 흘러갔다.


 율곡의 맹신적인, 아니 그 시대 사람들이 맹신하던 왕도정치에 대해서도 사실 비판의 여지는 있다. 무조건적인 왕도정치 역시도 답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가 왕도에 목을 메다가 결국 멸망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동의할 순 없었다. 그리고 시대적인 한계인 중화주의에 대한 부분도 책에 나온다. 바로 오랑캐와 중화에 대한 시각도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이 책에서 가장 의의가 있는 부분은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율곡의 군신공치 사상이 현실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제왕학서들은 군주 우위론적 시각으로 군주론을 전개했었다. 신권은 그냥 무지막지하게 눌러버리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다뤄야 한다(아니 억눌러야 한다.) 는 시각. 그런 방법도 사실 해답은 아니다. 지도자는 왕도와 패도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하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는 율곡의 논의대로 명신들을 존중하고 팔로워십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도 좋은 리더십의 표본이다. 신권을 때론 견제를 할 때도 있어야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신권을 존중하며, 같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최대한 모색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율곡의 군신공치는 화합의 정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사상이 녹여있는 <동호문답>은 그래서 의의가 있다고 느꼈다.


고전을 특히 정치 사상서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했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은 텍스트, 누군가가 볼 때는 한없이 짧은 텍스트겠지만, 읽는 내내, 율곡이 나라를 위해 고민했던, 그리고 그 시름하던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생각했던 고뇌를 읽으려고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러면서 부단히 지금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했었다. 시대는 다르고, 제도적인 부분은 달라도, 근본적인 정치의 개혁적 시각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그와 나의 생각이 많이 닮아있었다.


한 권의 작은 책 안에, 많은 부분이 담겨있다. 평범한 독서당 리포트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큰 책이었다. 손님과 주인의 대화에서 중국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를, 율곡 시대의 아픔을, 사림의 진출에 대한 배경을, 아쉬움 투성이의 선조라는 왕의 고뇌를, 그리고 이 모든 현세의 아픔을 개혁하고자 했던 한 지식인의 열정을, 그 지식인의 열정 안에는 백성을 위한 순수한 마음을, 끝내 실현되지 못 했던 그의 뛰어난 해결책들을... 그래서 책을 보며 그의 통찰에 놀라기도 했으며, 그의 초라한 최후에서 강한 아쉬움과 먹먹함을 느꼈다.


이 책은 서울대에서 펴내는 규장각 우리고전 시리즈다. 책은 상세하게 잘 설명되어 있으며, 해설 역시도 책의 이해를 잘 고찰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리뷰를 쓸 때, 해설에 없는 나 자신의 견해를 많이 투영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규장각 시리즈는 참 해설이 좋다. 책 표지도 아름다우며, <동호문답>과 같은 경우는 곤룡포와 익선관의 표지가 잘 어울린다. 다만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주석을 뒤에 몰아넣지 말고, 본문 밑에 처리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짧은 책인데 주석 편제가 다소 아쉽다. 주석을 보려고 책장을 자꾸 넘겨야 해서 그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다른 아쉬움은 없었다.


쓰다 보니 참 글이 길어졌다. 사실 책의 본문에 딸린 해설이 워낙 뛰어나 이렇게 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이 이렇게 길어졌다. 책을 덮으며, 많은 부분을 느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을 물씬 느낀 책이었다. 율곡의 평전과 율곡의 저서들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동호문답>을 통해 그에 대해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이 책으로 나와 그는 한층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읽었던 <성학집요>를 다시 읽으려 한다. 그가 원했던 군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찰하고, 끝내 선조가 따르지 못 했던 부분들을 거울로 삼아, 나는 실천으로 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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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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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봤을 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문학'이라는 다소 익숙한 단어와, '아토포스'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자아내는 미묘함. 그런 미묘함이 있는 책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런 제목. 그리고 쉬울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았던 책의 내용. 책의 모든 속성이 이 미묘한 제목에 나타나져 있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 달은 굉장히 바빴던 날이었다. 지방으로 여러 번 나가기도 했었고, 여유도 없었었던 한 달이었다. 그래서 책을 볼 시간이 없었고, 신간 평가단 리뷰 기한이 끝날 때 즈음에서야 나는 책을 펴 볼 수 있었다. 미묘한 제목의 책을 집어 들고 펼쳤을 때, 나는 당혹했다. 서문부터 책은 굉장히 불친절한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진은영은 이 책에서 '문학, 아니 나아가 예술과 정치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제로 보면 굉장히 흥미롭고 관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런 주제와는 다르게 책은 상당히 난해했다.


