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9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9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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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권의 핵심은 바로 붕당 견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태종은 이해에 군권에 집착하고, 양위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런 사건들은 결국 '신료들의 사사로운 붕당을 견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흔히 태종의 2차 양위 소동을 민씨 형제들의 처벌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행위라고 해석하는데, 내가 읽어봤을 때 이해의 태종은 민씨 형제를 넘어서, 신료들의 붕당 자체를 근절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된 표적은 민씨 붕당이었지만, 그와 함께 이숙번의 당여들에게도 경고를 날린 점을 살펴보면, 애초에 태종의 2차 양위는 신권의 붕당 자체를 근절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권은 유독 '정치 9단 태종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민씨 붕당을 꾀어내어 잡아들여 처벌하는 모습도 그렇고, 벼르고 벼르던 기회주의자 이무를 단칼에 죽인 모습도 인상적이다. 태종의 은밀한 '처벌 가이드라인'을 확인한 대간은 민씨에 붙었던 역당들을 굴비 두릅처럼 엮어서 모두 역모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태종의 반응이다. 언관들을 유도하여 민씨 일당에 붙었던 인물들을 대거 재판장으로 끌어낸 태종이지만, 처벌에 있어서만큼은 굉장히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언관들은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사형으로 다스릴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태종은 주모자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다. 중요한 것은 붕당을 이룬 중심세력일 뿐이지, 부화뇌동하며 붙은 잔챙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한 셈이다.

  사실 《태종실록》을 읽다 보면 태종은 공신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편이다. 같은 죄를 지어도 공신의 자제들은 쉽게 용서해주고, 솜방망이 처벌을 했던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기에, 이무와 같은 공신이 민씨 일당으로 거론됐을 때에도 조정 신료들은 습관적으로 사형을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공신이니까, 용서해주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무와 친했던 하륜도 이무를 두둔하며 살려줄 것을 주장했는데, 그런 하륜에게 태종은 '너도 행실 똑바로 해, 너도 역모로 다스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아.'라고 일갈하며, 이무를 사형시켜 버렸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사건은 보통 때와는 반대로 거물급 공신을 죽이고, 잔챙이들을 살려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왜 공신 중에 공신인 이무를 죽였던 것일까.

  실록에서 태종은 이무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즉 무인년 방석과 방번, 정도전 일당을 죽일 때, 정도전 쪽과 자신의 쪽을 저울질하며, 붙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중적인 행동으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행동을 보였던 셈인데,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에도 이무는 민씨 일가들을 주살할 것을 권하면서 뒤로는 귀양간 민씨 일가들의 편의를 봐주고, 민씨 일가들이 죄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것 외에도 분경 문제, 인사 청탁 문제 등등의 소소한 잘못이 있었지만, 결국 이무가 주살된 주요 원인은 기회주의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태종은 이무를 공신으로 대우하고 굉장히 예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무는 민씨 일가의 붕당에 협조하여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미래 권력인 세자에게 아부했으니 태종의 입장에서는 화가 났던 것이다.

