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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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지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선조의 경우, 역사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과의 비교 때문에 비난의 강도는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책은 그런 선조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선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선조의 공과 사를 냉정하게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었다. 비난 일색의 선조에 공과 사를 구분하여 밝힌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국민 정서와 견해와는 대치되는 부분이 있기에, 책의 평가 역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추측됐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버를 비롯하여 여러 도서사이트에 이 책의 서평을 읽어봤는데, 좋다는 평도 있었고, 나쁘다는 평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책의 평가는 낮은 편이었는데, 내용은 이성이 아닌 감정적인 공분을 앞세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선조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군왕이지만, 너무 여론몰이식으로 매도하여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고루 존재한다. 위대한 인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며, 역사적으로 악독한 악인들에게도 손톱만큼이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선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진전쟁 때의 선조의 처세를 생각하여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지만, 그런 선조도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책은 그런 선조의 장점을 최대한 고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을 참고 자료로 읽었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선조의 장점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나 스스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은 결과, 의외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선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생각한 바, 내가 생각한 선조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치세의 시기에는 정치력이 상당히 괜찮았던 지도자였다. 우리는 흔히 선조를 생각할 때 리더십이 없고 줏대 없이 무능한 모습만 보인 군왕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선조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정치적인 식견과 권력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발달한 군주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그렇기에 역대 다른 국왕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미숙하며 소극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노회한 신하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하며, 자신의 권력 즉 군주의 권한을 차츰차츰 강화했다. 실제로 임진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선조의 정권은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임진전쟁이 끝난 뒤에도, 선조는 현실 권력을 잃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권력의 핵심을 잘 간파하고 있었으며, 권력의 역학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 군주였다.

두 번째로는 인재를 보는 눈이다. 선조가 인재를 잘 본다니 그럼 이순신과 같은 명장은 왜 못 알아봤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선조는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4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는 지도자다. 다만 선조가 이순신에 관한 인사를 판단했던 때는 바로 '난세'였다. 앞에서 고찰했고, 뒤에서 밝히겠지만 선조의 리더십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난세에 보여줬던 아쉬운 리더십이다. 반대로 선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앞에서 고찰했듯 치세의 시기에 보여줬던 리더십이다. 이런 치세의 리더십에서 가장 빛을 발휘한 부분이 바로 인사권이다. 선조는 사람을 잘 간파하고 잘 읽어냈다. 특히 문관들의 인사에 있어서는 굉장히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던 군주다. 치세의 시기에 권력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사람을 잘 읽어내는 인사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로 중화사상 즉,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다. 선조의 인사 정책, 그리고 선조의 성향을 잘 고찰해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는데 바로 편파적인 사람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온화하고 온건하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철과 같은 극단적인 서인을 기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선을 넘을 때에는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등등 선조가 주로 중용했던 인사들은 당파색이 있는 인물이지만 대체로 온건하고 과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선조가 이순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의 극단적인 단호함에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네 번째로 선조는 실증적이고 자연과학적인 탐구정신이 많았던 지도자다. 선조가 집권할 당시에는 학문적 흐름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선조 역시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하지만 경연을 하거나 신료들과의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얼음'에 대한 질문, 그리고 '땅과 우주'에 대한 실증적인 질문을 하는데, 이런 부분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자들이 대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질문이었다. 또한 임진전쟁 때부터 애독했던 《주역》은, 일반적으로 점을 치는 책으로만 생각하는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역》은 자연현상을 인문적, 철학적으로 풀이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항간에서는 《주역》을 동양 최초의 인문 과학서로 칭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선조가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실증을 바탕으로 한 과학 과목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으니 아마 오늘날에 환생한다면 자연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선조는 치세의 시대에서는 세종과 같은 먼치킨 능력을 가진 군왕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실제로 당시 집권세력인 사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군왕으로 선조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선조의 지적 능력 역시 그런 신하들의 기대를 충족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시대에 만약 임진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혹평을 받는 군주로 역사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난세의 시기 선조의 무능한 리더십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행정의 체제적 문제, 그리고 신하들의 탁상공론으로 인한 문제 등등을 간과하고 임진전쟁의 결과적 책임을 선조에게만 돌리는 것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을 가진 선조였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어쨌든 임진전쟁은 그의 집권기에서 터졌고 그랬기에 선조의 문제점은 그런 난세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조의 단점을 열거해보자면 첫 번째로는 여색에 대한 집착이다. 선조는 유독 여색에 집착했다. 집권 초에는 군왕 수업을 받고 가르치려고 드는 대신들로 인해 마음이 외로웠고, 그런 외로움을 후궁들에게서 해소했다. 이런 호색은 임진전쟁 때에도 이어졌으며 집권 말기에는 왕후를 새롭게 들여서 훗날 왕실의 분란을 예고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줏대 없는 행동이다. 임진전쟁 때에 선조는 유독 줏대 없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 치세의 시기에는 나름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서생 특유의 문약한 모습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번복하고, 백성들에게 성을 사수한다 약속한다며 자신은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으며, 여색과 줏대 없는 행동이 결합된 결과, 훗날 대권 구도에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불렀다.