 첫 번째 이유로는 범주다. 일단 다루고 있는 부분이 문학, 그리고 문학을 넘어선 예술, 철학 그리고 사회현상인 윤리, 커뮤니케이션(소통), 그리고 정치 등등의 굉장히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이 책은 문학과 정치 두 축의 올바른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물론 맞다. 주 주제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주제를 다루면서 여러 분야를 언급하여 종횡무진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일단 범주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이 다소 나에겐 버겁게 느껴졌다. 원래 학문은 간 학문적인 고찰을 해야 함이 옳은데, 이 책은 한정된 지면에 비해 상당히 많은 범주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로 책의 서술 방식이다. 저자는 시인이며, 철학자다. 시인과 철학의 공통점은 상징과 추상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책의 서술은 그런 상징과 추상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현은 나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논의보다도 더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녀가 인용을 했던 무수한 철학자들의 통찰이었다. 사실 글을 읽다가,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는 것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문체 서술이 나에겐 어렵게 다가왔었다.


세 번째로는 책의 불친절한 편집이다. 이 책에는 무수한 미학 용어들이 나온다.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정도야 애교라고 할 만 하지만, 아나크로니즘, 스노비즘 등등의 용어 앞에서 나는 무던히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을 해야만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썼을 때, 독자는 이 정도는 지극히 알 것이라고 썼을지 모르겠지만, 대중 저술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최소한 출판사에서 각주나 미주로 용어 풀이를 해 줬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사실 이 책을 끊어서 읽어야만 했던 나는, 책이 전개하는 관념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 해서, 같은 구절을 몇 번을 재독하기도 했으며, 때론 피곤한 몸으로 책을 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졸아, 지하철 몇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책은 상당히 난해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런 불편함을 떠나서, 책은 상당히 심도 있고 진지했고, 열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저자의 고민과 사색,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논쟁과 해답을 담고 있는 저자의 열정이 담겨 있는 책이다. 2008년을 기점으로 저자가 생각한 문학과(예술) 정치에 대한 고민, 기존 사회 통념에서의 문학과 정치의 관점, 자신의 문학관과의 지향해야 할 반향과 현실참여에 대한 생각, 기존 문학계의 흑백논리에서부터 새로운 인식,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그녀의 땀방울. 그것들의 최종 결실이 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녀의 응축된 사색을 한 번에 이해하기란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고민하던 그녀에게서 선물 상자가 떨어졌다.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였다. 그의 저서를 본 그녀는 비로소 문학이 어떻게 정치와 연애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랑시에르가 추구하는 정치와 예술


'그(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에 다름 아니다.' - 26쪽


'랑시에르는 새로운 감성적 분배에 참여함으로써 낡은 분배 형태와 불일치하고 그와 맞서 싸우는 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 27쪽


핵심은 감성적 혁명, 즉 예술은 대중에게 감성적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기존의 규정한 감성적 조직을 교란시키고, 낡은 분배를 타파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치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이고, 예술 역시도 그렇게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며, 대중에게 기존의 형성된 가치를 뒤흔들어 생각할 수 있도록의 감성을 심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술은 한없이 정치적일 수 있다. 양자의 동일 속성(감성적 혁명)이 공명할 때 미학의 정치가 추구된다는 설명.


궁극적으로 정치와 예술은 감성적 혁명을 통해 '미학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 이 결론을 도출하며 기존의 정치관과 기존의 문학관 그리고 문학과 정치를 둘러싼 시선들에 대해 저자는 조용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저자는 랑시에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학계와 정치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인상적인 문제는 바로 '윤리'를 꼽고 나선다. 랑시에르(그리고 저자인 진은영)는 문학과 정치를 규제하는 것에는 윤리라는 가치가 있으며, 그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에 입각한 가치판단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눠버리고 규정해버리는 부분을 통해,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윤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윤리를 대체할 모럴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윤리는 평가하고 선택하는 행동 원리를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토스)에 용해시켜 버리는 체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 133쪽