  이무는 태종이 죽인 최초의 고위 공신이었다. 이무의 처결로 인해 태종은 공신들에게, '아무리 공신이더라도 선을 넘고, 왕권을 넘보는 자가 있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베어버릴 것이다.'라며 강력한 경고를 날렸다. 지금까지는 공신에 관대했던 태종이지만, 아무리 공신이더라도 사적인 붕당을 이룬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무의 죽음을 통해 대외에 선포했다. 흥미로운 점은 민씨 당여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태종이 이숙번의 당여들에게도 일갈했다는 점이다. 또한 태종이 양위를 선언하며 신료들을 꺼릴 무렵, 이숙번과의 독대 과정에서 태종이 은퇴를 이야기하자 이숙번은 '50살에 이르러 은퇴를 해도 늦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태종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정사에 복귀한다. 여기서 이숙번의 대화는 관점에 따라서 신하의 입장에서 군주의 은거 시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역모에 해당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은 그런 이숙번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훗날 이숙번은 정치적으로 실각하는데, 그때가 바로 태종의 나이가 50살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아마 태종은 이때의 이숙번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종이 공신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나는 광해군의 역모 사건이 떠올랐다. 광해군과 태종은 권력에 대한 정통성이 결여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서자 출신의 광해군보다 태종의 정통성이 높긴 하다만, 장자가 아니라는 점,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두 군주의 정통성은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태종과 광해군은 결여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해 왕권 강화를 주도했다. 그런 왕권 강화에서 신권의 숙청은 필연적이다. 다만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은 공통적이지만 방법은 매우 상이했는데, 태종의 경우 붕당을 이룬 주모자를 처벌하고, 붕당의 주변인들은 살려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반면, 광해군은 주모자와 주변인 모두를 처벌했으며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건을 확대하여 쓸데없는 희생을 불렀다. 결국 이런 무리한 광해의 숙청은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결국 신료들의 반정으로 이어졌다. 만약 광해가 태종의 숙청을 참고하여, 희생을 최소화하고 상대의 붕당을 포용하는 인사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태종은 신권 숙청을 하였지만, 내부적 반발이 거의 없었으며, 특히 이번 민씨 형제들과 이무 숙청을 계기로 강력한 통치체제를 완성했으니, 신권 숙청의 방법론, 그리고 결과로 살펴볼 때 광해의 정치력은 극단적이고 미숙한 반면 태종의 정치력은 노회하고 안정적이다. 아무튼 태종은 이번 사건을 통하여 더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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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8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8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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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만, 그래도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태조 이성계의 죽음이다. 사실 태종을 이야기할 때 불효는 단짝처럼 따라붙는다. 왜냐하면 정도전과 방석, 방번을 죽였던 무인정사를 비롯하여, 집권기에 조사의의 난까지, 태조와 태종은 부자관계였지만 정치적으로 굉장히 대립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선택한 후계자를 실각시키고, 아버지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점, 그리고 뒤늦게 아버지와 군사적으로 대립했던 사건은 태종을 불효자로 만들기 충분했으며, 태종 역시도 가뭄이 들 때마다 권력의 정통성에 취약함을 괴로워하며, 아버지와 맞섰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며 스스로 시인했다. 물론 태종은 '그런 불효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왕이 된 것에는 하늘의 명이 있었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종국에는 정당화하 했지만...

  태조 이성계와 태종의 정치적 갈등은 조사의의 난을 끝으로 잠잠해졌지만, 태종은 여전히 자신이 아버지에게 심정으로 인정받지 못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 이성계의 진노를 풀려고 노력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아버지가 불러주고 술을 따라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아이처럼 좋아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웠던 태종이지만, 아버지 태조의 기분을 위해 태조가 신경 쓰는 절에 있어서만큼은 탄압을 최소화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시대적 필요에 의해 유학을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그렇기에 국왕인 태종은 대소 신민들에게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행동을 그 누구보다도 솔선하여 보여야만 했다. 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 중 하나인 《효경》 <천자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자가 말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부모님을 공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사랑하고 공격함을 부모님 섬기는데 극진히 한 뒤 도덕적 교화가 백성들에게 전해져 천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천자의 효이다."'

