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장궈강 지음, 오수현 옮김, 권중달 해제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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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그리고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자치통감》을 완독하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평생 독서에 있어서 목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치통감》 완독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치통감》의 방대한 분량 때문인데, 《자치통감》이 다루고 있는 시대는 1362년, 어림잡아 1400년인데, 이런 방대한 시기를 294권 한자로 300만 자 분량으로 정리했기에 읽는 것만 해도 심히 부담이 되며, 설상가상으로 동양고전에 흥미가 없거나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더더욱 접근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었다.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왜 읽고 싶냐고 말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아니고, 중국의 역사책인데다 1400년이나 다룬 저작인데,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나, 문명이 발전한 오늘날 중국을 다룬 역사서가 차고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자치통감》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을 자랑한다. 최근 완역된 《자치통감》의 한글 번역본은 500~600페이지 양장본 책이 31권으로 구성된 거대한 전집인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분량에 압도될 법 하다. 굳이 이런 막대한 분량을 읽을 필요가 오늘날에 있을까?

 

《자치통감》은 그냥 대충 정리한 역사서가 아니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는 역사라는 과목이 그저 교양을 위한 과목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정치 공부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서 세워지고 흥망 했던 왕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귀감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역사는 지도자의 정치 교육 함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자치통감》 역시 여느 다른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올바른 치국, 그리고 올바른 정치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저술이다. 그럼 왜 중국의 숱한 역사 고전들 중에서 《자치통감》을 으뜸으로 꼽는 것일까?

 

《자치통감》은 북송대 사마광이 주도하여 편찬한 저서인데, 당시 송나라 황제였던 영종과 신종의 정치를 돕기 위해 역대 역사서들 가운데 최고지도자가 참고할 만한 사항만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송나라의 황제 영종은 나라 내외의 문제를 역사 공부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지만, 문제는 기존에 편찬된 사서가 너무 방대했다. 중국에서는 원래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생기면 새로 세운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해왔다. 그렇다 보니 송나라까지 내려왔을 때 공식적으로 내려오는 역사서가 《사기》를 필두로 하여 포함하여 17개나 있었고, 이를 권수로 환산하자면 1600권 정도라고 한다. 이런 막대한 분량은 직업이 없는 선비가 읽는다고 해도 꼬박 50년이 걸린다고 하니,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영종은 사마광에게 부탁해서, 지도자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책,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을 요구하였고, 이 부탁을 받은 사마광은 19년 동안 성실한 작업을 통하여 《자치통감》이란 저서를 완성했다. 책이 완성됐을 당시, 영종은 이미 죽었고, 영종의 뒤를 이은 신종이 이 책을 받았다.

 

그렇기에 294권 300만 자 분량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이지만, 1600권의 역사서와 비교해본다면 엄청나게 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기존의 사서들을 압축하여 저술하는 과정에서도 역사에 있어 핵심과 필요한 부분은 모두 기록하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사안들은 나름의 근거를 들어서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은 《자치통감》의 기준에 따라 정사와 야사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자치통감》과 《사기》를 비교하며 어느 역사서가 좋은가를 논하기도 하는데, 《사기》와 《자치통감》은 같은 역사서이긴 하지만 역사를 기술한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기》는 역사를 '기전체'라는 체제로 정리했는데, 쉽게 말해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한 역사서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위인전 전집 혹은 인물 사전과 같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치통감》은 역사를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기술 방식을 '편년체'라고 한다. 즉 《사기》는 기전체를 대표하는 역사서고, 《자치통감》은 편년체를 대표하는 역사서다. 내용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사기》에는 정사와 야사가 섞여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문필가였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민가에 떠도는 야사나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사기》를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사기》를 두고 어떤 사람들을 역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자치통감》은 허무맹랑한 야사나 민담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로지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기에 《사기》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드물지만, 반대로 《사기》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과관계가 굉장히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그렇기에 《자치통감》은 중국 역사를 현실적으로 고찰하여 정리한 핵심 요약서이자,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위기 대처 매뉴얼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 대한 교양과 더불어 실제적인 정치의 올바름까지 제시한 역작이었기에, 중국에서는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많은 지도자들이 애독했으며, 우리나라의 성군 세종대왕 역시 이 책을 구하고 완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자치통감》은 왕조 국가의 흥망을 정리한 책인데 과연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지혜인가?'

