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철학은 대부분 유가, 유학 철학이다. 유가 철학은 중원 그리고 중원을 넘어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
등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던 철학이었고, 그랬기에 일반적으로 고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철학이 유학과 관련된 철학이다. 중국을 떠나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을 떠올리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유교 사상이니, 그만큼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가 그리고 유교 철학은 보편적으로 전통을
상징하는 철학으로 인식됐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동양철학을 처음 접할 때 유교 철학의 저서로 입문했었다.
그렇게 유교 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유교와 유가 철학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 제자백가로 알려진 여러 학파들의 저서를 읽으면 다양한 사상의 이론을 접하게 됐다.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을 읽으면서 나는 크게 두
가지로 중국의 사상을 분류했는데, 하나는 유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타적인 철학, 또 하나는 법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기주의 철학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갈래의 철학이 많지만, 난세의 시기에 여러 갈래의 학문이 일어서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태어났고, 그런 사상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후세에 현실적으로 영향을 막대하게 미친 사상은 유가와 법가였기에, 나는 이 두 사상을 바탕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하려고 했다.
유가의 사상을 집중하여 공부하는 과정에서 묵자의 사상을 발견하고 관심을 가졌다. 사실 유가와 묵가는 성격이 비슷하다. 둘 다
이타주의적인 철학을 대표하며, 둘의 철학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기에 흥미를 가지고
《묵자》를 읽었는데 확실히 유가 철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묵자》를 자세히 읽어보면 유가 철학에서
지향하는 개념들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ex 군자라는 개념), 또 유가 철학에서 경전으로 받드는 《시경》, 《서경》 등등의
경전들을 인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설에 의하면 《묵자》의 저자인 묵적은 유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 출신이라고 하며 생산 계층인 하층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추측해보자면 묵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묵적은 이타주의 철학인 유가를 공부했지만, 유가가 가지고 있는 맹점, 즉 허례허식적인 모습, 그리고 이타를 적용하는 데 있어, 친족과 혈족들로
대표되는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기라는 차별적인 이타관을 보고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묵가는 유가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유가 철학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환에서 생겨난 사상이
아닌가 생각하며, 유가와 묵가 두 사상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유가의 철학은 신분에 대한 위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사상의 수요층은
사대부나 지식인층, 즉 기득권 세력을 염두에 두고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묵가는 이런 유가의 이타주의적 철학을 확장하여 지배층을 넘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유가의 세력과 묵가의 세력은 거의 대동소이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묵가의 철학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유가의 철학만큼이나 세가 강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묵자》로 살펴볼 수 있는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보다 이타주의적인 성격을 더욱 확장하고 강화하였으며, 유가가 가지고 있던
맹점, 군사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점도 나름 극복하고 있다. 유가에서는 지도자가 군대를 움직이기보다 인심을 얻고 덕을 앞세워 적을 교화하라고
권면하는데, 사실 이는 현실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이상적이다. 반면 묵가에서는 침략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을 권고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상대가 야욕을
앞장세워 무력으로 나에게 공격을 할 시에는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며, 《묵자》에서도 공성과 방어에 대한 병법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즉 전쟁을 지양하는 점은 유가와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졌을 시에는 무력으로 자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묵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쟁에 있어서 명분으로 뜬구름을 잡고, 전쟁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하지 않는 유가의 입장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묵가의 창시자 묵적은 그 자신이 피지배층이었으며, 하층민 출신이었기에, 당대의 피지배층이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과 궤를 함께하지만 유가보다 훨씬 진보적이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던 묵가의 철학은 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것일까? 왜 유가 철학은 전통적으로 굳건하게 지지를 받고 발전했지만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이후로
사라진 것일까?
전국시대에 유가의 싸움닭이라고 할 수 있는 맹자는 자신의 저서 《맹자》에서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는데, 특히 묵가에 대해
적나라한 공격을 펼치고 있다. 왜 맹자는 그토록 묵가를 경계한 것일까? 바로 자신이 신봉하는 유가 철학과 묵가 철학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공통점.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묵가는 유가가 규정하고 제도화한 질서를 무너트리는 입장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선 유가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특히나 묵가의 사상은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다 유가와
비슷한 개념인 겸애를 내세우고 있어서,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유가의 사상은 인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군주는
군주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를 강조하며 각자의 위치와 본분에 맞게 행동할 것을 권하고 있고, 이런 계급주의적인 발상은 당대의
지도자층에 기호에도 걸맞은 철학이었다. 철학과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으려면 지도층의 수요도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은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런 점에서 유가 철학은 묵가 철학에 비해 열세였고, 그랬기에 맹자는 그토록 묵가 철학을 경계하며 이단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통일이 되었을 때, 한 고조 유방은 유가의 학파를 근본으로 내세우며 국가의 으뜸 학문으로
여겼다. 한 고조는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당시 공신들은 하층민 출신이 대다수라 황제가 있는 궐에서 예의를 모르고 서로 핏대를 높여 싸운 적이
많았다. 이를 걱정하던 한 고조가 숙손통을 통하여 유교 철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황실의 권위를 세웠다. 무식하던 공신들은 새로운 유가적
의례를 배우고 따르기 시작했고 예의를 갖추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한 고조는 "황제라는 자리가 귀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라며 유학자들을
칭찬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가 철학이 전국시대 사상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가 철학이 승리했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면
유가가 그토록 질시하고 시기하던 묵가 철학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대의 독재자인 황제의 입장에서는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피지배층의 입장에 선 묵가 철학보다, 지도층의 권위와 의식을 강조하는 유가 철학이 더 구미에 당기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지나 한나라의 전성기인
무제 시절, 무제가 유가 철학이야말로 나라의 근본 학문이라고 다시금 규정하였는데 이 결정은 2000년의 동아시아 사상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유가와 도가를 제외한 다른 제자백가 철학들은 종적을 감춘다. 물론 묵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가의
철학은 여러 저서가 발간되고 훗날 성리학과 양명학 등등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은 동양고전의 메인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에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 발전을 멈췄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문헌이라고는 《묵자》가 전부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해오는
《묵자》 텍스트도 당대에 온전한 묵가의 사상이기보다, 유가 사상가들의 의견이 덧붙여진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애잔한 마음이었다. 《묵자》가 주장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당대의 하층민들의 고충을 가장 많이
반영했으며, 당대 하층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이해한 철학이었다. 그런 철학이 사상 경쟁에서 패배하여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측은지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늘날 《묵자》라는 텍스트가 전해지는
것에는, 묵가의 철학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전국시대 이래로 많은 위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전해지는 와중에 텍스트의 일부가
분실되기도 하고 더러는 유학자들의 손에 수정되기도 하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하는 《묵자》 텍스트를 통하여, 당대의 묵가 사상을 파악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묵자》라는 텍스트가 세월 속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전국시대에 하층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온전한 텍스트는 아닐지라도 현전하는 《묵자》를 통해 우리는 동양에서 가장 이타적인, 가장
진보적인 철학이 기원전 전국시대에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에 하층민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초월적인 겸애를 주장하며
하층민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였던 급진적인 사상 " 이것이야말로 《묵자》가 오늘날 후대인에게 주는 깊은 울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