즉 유교적 사회에서 지도자의 치국의 핵심은 효에 있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태종은 권력을 쟁취하고 얻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겪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노력이 신민들에게 가식처럼 보일까 봐 더더욱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어쨌든 태종은 권력을 쟁취한 뒤, 아버지를 무조건 받들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칼을 들고 공격하여도(조사의의 난),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했고, 아버지가 아플 때에는 항상 곁에 머물면서 수발을 들었다. 팔뚝에 심을 지지고, 자신도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며 말을 달려 위중한 아버지를 향해 달려왔고, 아버지에게 편하게 가기 위해 궐내에 길을 뚫기도 하였다. 그렇게 극진하게 모셨던 아버지가 죽자, 태종은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런 태종의 포효는 아마 그렇게 노력해도 진정으로 인정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부자간의 관계에 대한 답답함을 의미했을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나는 태종이 아버지인 이성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권력을 앞에 두고 부자의 생각이 달랐기에 비극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태종은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아마 두 부자가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에서 만족했다면 정말 극진한 관계의 부자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태조 이성계도 태종 이방원도 권력과 가까이하기 전에는 부자간의 사이가 매우 좋았으니까 말이다. 결국 이런 돈독한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권력 때문이니, 새삼 권력의 무서움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은 태종을 두고 불효자로 인식하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역대 왕들을 통틀어 태종만큼 효에 충실했던 군주도 드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은 집권자 태종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깔린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없는 사실을 지어서 만든 기록은 아니기에, 이런 태종의 애정 어린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태상왕 이성계의 죽음과 함께,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삼촌이라 할 수 있는 이화, 그리고 태종의 장인인 민제도 차례대로 부고 소식을 전했다. 조선을 건국했던 중진들이 하나둘씩 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신생국 조선은 자연스럽게 세대가 교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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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7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7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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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권의 주요 테마는 바로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숙청이다. 혹자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처남들을 몰살시킨 태종이 잔인한 군주라고 매도하겠지만, 《태종실록》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강력한 권세를 바탕으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기에, 외척의 발호에 굉장히 민감한 태종이 당연히 숙청하겠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번 권에서 보여주는 태종의 모습은 이전까지의 모습과는 비교하여 굉장히 정략적이고 모략적인 모습이 강했다. 엄청난 권세, 군부의 핵심을 담당했던 처남들을 쳐내는 작업이기에 아무리 왕권이 강한 태종이더라도, 조심스럽게 접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는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정에 약한 군주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경고하고 넘어갔거나, 직첩을 거두고 정계에 퇴출하는 것으로 처벌했을지 모르겠지만, 특히나 외척을 경계했던 태종에게는 이런 애매모호함조차 용납할 수 없는 수위였다. 태종은 왜 그렇게 외척을 심하게 견제했을까. 첫 번째로 아버지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신씨와 관련됐다. 신 씨는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태조를 꼬드겼고, 정치에 있어서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했던 왕후였다. 그래서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인 태종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바로 《대학연의》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태종 이방원이 가장 가까이하던 《대학연의》에는 외척에 발호에 대하여, '제가의 요체'에서 심도 있게 논하고 있었다. 태종은 《대학연의》를 읽으며, 읽으면 읽을 때마다 정치의 요체, 그리고 외척의 발호에 대하여 깊은 가르침을 얻는다고 강조했는데, 아마 《대학연의》에 나왔던 외척들의 발호를 읽으며 외척의 강성함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바로 왕비 민씨 일가의 태도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민씨 일가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민씨는 적극적으로 거사를 권장했으며 병장기를 숨겼고, 처남들은 태종을 위해 앞장서서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 물론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이들은 태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태종의 왕권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태종의 왕권은 태종과 민씨 일가들의 공동 사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권세를 가진 처남들은 다른 권신들보다 조심하지 않았으며, 민씨 역시도 다른 후궁을 들이려는 태종의 행동에 극단적으로 반발했다. 반면 태종은 왕위에 오를 때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게 해서 차지한 왕권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태종은 왕권이라는 권력을 누군가와 나누려고 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사소한 생각 차이는 결국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실각, 그리고 이어지는 민무회, 민무휼 형제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사실 태종은 처남들에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줬다. 처남들이 권세를 으스대며 일탈을 할 때에도 칼같이 주시하고 체크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넘어가려고 하였고, 이거이 부자를 숙청하는 것을 본보기로 하여 처남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간곡하게 바랐지만, 처남들은 태종의 이런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태종은 이거이 부자를 숙청한 뒤, 처가로 방문하여 술잔치를 벌이며, 스승이었던 민제에게 '이선달'이라고 자신을 불러달라고 하며 처가와 함께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다. 물론 이는 민씨 일가 역시 선을 넘을 경우 이거이 부자처럼 실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경고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태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남들은 조심하지 않았고, 그래서 처남들을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태종은 냉혹한 군주였고, 그랬기에 왕권을 침범하는 신하들을 위아래를 막론하고 처단했지만, 그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숙청할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다. 게다가 그는 공신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라, 잘못이 있더라도 최대한 넘어가려고 했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경우도, 태종은 몇 번이나 기회를 줬다. 그러므로 태종의 숙청을 이야기하려면 결과만을 놓고 볼 것이 아니라, 숙청의 이유, 그리고 숙청의 과정 등등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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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트 - 전32권 (2023년 최신쇄)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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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세대 때 남자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소설로 꼽힌 작품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삼국지》고 또 하나는 바로 《대망》 즉 정식 이름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분량이 많다는 점과, 엄청난 인물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전형적인 남성 중심의 사고 관념에 입각하여 쓰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금 리뷰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양의 전통적인 남성 판타지물인 《삼국지》보다 훨씬 분량이 많으며, 훨씬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시판되는 단행본 기준 《삼국지》는 10권 이내로 끝나는데 반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려 32권으로 구성됐으니, 어마어마한 장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골적으로 말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삼국지》의 일본 버전이다. 남성들의 대의와 야망, 대망 등등을 웅장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 다루고 있는 시대는 전쟁이 일상화된 난세라는 점, 여성의 역할은 그저 남성의 야망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 등등... 두 소설은 일란성 쌍둥이와 같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에 큰 관심이 있으면서도, 이 소설을 통해 도쿠가와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삼국지》에서 중화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해 유비를 미화했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설은 역사적인 이에야스의 모습을 분명 미화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이 책을 권하며, '남자라면 꼭 읽어야 할 소설, 무릇 대망을 가진 남자라면 필독서로 읽어야 하는 소설.'이라고 강조할 때마다 부모의 청을 모른 척 외면했다.