 

사회제도와 국가의 형태, 신민과 시민의 역할 등등 왕조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사회의 처세법이나, 삶의 지혜에 대한 부분은 왕조 시대나 오늘날이나 크게 변한 부분이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정치 철학자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는 당시 사분오열된 이탈리아반도의 운명을 고민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리비우스 로마사》라는 책을 몰두해서 읽었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저자 리비우스는 기원전 59년에 태어나 기원후 17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리비우스 로마사》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시대인 15 ~ 16세기로부터 약 1400년 전에 저술된 방대한 로마사 전집이다. 이렇듯 이름난 현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무엇보다도 이전 시대를 기록했던 역사 기록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자치통감》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에 저술된 저작이지만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집이 보관되어 내려오는 데에는 그만큼 값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자치통감》 294권 300만 자를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자치통감》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는데, 그런 일환으로 최근에 나온 책이 바로 《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난 제왕의 책》이다. 이 책은 방대한 《자치통감》의 분량을 770쪽 양장본으로 줄인 《자치통감》의 친절한 안내서다. 이 책의 저자인 장궈강 교수는 《자치통감》을 가지고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를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난 제왕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읽어본 결과 확실히 책은 어려운 원전을 풀어서 잘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이 책 하나에 담았기에, 《자치통감》에 나오는 2만 개가 넘는 에피소드를 모두 담을 순 없지만, 시대별로 가장 핵심적인 사건과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저 고전을 풀어내고 설명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서양의 정치 제도 비교, 그리고 원전에 나온 제도 등이 오늘날에 중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읽기에 부담스러운 분들이나, 《자치통감》에 입문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고민되는 사람, 그리고 《자치통감》을 완독하고 정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올 한 해의 목표가 바로 《자치통감》 완독인데, 그런 목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치통감》을 개괄하여 읽는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완역본 완독에 많은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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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실 - 우리는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
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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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도서 사이트에서 신간 목록을 보다가 흥미 있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클릭했는데 목차부터 굉장히 관심을 끌었다. 만들어진 진실이라니... 책은 정보화 시대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 - 팩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었다. 과거, 옛날에는 정보는 희귀했고, 그랬기에 권력을 가진 집권층만이 정보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져오는 제한된 정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의 독점은 정보를 향유하는 집권층의 기호에 의해 조작되고 편집되어 내보내졌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제약적이고 편집된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각종 미디어들이 발전으로 인해 독점된 정보는 개방됐고, 하나의 정보를 여러 시각으로 해석하는 의견들도 다양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정보의 제약적인 공개가 문제 됐다면 오늘날에는 차고 넘치는 정보의 분별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진실》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덕목을 다룬다. 만연하는 정보 속에서 과연 팩트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서,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우리는 팩트를 어떻게 편집하고 소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오늘날 개개인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 속에서 사실적인 팩트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책은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에는 특정 계층의 시각으로 정보가 쉽게 조작되고 편집되었다면, 개방화된 오늘날에도 과연 여전히 팩트는 편집되어서 공개되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정보의 개방은 팩트를 확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늘날 사회를 깊이 있게 관찰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어쩌면 과거보다 오늘날이 팩트의 편집이 더더욱 빈번하게 이뤄지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비자들에게 하나라도 물건을 팔기 위하여 상품의 단점은 언급하지 않고 장점만을 부각하는 미디어 광고. 당선을 위하여 공약용 거짓을 빈번하게 일삼는 정치인. 중립적인 관점의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특정 집단의 이념을 은연중에 드러낸 언론. 입사를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서 발표하는 취준생. 나의 지갑을 매력적인 떡밥을 동원해서 노리려고 하는 마케터 등등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사실적 팩트보다는 가공된 팩트, 편집된 팩트가 만연하고 있다. 정보의 대중화는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향유하고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양화된 집단의 가공화된 정보에 더욱 쉽게 노출됐다. 이러한 팩트의 공공연한 편집 사례를 대표적으로 언급해보자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최근 스토리텔링이 유행했다. 