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서 출판시장에서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에 인문학은 전공자나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만 찾았던 분야지만 오늘날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막막한 인문학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남들이 대세라고 해서 큰마음을 먹고 인문학과 관련된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려고 노력하지만, 특유의 어려운 진입장벽 때문에 빈번히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며, 인문학에 대해 배움을 시도하고 싶지만 두려움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종종 인문학에 대한 로드맵이나, 고전과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 편인데, 나도 내
코가 석자인지라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수준이 아니기에 매번 한발 물러나는 대답을 하거나, 겸손을 빙자한 침묵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책의 저자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이 꽃을 피운 르네상스 시대에 교육철학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보통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으로 《아동교육론》을 꼽는데, 사실 나는 《아동교육론》보다 《교육방법론》이 더 궁금했다. 인문고전 교육이 보편화된
르네상스 시대에 최고의 석학이 제시하는 인문학 공부법이라니, 고전에 관심이 있고 고전 공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매번 고민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흥미가 가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교육방법론》은 짧은 책이었고 내용은 간결했다.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비유와 은유를 섞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다소 생소하게 읽히겠지만, 읽어 보건대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저자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싶다.
에라스무스는 책에서 주장한다. 일단 스승을 최고 좋은 사람, 그리고 인품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소리로 여기겠지만 책에서 주장하는 스승의 기준은 생각보다 너무 이상적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승의 조건은 특정 인문학 과목을
넘어 다방면적으로 박식하며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춰야 하고, 언어 구사력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야 한다. 물론 이런 스승을 만나면 행운이겠지만, 사실
이런 조건을 가진 스승은 교육이 보편적으로 활성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구하기 힘들므로 기준이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어쨌든 에라스무스는 좋은 스승에 가르침 아래에서 지식을 섭렵하기 전에 언어를 꼼꼼하게 공부할 것을 권한다. 이는 굉장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최근 나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책을 훑어봤다. 그 책의 핵심은 독서력 즉 독해력이야말로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예를 들어놨다.《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에피소드인데,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선행 학습에 과정으로, 다음 교과 과정에 배울 내용에 해당하는 교과서 분량을 미리 읽어 오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 이 부분은 안 배워서 모르는데요?' 그러자 저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학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오라는 뜻이야.'라고, 그러나 그런 대답을 받은 아이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선행 학습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다 보니, 스스로 글을 읽는 능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성적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굉장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글을 잘 읽는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시험은 모두 텍스트로 되어있고, 이를 잘 생각해본다면 공부에 있어 가장 기본은 글을 해독하는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수리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과목은 엄밀하게 말해서 일차적으로 언어 구사력 그리고 독해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탐구 영역의 문제도 일차적으로는 사료나 자료를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사료나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글을 잘
읽고 소화한다는 것은 특정 정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잘 훈련된 언어 능력은
언어로 표현된 텍스트 위주의 시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가 활동하던 중세 시대에 주류 학문인 인문학 역시
일차적으로 텍스트로 표현됐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기초 중에 기초는 언어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학습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무려 15세기에 일찌감치 깨닫고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언어의 표현이나 문법 공부만 주장하지 않고, 다양한 언어학, 즉 중세 시절에 상류 계층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울 것을 권한다. 왜냐면 이 당시에 저명한 고전은 모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서술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세 시대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지적인 사람들이 특정 지역을 초월하여 사용하던 '세계적인 언어'였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이러한 세계적인
언어가 바로 '한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오늘날에 에라스무스가 환생한다면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영어'나 떠오르는 '중국어'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언어 능력이 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고전 공부에 들어가게 된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과 핵심 포인트 등을 상세하게 설명할 것을
권하는데, 당대에는 고전의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여 분석하듯 풀이하여 주입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쓸데없이 소모적인 당대의
고전 교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 그리고 고전에 중요한 부분을 위주로 강의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학습자의
참여를 이끌어내서, 함께 생각하고 서술하는 등의 토론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즉 교육의 핵심은 바로 학생과 교수의 상호적인 교감을 강조한
셈인데, 취지는 좋지만, 규격화된 객관식 시험을 위해 대다수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입식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대한민국 입시 체제에서는 에라스무스의 학습법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였고, 최고의 교육자이기에 나는 그의 고전 공부 방법론을 주목했지만, 사실 오늘날 그의 교육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주장했듯, 교육의 가장 기본은 언어능력이라는 점만큼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덕목인 것 같다.
아무튼 에라스무스의 고전 교육법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적용해본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때, 처음부터 욕심내서 어려운 원전 번역본에서 시작하기보다,
쉬운 말로 잘 풀어진 입문서나 개론서를 차분히 읽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입문서나 개론서를 통하여 고전이라는 텍스트의 주된 표현 기법과
서술 기법, 고사성어, 주요 인물들을 차근차근 익히고, 친숙해진 뒤 소위 기본기가 쌓인 뒤에 비로소 잘 번역된 고전에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시간적인 여유가 남는 사람이라면 한문이나, 라틴어 등등을 배워서 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시도를 해도 괜찮겠지만...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는 냉정하게 말해서 이전에 통용되던 언어라 할 수 있는 한문이나 라틴어보다
영어나 중국어가 더 실용적이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무리해서 고전에 통용되는 언어를 배우기보다, 원전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부분은 전문가인 학자들을
의지하고, 좋은 번역본을 통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여러모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육방법론》에 포함된 편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바로 생활고를 이야기한 에라스무스의 투정이다. 당시 유럽의 15세기에는
오늘날과 다르게 인문학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돈 버는 게 힘들다고 투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
에라스무스가 오늘날 밥벌이가 힘든 순수 인문학 전공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똑같이 배를 굶는 입장이지만 아마 인문학의 전성기
시절인 르네상스 시절에 태어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대우받을 때나 대우받지 않을 때나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활고를 고민했던 것 같다. 끝으로 《교육방법론》은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인 《아동교육론》과 깊은 연관을 지닌
도서다. 사실 이 두 도서의 핵심은 같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내용상으로 볼 때 《교육방법론》은 《아동교육론》의 후속작 같은 느낌이므로,
가능하다면 두 도서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