  나는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나는 허구가 곁들여진 소설보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비문학이나 생각을 담은 칼럼 등등을 주력하여 읽었고, 그랬기에 유명한 소설들은 대부분 축약본을 통해 스토리만 아는 정도였다. 그런 내게 32권이나 되는 장편 소설이라니 부담이 될 수밖에. 그러다 어느 날 잡지에서 서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설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연세가 있던 분이 쓴 글이어서 그런지 호평 가득한 내용이었다. 글을 읽으며 하나의 장편소설이 어떤 힘이 있기에 한 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장편 소설을 중고 서점에서 조금씩 조금씩 구매하였고, 틈틈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은 내가 생각하던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절대적인 선(善)의 가치를 불어넣어 미화하여 그려내고 있었다. 만약 일본 전국 시대에 역사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야마호카 소하치라는 인물이 가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실제 역사 인물의 모습으로 착각하여 인식할 듯싶다. 중국 역사에서의 유비의 모습과 《삼국지연의》에서 그리는 유비의 모습이 전혀 다르듯,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실제 역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다른 인물이다.

  책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듯, 어마어마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또한 책에는 많은 여자들이 나오는데, 저자인 야마호카 소이치는 그녀들을 대체적으로 남성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내고 있었다. 여자는 그저 어머니가 되어야만 비로소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남자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여자의 희생은 당연히 필요하다. 여성에게 있어 혼인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당주의 가문의 영속을 위한 정치적 결합에 불과하다는 생각 등등... 오늘날 남녀평등의 시각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면, 굉장히 불편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근대 이전 일본은 남존여비가 다른 사회보다도 더 엄격하게 발달했던 지역이 아닌가.

  나는 중근세 시대에 일본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자와는 다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가문과 가문 그리고 영주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혼례를 이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여성들의 역할이 그저 남편에게 수동적으로 복종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시집 간 여성들은 물론 시댁에 충실하지만 그것을 넘어 그녀들은 자신의 친정에 시댁의 상황과 동태, 그리고 영주들의 세력 판도 등등을 남몰래 알려주곤 했었다. 즉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정략적으로 시집을 간 여성들은 시댁에 충실한 그저 수동적인 며느리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친정 세력에서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관의 역할, 세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여성의 역할은 일본의 시대상, 즉 난세라는 상황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전국시대의 여성들을 그저 남성의 야망의 종속품으로 그려낸 소설은 자국 역사를 깊이 있게 인식하지 않은 저자의 편견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과 중국의 여성들보다 일본의 여성들이 훨씬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본다.