그냥 날것의 팩트로는 감동을 주지 못하므로, 무미건조한 팩트에 조금의 조미료를 가미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야 한다고 많은 지성인들이 강조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어떤 팩트를 스토리텔링하여 편집하는 과정에는 날조와 과장, 그리고 특정 부분의 축소와 확대 등등이 필연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럼 이런 이미지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명하게 살아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안에서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편집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는 팩트의 편집 유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책에서는 그런 팩트의 편집 사례를 유형별로 나눈 뒤 각 사례에 대한 예시를 들어 분석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확실히 서양 저자가 저술한 책이라서 그런지 팩트의 편집 사례에 대해 분절적으로 나눠서 깔끔하게 정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분절적인 전개는 딱딱하고 기계적인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설명하는 개념에 대해 깔끔하게 전달한다는 장점도 있다. 장르는 다르지만 저자가 깔끔하게 분류해놓은 예시를 보니 특정 개념을 분절적으로 쪼개고 쪼개서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가 떠올랐다. (서양의 자기계발서, 철학서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도식화, 분절화하여 논제를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에서 다양하게 분석한 팩트의 가공 사례를 다 언급하기는 지면상 무리지만, 어쨌든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이미지화된 현실에 있어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본질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팩트를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가공과 편집의 극대화를 하기 위해 팩트를 잘 알아야 하고, 팩트를 소비하는 경우에는 편집과 가공 떡밥에 속지 않기 위해 팩트 구분법을 알아야겠지만, 그럼 과연 날것의 팩트, 그 자체는 현실 속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가만 생각해보면 날것의 팩트는 가공과 편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날것의 팩트를 분별하는 데에도, 날것의 팩트를 구분하는 데에도 결국은 가공과 편집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것의 팩트는 이미지화된 가공의 팩트가 만연하는 작금의 시대에 그 자체로는 힘을 발휘하진 못하지만, 이렇듯 편집과 가공과의 역학관계 속에서는 가치를 빛낼 수 있는 덕목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책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예시 위주로 풀어나가는 전개라서 부담도 없었고, 사례들의 분석도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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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 일본 근현대 정신의 뿌리,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김세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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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로그 이웃님이 번역하고 있는 일본 정치 사극을 시청하는데, 그 사극의 이름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다. 드라마는 일본의 에도 막부 말기의 쇼군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이 사극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배경을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며 시청하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극은 철저하게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에도 막부 말기 시대의 도쿠가와 체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행정과 비리 때문에 낡은 체제로 인식하지만,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도쿠가와 가문의 시각으로 에도 막부 말기를 들여다보니, 낡았다는 막부 세력도 서구 열강에 대한 대응과 체제 개혁에 신경 쓰고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에도 막부 말기 시대를 사극으로 시청하다 보니, 일본의 근대화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이 갔다. 그래서 나름 관련 인물들에 대한 저작을 읽고, 에도 막부와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메이지 유신을 깊이 있게 추적하던 과정에서 나는 요시다 쇼인을 만나게 됐고,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라는 책을 통해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서쪽인 조슈 번 출신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그 가문은 대대로 조슈 번의 병법(군사학)을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집안이었다. 조슈 번의 번주는 대대로 모리 가문이 맡았는데, 이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에도 막부와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는 사이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기 이전 천하를 둘로 나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총대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테루모토였다. 흔히 서군의 상징적인 인물을 이시다 미츠나리로 여기긴 하지만, 직급으로 따지자면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가문이 맡고 있었었다. 그런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서군은 대패를 하였고, 승기를 탄 이에야스는 에도 즉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일본 열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도쿠가와에 패배한 모리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조슈 번으로 쫓겨가 그곳을 영지로 삼아 대대로 다스렸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조슈의 출신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막부에 대한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서구 열강이 힘을 앞세워 개항을 하기 시작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슈 번을 비롯하여 서쪽의 영주들은 흔들리는 막부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시기에, 태어나 사상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명했던 그는 조슈의 번주와 관료들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허가를 받고 남쪽 규슈 지방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 뒤 에도로 가는 번의 행렬에 참가하여 에도에서 견문을 쌓고, 무단으로 동북부 지역을 여행하며 또다시 견문을 쌓아나갔다. 무단 여행 때문에 쇼인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제제가 가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교육하고 스스로의 학문을 연마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후 쇼인은 쇼카손주쿠라는 학교를 세워,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정치인들을 수제자로 두고 교육시켰다. 막부 체제에 대한 반골 기질이 강한 요시다 쇼인은 결국 막부의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에게 찍혀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30살의 꽃다운 나이로 처형되고 만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데 근간이 됐다.