'모럴이란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 내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 134쪽


이렇게 윤리의 한계를 넘어선 모럴이라는 관념을 문학과 예술은 추구해야 한다고 저자와 랑시에르는 말했다. 이것을 책에서는 '침입의 모럴'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추구하면서 모럴이 윤리화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모럴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리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책의 제목이라 할 수 있는 '문학의 아토포스' 이 기묘한 단어도, 문학과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토포스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서 고정될 수 없어서 그 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 -179쪽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곤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을 또 다른 사회적 -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이다. 이렇게 떠도는 공간성. 그리하여 결코 확장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순간의 토포스를 생성하고 파괴하여 휘발시키는 일에 예술가들이 매혹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간의 연인'이라 부른다. 이 연인- 작가들에 의해 작동하는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 '


긴 문장이지만 사실 두 번째 인용 구절에 이 책의 주제가 나와있다. 규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문학이 흘러들어 문학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책에서 나온 대로, 공간적인 부분 뿐만이 아니라 작품의 기록에 대해서도 유효했다. 텍스트에 기록된 글을 넘어선, 구두 문학에 대한 인식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 문학적이지 않은 곳을 바꾸고 기존의 감각적 공간을 감성적 혁명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공간으로 바꾸는 일말의 모든 것을 문학의 아토포스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아름다울 것 같다. 예를 들어 문학이 아닌 공간인 다른 일상의 공간에서 문학과 예술이 스며드는 것, 예를 들면 벽화마을이라던지 이런 부분은 굉장히 아름다운 예이다. 더불어, 예에서 들었듯, 논쟁이나 투쟁의 공간에서도 과격한 이미지의 투쟁적인 모습보다는, 문학적인 시 낭송을 통한 부분이라던가, 조용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의 문학이 곁든 투쟁은 생각만으로는 아름다울 것 같다.


즉 이 책의 제목 문학의 아토포스라는 것은, 미시적으로는 문학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을 응축시켰고, 마지막 단락에서 볼 수 있듯, 문학의 아토포스는 결국 거시적으론 궁극적인 예술과 문학 정치가 추구하는 '미학의 정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과 특히 랑시에르의 논의를 인용하며 '문학'이 어떻게 '정치'와 밀애를 해야 하는가를 고찰하고 생각했었다. 그 사색의 흐름을 책은 나타내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결론과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문제점 그리고, 바람직한 길까지도 제시하고 있었다.


책이 전달하는 핵심은 결국, 문학(예술)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저자의 문학관에 의거하면 이 저술을 통해 대중들의 통념에 있는 정치와 문학 인식을 깨부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그래서 대중 저술로 책을 냈을 것이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그녀의 고민에 해답을 준 랑시에르라는 철학자를 소개하는 입장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은 두 목적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문제 제기 자체는 옳고 설사 랑시에르라는 철학자의 논의가 참고할 만 하고 기존의 통념을 깰 대안이라 하더라도, 이 책은 너무 불친절하다. 대중이 이 책을 이해하기에 굉장히 난해하며, 대중이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으면 어쨌든 대중의 감성적 혁명을 일으키기엔 무리가 있다. 랑시에르라는 해답을 이렇게 불친절하게 설명해놓는다면 감성적 혁명은 고사하고 싸늘한 시선을 부르지 않을까? 저자의 깊은 숙고와 저자의 깊은 논의, 사색을 좀 더 친절하게 설명을 했으면 어떨까 현학을 조금 덜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줬으면 싶은 '깊은'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대중 저술로 출판된 책이 아닌가? 이 불친절한 논의 덕분에 기존 사회에 주목받을  법한 '랑시에르'의 이론마저도, 결국은 학계 내부에서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대중과 함께 하는 감성적 혁명과 궁극적으로 저자가 추구하는 '미학의 정치'와도 떨어지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다소 급하게 읽고 시간에 치여 읽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다시 읽은 나의 과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난해했었다. 원래 나는 철학적인 주제의 책을 읽을 때 두꺼운 철학 책이 아니면, 쉬는 날 쉬지 않고 책을 쭉쭉 읽어가서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독서를 선호하는데 이 책은 그렇게 읽지 못 했다. 책은 솔직하게 말해서 미와 정치를 규정한 하나의 철학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의 알라딘 신간 평가단을 하면서, 예술에 대한 책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런 핵 폭탄급의 예술 책을 만나게 돼서, 한 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즐겁기도 했었다. 책의 난해함을 떠나서, 문학과 예술에 대해 이러한 시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학과 예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며, 어쨌든 저자의 글을 보며, 저자가 굉장히 문학의 길에 대해 노력하고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는 문인이라는 점도 알았다.