  또한 일본 전국시대를 두고, 여성들만 정략적으로 혼인을 올렸던 시대라고 생각하는데, 실을 남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없는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했으며, 힘의 논리에 의한 결혼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음 가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권한은 힘이 있는 영주에 국한됐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남자들 역시도 힘이 없으면 수동적인 인질 생활을 체험하기도 하며, 그렇게 힘 있는 자들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야스의 경우도 유년 시절을 인질 생활을 하였고, 첫 번째 부인도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전국시대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맞지만, 모든 남성이 대우받는 시대는 아니었다. 결국 힘이 없는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는 도쿠가와가 천하를 가지기 위해,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고 끝내 수많은 어려움 끝에 천하를 쟁취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동양 전통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의 모습이다. 고난과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인내와 불굴의 의지, 야망을 잃지 않으며 끝끝내는 대업을 이룬다는 스토리. 너무나도 뻔하고 식상한 주인공의 모습이다. 실제 도쿠가와는 이런 성격이었을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도쿠가와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도쿠가와는 철저하게 실력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잡기와 고급문화 따위에 심취하지 않고 실용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인생 초반부는 매우 수동적이었다. 그런 성장환경 때문인지 이에야스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따른 영주였다. 만약 자신보다 힘에 우위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는 고집을 버리고 상대의 힘을 존중하며 이인자로 만족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자신이 상대보다 힘의 우위가 앞서다고 판단했으면, 상대가 그런 자신의 힘을 인정해주길 은근히 바랐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 집권기에는 히데요시의 힘을 인정하며 철저하게 이인자의 역할에 만족했지만, 히데요시의 급사 이후 풋내기 히데요리가 집권하자, 커지는 자신의 힘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길 권유했다. 그러나 히데요리는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도쿠가와를 굴복하려 했고, 이에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히데요리에게 자신의 무력을 과시했다. 이쯤 했으면 히데요리가 자신에게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쿠가와지만 예상외로 히데요리는 도쿠가와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는 인내심을 가지고 히데요리의 투항을 기다렸지만 결국 히데요리는 전투를 선택했고, 일본 열도의 패권을 두고 히데요리와 도쿠가와는 오사카의 진 전투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이긴 도쿠가와는 일본의 패자가 되고 에도막부를 열게 된다. 이런 도쿠가와가 과연 어린 시절부터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웅장한 대망을 품었을까? 아마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면 이에야스는 그들과 맞서기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충실한 이인자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했듯 도쿠가와는 철저하게 힘에 논리를 중시한 실용적인 성격의 영주였으니까 말이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가지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도쿠가와의 야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의 시세와 판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저자의 소설을 읽으면 어린 시절부터 도쿠가와는 천하 통일을 꿈꾸고, 소망하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실제 도쿠가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책에서 도쿠가와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런 도쿠가와의 묘사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볼 수 있는데, 즉 저자는 도쿠가와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태평양 전쟁과 타민족 침략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결국 일본이 자행했던 전쟁은 도쿠가와의 천하통일 전쟁과 같이, 최종적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뉘앙스가 서려 있는 셈이다. (참고로 저자는 일본 지식인 중 전형적인 극우주의자다.) 과연 도쿠가와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인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도쿠가와의 평화를 지향하는 야망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일본이 자행했던 침략전쟁의 당위를 미화한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전쟁이 평화를 의미한 전쟁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참 불편했다. 첫 번째 도쿠가와라는 인물을 왜곡하여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운 소설이기에. 두 번째 그런 도쿠가와가 품은 야망은 천하 평화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것은 결국 일본 전쟁에 대한 미화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관념으로 쓰인 책이 우리나라에서 남자들의 필독서로, 야심이 있는 남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런 불편한 점을 떠나서, 책을 통해 중근세 일본의 관념, 생활 풍습 등등을 알 수 있었던 점은 유용했다. 특히 일본 전국시대에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배신이 보편적인 시대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신하는 무조건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일본에서는 자신의 부하에게 합당한 보수와 영지를 내려주지 않으면, 주인을 배반하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했다. 그래서 부하는 충성하는 대가로 영지나 녹봉 등등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점도 굉장히 신선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연봉제를 협상하고 스카우트가 보편화된 오늘날의 인재 정책과도 비슷하다. 이렇게 개방되고, 실력이 전부였던 시대를 겪었던 칼잡이들이 한가하고 태평성대였던 조선을 침략했으니, 임진전쟁 때 우리나라가 초반에 밀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에는 《삼국지》가 만들어놓은 남성 중심의 '대의' 판타지에 젖어서,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도원결의식의 이벤트'를 하며 서로의 대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낭만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돌이켜보면 다소 허망한 생각도 든다. 대의와 대망을 이루는 데 있어 굳이 '도원결의식 거창한 이벤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허심탄회하게 야망을 공유하며, '너 잘났니, 나 잘났니' 기싸움을 펼칠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현실에 충실하고, 뜻을 꺾지 않는다면 대의와 대망을 이루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무서운 사람들은 자신을 잘났다고 떠벌리며 도원결의를 지껄이는 인간들보다, 조용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하나씩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거창한 대의와 대망이 없더라도 오늘을 충실히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소확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삼국지》와 같은 부류의 소설을 필독서로 꼽기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싶다. 실제 역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기다림의 칼》 21세기 북스,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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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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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이고 상이한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 이질적인 경험이 있어야만 나를 둘러싼 익숙한 것들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여러 자기 계발서, 그리고 지성인들이 강조하던 단골 멘트였지만, 이를 피부로 체감한 계기는 바로 교토의 여행 덕분이었다.

