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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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각, 평가로 볼 때 연산군과 광해군은 문제가 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광해군을 재조명한 시각의 대중 역사서라던가, 드라마, 영화 등등이 나왔고 이런 영향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있어 광해군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해군과는 대조적으로 연산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물론 연산군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도 있지만, 두루 읽어본 결과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그런 연산군을 최대한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의 문치를 완성함과 동시에, 언관들의 힘을 강화한 지도자였다. 기존의 언론을 담당하던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성종의 친위세력을 담당했던 홍문관도 언관 활동에 깊이 개입하였기에, 이 세 기관을 우리는 삼사라고 일컫는다. 조선 개국 이후 여러 시행착오 끝에 귀결된 통치체제는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는 구조였고, 이를 완수한 인물이 바로 성종이었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집권할 당시, 삼사는 그 권력이 아주 막강한 상태였다. 연산군은 국왕과 대신 그리고 삼사가 균형을 이루고 운영하는 정치체제를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극단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집권 초반에는 집정 대신들도 막강한 삼사의 권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이런 연산군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조했다.

  그런 연산군과 대신들의 협력이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무오사화'다. 흔히 무오사화를 언급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훈구와 사림의 구도로 단순 도식화하여 해석한다. 대신들은 훈구, 그리고 삼사 쪽은 사림이라고 판단하여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가 주장한 바로는 이 당시 조선의 행정 중 삼사는 담당 인물들의 성향에 의해 조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삼사라는 자리가 관원들의 관념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기에게 태클을 거는 삼사를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삼사의 수장으로 임명한다고 가장해보자. 이렇게 할 시 삼사가 왕권에 협조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연산군은 가질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자신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삼사의 수장이 되면 자신을 비판하고 나섰으니, 연산 입장에서는 삼사라는 기관 자체가 매우 성가시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듯 훈구 쪽 인물이더라도 사헌부나 사간원의 수장을 맡게 될 시에는 국왕을 압박하는 입장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그러니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았던 훈구 - 대신, 사림 - 삼사라는 공식은 면밀하게 검토하여서 해석할 필요성이 있는 셈이다.

  물론 무오사화를 통해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 세력들을 제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종직 일파의 처결은 명분에 해당되고, 실제 연산군과 대신들이 겨눈 것은 최종적으로 '삼사'였다. 저자는 이런 무오사화를 뒤이어 벌어지게 될 갑자사화와 비교하여 비교적 절제된 처벌이었으며, 이는 연산군이 삼사에게 내리는 경고성 이벤트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뒤이어 벌어질 갑자사화의 엽기적인 처벌에 비하면 무오사화는 '사화'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연산의 입장과 대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정치의 균형을 맞추는 정당한 행위라고 볼 수 있었으며, 피해도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당시 삼사의 권한은 엄청 막강하여서 대신들을 수시로 탄핵하고, 탄핵만을 위한 탄핵을 일삼으며, 권세를 높여가고 있었는데, 연산과 대신 입장에서는 정치의 균형이 깨지는 것으로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하여 삼사를 제압한 뒤, 절대왕권을 위해 한 걸음씩 더 나아간다. 문제는 연산이 꿈꾸던 절대왕권 속에는 치국과 민생에 대한 실체적인 부분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물론 말로는 민생을 위하는 군주라고는 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이 보여줬던 행동은 개인적 일탈의 모습뿐이었다. 견제가 힘든 전제왕권을 필두로 한 일탈은 그 자체만으로 왕조를 위협하는 칼날이었으며, 이런 연산군의 일탈을 묵묵히 지켜보던 대신들은 오히려 삼사와 의견을 함께하여 폭주하는 연산을 말리기 시작한다. 이런 범 신권 연합은 연산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런 신하들의 움직임은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성종의 정치는 대체적으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가장 큰 결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내였던 윤 씨를 죽인 사건이다. 당시 신료들은 세자(연산군)을 봐서라도 극단적인 처사를 취하할 것을 주장했지만 화난 성종은 결국 윤 씨를 죽여버렸다. 훗날의 폭풍을 우려하는 신하들에게 성종은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로 일갈하는데 '그때 가면 그 상황에 맞게 처신할 것이고 세자가 효자면 내 뜻을 이해할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신하들을 억누른다. 결국 연산군의 폭주는 따지고 보면 성종의 정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삼사의 강화고, 두 번째가 바로 윤 씨의 사사였다. 섬세한 감정을 가진 연산군은 이 두 가지 사안을 빌미로 하여, 역대 이래로 시도하지 않은 전제적인 왕권 강화에 나섰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경고성 이벤트였다면, 갑자사화는 연산의 폭주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권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중앙 관료들 역시 굉장히 많았다. 잔인한 피의 숙청을 이룬 뒤, 연산은 위태하게 구축한 절대 왕권을 바탕으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자신의 사치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게 하기 위해 담장을 높이고 궁궐 수리를 넓혔으며, 궁 주변의 민가를 헐어버리고 경기 일대의 절반을 사냥터로 만들었다. 국왕을 말릴 수 있는 신하는 조정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민심은 연산군을 떠나고 있었다.