어쨌든 한 줄로 요약하자면 '불친절하지만 의의는 있는 책'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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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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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매력 있는 책이었다. 내가 가장 관심이 없는 분야는 과학과 종교, 그리고 미술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책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거기다 어느 한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설명하고 있으니, 나와 같은 종교에 대한 문외한들에게는 좋은 책이 아닐까도 싶었다.


책이 가장 돋보였던 부분은 바로 종교적인 교리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가기보단, 역사적인 고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고찰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우르라는 도시를 이야기하기 앞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즉 수메르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었다.(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도시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전개가 괜찮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은 적절한 깊이로 수메르 -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의 역사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었으며, 각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현대의 종교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사실 종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이야기할 줄 알고 긴장하며 책을 봤었는데, 생각보다 편안했으며, 한 편의 역사책을 보는 느낌이라, 부담 없이 세 종교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기원전 신석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청동기의 수메르 문화를 시작으로 고대와 중세 현대를 적절하게 고찰하며, 인류의 발자취를 종교의 발전에 따라서 설명하고 있는데, 설명이 자세하고 잘 돼있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 역사를 돌아본 것 같았었다. 생각 외로 책은 어렵지 않았으며, 다소 복잡한 인물 구도가 나오긴 했지만, 비종교인이 보기에도 적절한 수준의 설명이라 만족하며 읽었었다.


 야훼의 선택을 받은 민족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유대교', 유대인에게만 적용됐던 야훼의 축복을 더 많은 대중들에게 확장했던 '기독교' 그리고 유대인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자손에게서 파생된 '이슬람교' 그 3개의 종교 역사를 보며 느꼈던 것은, 극단적 교조주의가 만연했을 때에는 항상 분쟁이 뒤따르고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이 교조주의가 지금 팔레스타인에게 그대로 분출되고 있다. 극단적인 시오니즘에 입각하여 팔레스타인을 억압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같은 경우도 그들이 성전이란 이름으로 자행했던, 십자군 전쟁. 그것은 어쨌든 교조주의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슬람 역시도 멀리 볼 필요 없이 최근 핫이슈의 수니파 근본주의 사상에 움직이는 ISIS 사태를 꼽을 수 있겠다. 


종교가 태어나게 된 본질은, 인간의 풍요와 인간의 내적 성숙을 위해 생겨났다. 인간 스스로의 존재의 자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극한의 시련 앞에서의 대처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지. 그리고 나와 타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의 염원. 이 모든 고민들의 결론을 제시한 것이 종교다. 특히나 위의 3가지 종교는 뿌리가 같았다. 역사적인 고찰로 봤을 때, 한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 나온 세 종교들의 역사를 보면, 항상 그랬다. 극단적 교조주의와 편가르기, 나와 너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순간 종말과 재앙이 왔다. 그리고 그 피의 대가는 엄청났다. 항상 종교적 분쟁이 불러온 희생은 상상을 초월했다. 극단적 종교인들은 그러한 교조주의를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런 부분은 대중에게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굉장한 이기주의, 베타 주의적 태도라고도 나는 생각했다.   


그럼 사실 또 문제인 것이, 그럼 온건주의적 태도로 종교 간 상호 인정을 하게 될 때 그때는 과연 좋은 세상이 도래할까?라는 물음이 일어날 수 있겠다. 책에서는 그 해답을 역사적인 예시로 들어줬다. 바로 이슬람 - 유대교 - 기독교가 공존했던 이베리아 반도 예로 말이다.