세 번째로 자신감이다. 선조는 늘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치에 있어서는 늘 한발 물러나고 온건한 방향만을 고집했다. 물론 온건한 방향이 사회통합적인 면에 있어서는 장점으로 적용하지만, 때론 지도자가 자신 있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다. 특히 난세의 경우는 더더욱 지도자의 강단을 요구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에 선조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에 있어 자신감이 부족한 선조의 심리에는 분명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임진전쟁 직후에는 전쟁에 대한 속죄 의식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는 결국 책임 의식 결여, 현실 기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선조는 말로만 전쟁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의 결과를 책임지는 모습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네 번째로 그릇의 크기다. 선조의 집권기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속 좁은 도량이다. 사실 군왕들은 자신의 명성을 넘어서는 신하를 경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조는 유독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질투심이 심했다. 그래서 자신과는 대조적인 이순신을 경계했고, 의병들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치세의 시기에 군주의 명성을 넘어서는 세력이 생긴다면 경계의 필요성이 있겠지만, 때는 난세였다. 이런 난세의 상황이라면 허심탄회하게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영웅들을 인정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지도자의 바람직한 도량인데, 선조는 그런 그릇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좁은 도량을 가졌기에 4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온 국민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 말기의 모습이다. 선조의 정권은 전형적인 용두사미 정권이다. 정권 출범 당시에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선조의 정치력 역시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기점으로 그 후의 모습은 초심을 잃은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았다. 정권 초기에는 영민했기에 공부를 하며, 정치력을 키워나갔고, 현실 정치도 치우침 없이 배우던 군주였지만, 정권 말기에는 국난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탕으로 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영민한 모습은 영악한 모습으로, 뛰어난 자질을 기대했던 정치력은 음험한 모략가의 기질로 바뀌었다.

사실 선조의 자취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적인 연민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군왕이 된 것이 아니다. 윗선과 신료들의 의논으로 인해 왕위가 결정 났고, 그런 상황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수구적인 훈구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사림은 그런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선조를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은 군주로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 역시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황과 이이, 기대승 등등의 최고의 성리학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림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윤리와 도덕관은 자신이 실천하기에 너무나도 높은 이상이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 출신인 그였기에, 최대한 신료들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앞에서 선조는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신료들 사이에서 선조는 고독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색을 통해 그런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서울대를 갈 수는 없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하더라도 공부 스타일이나 방법론에 따라 서울대를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다. 선조도 그랬다. 그는 나름 똑똑하고 영민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사림은 그런 영민한 선조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대했다. 어느 순간 선조는 그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런 후로는 신료들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건성으로 들으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한도를 설정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름의 노력도 임진전쟁을 겪은 뒤로는 뒤틀려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 인간이라면 가장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는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감정적인 부분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선조를 생각해보면 역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의 위치는 연민만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고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다. 그랬기에 임진전쟁이 터졌을 때, 좀 더 의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난세의 시기 너무나도 문약했고 비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약한 그의 내면에 연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비판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도자란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당시 그는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부터 선조는 도망쳤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지도자는 태종 이방원이다. 조선 역사, 그리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난세에 있어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보여준 군주는 태종 이방원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태종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자신감을 발휘하여 정치에 임했으면 아마 임진전쟁이라는 난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항간에서는 아들인 광해군과 선조를 비교하며 광해군을 칭송하고 선조를 내려깎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외교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광해군이 선조보다 나은 실리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치와 조정 신료들을 다루는 부분으로 생각해보자면 광해군은 선조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광해군이 몰락한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측근 정치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당파만을 믿고 편협하게 사람을 임용하였으며,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결과, 몰락했으니 말이다. 반면 선조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당파의 신료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광해군이 만약 선조의 스타일대로 온건하고 치우치지 않은 인사정책을 따랐더라면 어쩌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책을 통해 선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았다. 물론 책 부분 부분에는 나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점도 있다. 변명하는 선조의 모습을 진심 어린 모습으로 해석하는 부분 등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지적하는 선조의 장단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선조를 이야기할 때 여론과 일반적인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사실 그랬는데, 이 책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선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책의 장점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당시 정계의 판세와 흐름을 명료하게 정리하여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당파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대립했는지, 선조의 정치적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고, 엄청나게 피곤한 자리이며, 엄청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는 교훈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오히려 선조가 군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고 멋지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는 학구적이며 탐구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시와 서예를 잘 쓰는 풍류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그런 인물이 강압에 의해 억지로 왕이라는 옷을 입고 행동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또한 그렇게 노력하며 집권하는 당시, 임진전쟁이라는 큰 핵폭탄이 터졌으니 서생 기질이 다분한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그래서 나는 선조의 인생에서 1차 비극이 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2차 비극이 그의 집권기에 임진전쟁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인생을 과연 행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저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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