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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ㅣ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평점 :
1. 조선이라는 콘텐츠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조선사를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사 ~ 중세까지는 설렁설렁 공부해도 괜찮지만, 조선부터는 수업에 집중하고 절대 졸지 말아야 한다.' 수능 시험문제나 모의고사 시험문제를 살펴보면, 조선사의 비중이 다른 왕조보다 높은 편이다. 많이 나올 때에는 전체 시험의 40%가 조선사의 문제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의 70%는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교양서나 도서의 배경도 조선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왜 신라나 고구려, 백제, 가야, 고려가 아닌 조선이 역사 대중 콘텐츠의 핵심으로 꼽히는 것일까? 왜 다른 시대보다 조선 시대가 시험 범위로 많이 나오고 전공하는 사람도 많은 것일까?
해답은 전해오는 유물들이 다른 왕조보다 훨씬 풍부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적이나 유물은 다른 왕조에 비해 훨씬 정교하게 내려온다. 한양의 5대 법궁을 비롯하여, 조선왕릉 등등은 비교적 온전하게 내려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을 다룬 기록도 다른 시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풍부하다. 이런 조선의 풍부한 기록 문헌 중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이 방대한 역사 거작 덕분에 우리는 당시의 조선시대를 디테일하고 풍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엄청 방대한 저작이며,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다면 완독하기란 매우 어려운 책이다. 조선에 대한 생동감 있는 정보를 담은 책이지만 전문가들조차도 완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도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사 교양 분야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일반인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여 만든 책이 다수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등등이 있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메인 테마로 내세운 역사 교양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의 분량으로 압축시킨 이 책은 출간 이후 지금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성공 이후 저자는 《고려왕조실록》, 《고구려왕조실록》, 《백제왕조실록》, 《신라왕조실록》 등등의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의 후속작을 썼지만 《조선왕조실록》만큼 인기를 얻진 못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은 바로 만화라는 점이다. 만화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의 정치 분야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는데,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매우 신선했다는 평이 있었다. 20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전집이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교사들이 추천하는 조선사 교양만화로 꼽히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조선왕조실록》 교양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대세 스타 강사라고 할 수 있는 설민석은 《조선왕조실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해설했는데,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책이었다. 물론 나의 이런 아쉬움과는 다르게,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을 테마로 한 도서가 이토록 넘치는데도,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메인 콘텐츠로 내세운 시리즈 도서가 또 발간됐다. 재야 역사학자로 이름난 이덕일이 저술한 《조선왕조실록》 전 10권 시리즈다. 만화 시리즈물로 《조선왕조실록》이 나온 경우는 있었지만 텍스트 시리즈물로 《조선왕조실록》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텍스트 중심의 《조선왕조실록》은 한 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10권 분량의 장편으로 기획됐다. 그리고 최근 《조선왕조실록 1 태조》와 《조선왕조실록 2 정종 태종》편이 발간됐다.
2. 태조 - 뚝심의 양면성
1권의 주인공은 태조다. 책의 뒷날개를 살펴보니, 한 권에 3명의 군주를 평균적으로 다루는 것 같은데 1권은 태조 한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책은 태조에 집중하고 있지만 태조 이전의 시대, 고려 말기의 혼탁한 배경에 대해서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좌절, 그리고 권문세족의 갑질, 토지 제도의 문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등 망하기 전 고려 말기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태조의 성품은 매우 겸손하고 차분하다. 전형적인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에 있어서 신중하게 행동했고,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정도전을 스승으로 예우했으며, 몰락하는 고려의 충신들에게도 최대한 머리를 굽혀 예우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태조였지만, 뚝심을 발휘할 때에는 누구보다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개혁 세력의 집중, 고려왕의 택군(擇君), 그리고 나라의 건국, 수도 이전, 명나라와의 일전 불사, 군권 장악, 막내 세자 책봉 등등은 태조의 뚝심 있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태조는 자신이 전면적으로 나서 모든 일을 관장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전문가가 있을 시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전문가를 밀어주며 전문가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태조의 리더십은 《삼국지연의》의 유비와 비슷하다. 나관중의 소설에서 유비는 제갈량이라는 전문가에 국가 정책을 일임하고 따르는 수동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태조의 모습도 이와 흡사하다. 토지 전문가인 조준에게 토지 개혁을 맡기고, 행정 전문가인 정도전에게 나라의 시스템과 행정을 전적으로 일임했다. 군왕인 태조의 역할은 이런 전문가들이 힘 있는 공신들로부터 방해받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것이었다. 이런 태조의 수동적 리더십은 아들 태종의 적극적인 리더십과는 무척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태조가 무조건적으로 수동적인 모습만을 보이진 않았다. 수도 이전과 세자 책봉, 그리고 명나라와의 전쟁 불사 등등은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태조의 적극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일수록 화가 나면 더 무섭다고 하듯, 태조 역시도 마찬가지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이지만 한 번 밀어붙일 때에는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강단이 있었다. 