연산군을 변명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산군일기》는 반정을 이룬 중종 세력이 집필한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왜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런 말에 역대 실록의 분량과 《연산군일기》의 분량을 비교하며 큰 차이가 없으므로, 의도적인 왜곡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없는 사실을 가지고 지은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연산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오사화까지는 그래도 포용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연산 집권 당시 삼사의 권력은 굉장히 강했으니까. 다만 문제는 무오사화 이후의 모습이다. 연산군이 만약 민생안정에 뜻이 있고 정치에 뜻이 있다면, 강화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러나 연산은 그렇지 않고 강화한 권력을 보란 듯이 누리는데 사용했다. 그렇게 신료들을 향해 권력을 과시하며 복종만을 요구하는 군주에게 어느 누가 충성을 다하겠는가.  

특히 갑자사화는 전제왕권의 부패가 만든 비극적인 사건이다. 물론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연산군에게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개인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신권을 탄압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과오일 뿐이다. 이때 연산이 신권을 탄압한 것은 조선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왕권 강화에 힘을 들이던 태종과 세조조차도 신권 세력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탄압하진 않았다. 조선은 애초부터 건국 이념이 군신 공치를 지향하던 나라다. 이런 연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무시한 것이며, 어떻게 해석해보면 국정운영의 공동 파트너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자》에 이르길 아무리 궁지에 몰린 군대라도 도망칠 곳은 열어주라고 했다. 이런 극단적인 탄압은 결국 신하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연산군은 폐위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재미있는 점은,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과 기질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성종 역시 다혈질에 직선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연산군 역시 마찬가지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풍류가적 성격을 가졌는데 이는 연산군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치를 부렸던 점이며, 여자들을 가까이한 점에서도, 성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종 역시 호색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다만 연산군과 성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제력이다. 성종은 그래도 일탈을 즐기고, 신하들과 싸우다가도, 종국에 가서는 자제력을 발휘하였다면, 연산군에겐 그런 브레이크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 무오사화 이후, 삼사와 대신들을 너무 억압하지 않으며, 국정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성군이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무오사화 정도의 사건은 다른 치세에도 비교적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사건이니, 이때에 강화한 왕권으로 좀 더 정치에 매진하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약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삼사와 대신의 손을 잡고 국정을 잘 운영했더라면, 아마 조선의 정치구조는 왕권을 우위로 한 체제로 지속되지 않았을까. 어쨌든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로 인해 연산군 이후의 왕들은 강력해질 대로 강력해진 대신과 삼사 때문에 제약적인 왕권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연산군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 약화를 초래하게 된 셈이고, 이런 체제를 후대의 왕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며 또 눈에 들어온 점은 바로 무리한 공납(특산물 세금)이다. 연산군은 팔도에서 진귀한 특산물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됐던 지도자였다. 이런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각도에서는 공물(특산물)을 마련했는데 이를 위해 백성들의 노고가 엄청났을 것이며, 그렇기에 생겨난 방납의 폐단도 말도 못 했을 것이리라. 이런 방납의 폐단은 조선 중후반기 대동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백성들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물론 방납을 전적으로 연산군의 탓으로 돌릴 순 없겠지만, 연산군의 사치로 인해 공납이 많아졌고, 연산군 이후의 왕들도 연산군이 받았던 양만큼 공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두고두고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방납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따져보자면 연산군의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해보자면 연산은 후세에 방납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더욱 약해진 왕권을 물려준 꼴이 된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되도록이면 좋은 시대, 좋은 인물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고, 역사 교육에서도 찬란한 시대를 강조하여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문제가 있고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시대도 마찬가지로 조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산군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는 권력을 강화해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했던 인물이다. 물론 그런 연산군의 생각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강화한 권력을 정치나 경제 민생 개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향유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날 사회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보단 연산군과 같이,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사욕에 충실하려는 인물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쩌면 세종과 같은 이상적인 인물보다 연산군과 같이 비교적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에게서 배울 점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학술적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저자는 사학계에 만연한 훈구, 사림이라는 단순화된 도식 구도를 걷어내고 (우리는 흔히 훈구는 악, 사림은 선이며, 사화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만 간단하게 도식화하여 해석하는데, 실제 한 시대의 역사는 이렇게 단순화하여 설명할 순 없다.), 최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연산군과 그 시대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분석하여 해석하고 있다. 실증적인 데이터, 그리고 명료하게 정리된 필력이 인상적이다. 책의 바탕은 논문이고, 저자 역시 사학 분야에서 정통한 전문가여서 그런지 부분적인 단어 수준은 다소 높은 편이고, 현학적인 문장이 더러 있으며, 글의 성격도 학술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비전공자가 못 읽을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문성과 대중 역사서의 장점을 두루 갖춘 양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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