교토 여행에서 나는 많은 사찰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불교라고 하면 흔히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유행한 종교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각국의 사찰 문화 역시 어느 정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버지가 불교 신자였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많이 방문했었다. 그래서 한국의 사찰 문화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 교토에서 유명한 사찰들을 둘러보며, 한국과 일본의 사찰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교토에 있는 사찰들의 인위적인 정원과 가지런하게 다듬어놓은 인공미를 관조하며,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질감을 느꼈었다.

경외감이야 흔히 외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볼 때마다 드는 보편적인 감정인데 반해, 나는 왜 그토록 이질감을 심하게 느꼈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다녔던 한국의 사찰 문화와 교토의 사찰 문화는 매우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를 따라 주로 다녔던 사찰 명승지는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토의 사찰들은 대부분 도심 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위치적인 차이 때문에, 교토의 사찰들은 자신들만의 수양을 상징하여 조성한 것이 바로 '인위적인 정원'이었다. 물을 사용하지 않은 가레산스이, 그리고 물을 이용한 지천회유식 정원, 돌과 모래를 이용하여 조성한 석정 등등... 이런 인위적인 정원은 한국의 산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였다.

반면 한국의 사찰은 대체적으로 산을 걸치고 있었다. 위치적으로 세속과 고립된 지역에 있었기에, 인위적 가공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수양을 상징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산사는 교토의 사찰과는 다르게 정원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공적인 부분을 내세우기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고유성을 인정받아서 2018년 6월 7곳의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래서일까, 나는 교토에서의 사찰들을 차분히 관조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사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조만간 교토 쪽으로 다시 여행을 갈 예정인데, 아마 그때에도 일본의 사찰들을 보며, 우리의 절간이 계속 생각날 것만 같다.

사실 책의 내용은 다 읽었던 내용이다. 기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에 있던 사찰 관련 내용들을 축약하여서 모아놓아 편집한 것인데, 그래서 살까 말까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고 있기에, 굳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산사순례》 편을 살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찰나, 모 서점 사이트에서 사은품으로 '유홍준 친필 부채'를 준다고 하기에, 혹해서 그만 구매를 해버렸다. 사용하고 있던 부채도 닳아졌기에,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저자의 필체가 담긴 부채라고 하니, 그만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책을 받고 좀 실망했던 게, 기존 단행본 시리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와 크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의 겉표지도 양장본과 같은 재질인데, 기존의 책과는 너무 이질적인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책 시리즈에 있어 통일성과 체계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책이 참 아쉽게 편집된 것 같다. 그냥 기존의 단행본과 같은 판형으로 출시했으면, 시리즈별로 꽃아 놨을 때 이질감이 없고, 통일성도 있었을 텐데, 크기도 그리고 책의 겉의 질감도 다르니, 이 부분이 아쉽다. 책의 표지는 정말 예쁘게 잘 뽑혔고, 그랬기에 전집 시리즈와 함께 꽂혔으면 더더욱 괜찮았을 텐데 참 아쉽다. 책이 발간된 주요한 목적은 바로 '산사의 유네스코 등재' 때문인지라, 급조하여 만든 티도 역력했다. 내가 유홍준 교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작가들보다 영리적인 느낌이 덜 들었기 때문인데, 급조된 듯한 이번 책을 보면서, 그런 내 생각을 다시 재고하게 됐다.

어쨌든 책 내용은 좋다. 과거의 산사 내용을 모아놓은 글이긴 하지만, 저자의 글은 맛깔진 문화유산 설명으로 정평났기에 내용은 언제 쓰여졌냐를 제외한다면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산사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산사 여행을 떠나시는 분들께도 유용할 것이다. 다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권을 소장하고 있는 마니아라면 굳이 구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는 부채 떡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매하긴 했다만, 사은품에 크게 매력을 못 느끼는  마니아라면 이 책을 구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압축된 산사 글을 다시 읽으니 예전에 다녀왔던 부석사와 봉정사를 다시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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