책의 342쪽에서 345쪽,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 우마이야 왕조의 사례다. 책을 조금 인용해보자면,


'그 무렵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내에서 무슬림과 기독교, 유대교 신자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공통의 관습과 문화를 오랫동안 형성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3대 종교와 문명이 이곳에서 용광로처럼 융합하면서 암흑기였던 중세 유럽의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아랍 학자와 유대인 학자들이 코르도바(수도)에서 연구한 그리스 철학, 천문학, 의학, 수학이 기독교 세계(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다양한 문화들이 혼합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가 온건한 형태의 이슬람교를 실천했던 결과였다. 그로부터 2세기 동안 문화와 정치발전, 번영과 세력이 절정을 이루었다. '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시대를 제외하고는 세 종교가 뭉치는 일은 없었다. 한 뿌리의 세 종교는 항상 반목했었고, 그렇게 지금도 반목이 진행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책의 불만사항은, 책 제목 <세 종교 이야기>와 같이, 세 종교의 이야기라기보단, 유대인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고, 보조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야기를 다룬 느낌이 든다. 역사적인 사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챕터인 '반목과 갈등의 역사'라는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유대인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그 덕에 유대인이 겪었던 아픔과 희생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게 됐고,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 그들의 생활을 총칭)에 대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인종 말살 특히 유대인) 정책과 같은 부분도 잘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과 팔레스타인 내전 등 극단적 시오니즘에 입각한 유대인들의 모습도 잘 고찰하고 있다. 다만 이슬람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줬으면 어떨까 싶었다. 이슬람의 과격단체나 그들의 테러 등을 다루는 것도 사실 기대했는데, 끝까지 시종일관 유대인 중심으로 현대사를 풀어나가서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물론 뭐 이 한 권에 그 방대한 현대사들을 다 다룰 순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가 아쉽다.


그래도 유대인에 대한 역사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봤었다. 핍박받은 그들이 왜 역사적으로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그들이 왜 자꾸 팔레스타인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는 했지만, 피는 피를 부른다고, 그들의 피해 의식을 교조주의로 승화하여 정당화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실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사실 책을 보며, 유대인들에게 배울 점도 많지만, 나쁜 점도 되게 많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핍박받은 데에는 그들 자신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일단 너와 나를 가른 것은 유대인이 먼저 시작했었다. 책을 읽으며 유대인에게 가장 싫은 부분이, 바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 의식이다.


어쩌면 국가를 잃은 유대인들을 살린 것은 그 정신적 우월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부심을 잠시 거두고, 포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들의 학살과, 현 이스라엘이 자행한 가자 지구 하마스의 수많은 민간인 살상. 사람의 수를 따지지 않고 행위의 본질을 보자면, 두 행위는 똑같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미 국제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을 보이지 않게 두둔하고 있다.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 국민들도 이제는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독립했을 때, 예루살렘에 이렇게 기록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독일이 유대인에게 자행했던 것을 용서는 하되 잊지 않는다는 취지로 썼다고 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 문구를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자국이 하는 짓은 과연 팔레스타인에게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어쩌면 팔레스타인에겐 이스라엘 자체가 나치로 인식되는 것처럼 비치진 않을까?


피는 피를 부르고, 보복은 보복을 부를 뿐이다. 그것은 책에서 나온 역사적 사례로도 충분히 증명되며, 역사를 떠나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 종파들은 이런 일을 자행하며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이 국제적 분쟁들의 핵심은 종교적인 부분에 있다. 인간의 평화화 행복을 위해 태어난 종교가, 지금은 인간 현세에서 가장 큰 분쟁거리를 선사하고 있는 이 기막힌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좀 더 온건하고 관용적인 태도로 서로를 틀리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 다르다고 인정하는 자세,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가 갖춰질 때, 인류의 화약고인 중동과 이스라엘 지역은 분쟁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비단 중동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단체들도 이러한 부분을 숙고하는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전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는 제2의 우마이야 왕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서평을 작성하고 나니 이웃님의 포스팅에서 봤던 한 편의 시가 생각난다. 부디 종교가, 다른 종교에게도, 그리고 궁극적인 인류의 사회에도 이런 모습으로 다가와 주길 기원하며 남겨본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똑같은 해와 달 아래

똑같은 주름을 만들고 사는 것이라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의 강가에서 똑같이

시간의 돌멩이를 던지며 운다는 것이라네

 

바람에 나뒹굴다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

똑같이 흩어지는 것이라네 

 

문정희 시인의 시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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