태조의 뚝심이 긍정적으로 구현된 것은 대표적으로 한양 천도다. 자신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과 조준까지도 수도 이전을 반대했는데, 태조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고 우직하게 한양 천도를 밀어붙였다. 강력한 리더십의 상징인 태종이라도 모든 신료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과연 이렇게 뚝심 있게 수도 이전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아마 태종이라도 이런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도저 같은 태조의 뚝심은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태자 책봉이다. 한양 천도를 신속하게 감행하고 군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태조는 스스로의 힘을 과도하게 자만했다. 이러한 태조의 자만심은 무리한 태자 책봉으로 이어졌다. 창업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공적이 없는 풋내기 막내를 태자로 세운 것이다. 이런 자만감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태조는 결국 아들 이방원에 의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런 태조의 몰락은 아까 비유했던 《삼국지연의》의 유비와 흡사하다. 소설에서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감정적으로 반응했고, 제갈량을 비롯한 수많은 신료들이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권을 정벌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무리한 고집으로 감행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유비는 백제성에서 비명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만약 태조와 유비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신중함과 경청의 마음을 견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조를 무너트린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방원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절제하지 못했던 태조의 자만심과 그 자만심을 밀어붙인 뚝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태조는 뚝심 덕분에 조선을 건국했지만, 뚝심 덕분에 권력을 잃기도 했다.
3. 저자에 대하여
이덕일은 논란이 많은 사학자다. 주류 사학에서는 그를 두고,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국수주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문헌을 오독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이덕일은 주류 사학은 노론 - 친일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그들이야말로 무비판적인 왜곡을 그대로 수용한다며 날을 세워 반목한다. 그래서 이덕일은 한편으로는 굉장한 비판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굉장한 호평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이덕일의 가장 큰 공적은 바로 세조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전작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에서 저자는 세조와 그에 편에 섰던 공신들이 반정의 승리로 얻었던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료를 제시하며 날 선 비판을 하였는데 굉장히 공감하며 읽었다. 그 외에도 사도세자와 송시열, 그리고 윤휴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비판적인 견해에는 공감이 갔지만, 너무 비약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자료 해석을 최대한 자주적인 관점으로 하고 있는데, 가령 태조 이성계가 중원의 황제를 꿈꿨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과연 이성계가 황제를 꿈꿨을까? 내 생각은 다르다. 태조 이성계가 북벌을 감행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주원장의 갑질 때문이었다. 애초에 조선의 건국 콘셉트는 사대주의였고, 이성계 역시 이런 태도에 적극적이었다. 나라 이름을 명나라에 묻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명에 세력권에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노력한 태조인데 명나라의 주원장은 이런 태조의 러브콜에 갑질로 응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태조는 홧김에 북쪽 대륙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며, 정도전 역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북벌로 뚫으려고 노력했다. 즉 태조와 정도전이 북벌을 한 목적은 정권의 안정과 권력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였지, 중원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를 꿈꾼 것과는 거리가 있다. 설사 칭제를 언급했다 하더라도, 이는 명분을 위한 정치적 수사일 다름이지 현실적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조선 중기 효종과 송시열이 말로만 북벌을 하겠다며 과장 액션을 취하던 것과 비슷하다.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과 칭제를 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저자는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했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여말선초의 시대를 잘 정리한 역사서인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의 원전 번역본을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역대 군왕들 중 태종과 같은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깊이 알아보는 과정에서 《태종실록》을 천천히 완독하고 있는 중이다. 태종을 알기 위해서는 《태종실록》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태조와, 그의 형인 정종, 그리고 그의 아들인 세종까지 살펴야만 한다. 그러나 읽으려는 《조선왕조실록》의 범위를 태조와 정종, 세종까지 넓히면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에, 《태종실록》은 모두 읽되 태조와 정종, 세종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잘 정리한 개론서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에 기획된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또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정리를 떠나서, 여말선초 격동의 인물들을 이덕일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의 관점도 궁금했다. 다음 권은 정종과 태종을 다룬다. 태종 이방원. 태조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실질적인 하드웨어를 완성한 인물. 그런 그를 저자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