  사상의 힘이란 굉장히 무서운 법이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를 가만히 뜯어보면, 이는 결국 요시다 쇼인이 주장하던 사상을 그대로 현실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인은 일본이 강해지려면 다케시마 즉 울릉도 일대를 발판으로 삼아 한반도를 점령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왕양이(천왕을 받들고 서구를 배격하는 사상)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존왕 사상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천황의 신격화를 가져왔고,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양이 사상은 문자 그대로 서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우수한 기술력은 배워서 서구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즉 우리의 동도서기, 중국의 중체서용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양이의 사상은 후학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어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요시다 쇼인의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 사상은 근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아베 총리는 공공연하게 쇼인 선생을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쇼인의 저작을 읽었다고 한다. 요시다 쇼인이 강조했던 다케시마를 일본은 공공연하게 노리고 있다는 점. 자위대 문제 등으로 인해 주변 국과 마찰을 불러오는 점 등... 여전히 현대 일본에서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우경화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의 철학은 집권층의 미화와 교육을 통하여 여전히 일본을 움직이고 대표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2015년, 일본 정부는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짧고 굵은 삶을 살다가 갔다. 한창의 나이인 30에 죽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일본 사상의 심장이 될 수 있었다. 변변찮은 하급 무사 신분, 그리고 일본 열도의 외곽에서 태어난 점 등등 환경적인 조건으로 봤을 때에는 이토록 거대한 인물로 성장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요시다 쇼인은 그런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자신을 불태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쇼인이 가졌던 학문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의지,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굽히지 않았던 신념 등등은 굉장히 와닿았다. 그리고 하급 무사 지식인들의 사상적인 중추가 되어 사회의 모순, 구체제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는 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쇼인을 곱게 볼 수 없겠지만, 감정적인 마음을 제외한다면, 그의 짧고 굵은 삶 속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흔히 감정적인 마음만을 앞세운다. 그러나 내가 일본을 가보고 일본 문화를 경험하며 느낀 점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적이더라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장점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완벽하게 상대의 장점을 습득했을 때에, 비로소 일본의 색깔을 씌우고 그네들의 문화화를 시도하였다. 우리도 좀 더 나은 미래, 그리고 좀 더 나은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일본에 대해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그네들의 장점은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그런 융통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다만 천왕을 과도하게 숭상한 부분, 그리고 일본 민족을 우위에 둔 선민의식 사상,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사상,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적인 충성에 목적을 둔 극단적인 공리주의 사상 등등은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핵심적인 관료가 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침략했다. 그런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자신의 스승인 쇼인의 사상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나는 쇼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긍하긴 어려웠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를 이야기할 때, 중국사를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번역되는 고전이나 역사책도 중국사가 압도적이다. 최근에는 일본에 대한 고전과 역사책도 하나둘씩 번역되고 있지만, 중국과 비교해보면 게임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근대에 경험했던 식민통치, 그리고 고대사에 대한 시각차 때문에 여전히 일본과 우리는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중국이 역대 이래로 동아시아의 맹주의 역할을 자임했고, 그렇기에 중국사는 중요하지만 중국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중요성을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을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지정학적으로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고대, 중세, 근대, 현재까지 우리는 좋던 싫던 일본과 관계하며 지내왔다. 따라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됐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좋았던 적이 대부분이다. 반면 우리가 힘들었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극에 다다랐던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근대와 현대 일본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근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인 원류, 그리고 현대 일본 정권에서도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쇼인은 우리나라를 힘으로 정벌하자고 주장한 '정한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울릉도와 독도 점거를 주장한 인물이니,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상누각과 다름없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단편적인 생각을 나열해보자면 쇼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슈 번 하기의 사람들은 쇼인의 제자가 되어 교육을 받고 근대 일본의 중추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일국의 거물급 대신들이 이렇게 시골 마을에서 우르르 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인데, 이를 읽으며 《사기》에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패거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고조 유방은 시골 패현 출신인데, 한나라를 건국한 중추 관료들도 대부분 모두 패현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하의 인재가 패현에서 모두 생겼다고 이야기했는데, 막말 조슈 번의 하기 역시 패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 나는 일본 고전인 《언지사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쇼인의 전 세대에 활동했던 사토 잇사이라는 유학자가 쓴 잠언록이었다. 쇼인은 사토 잇사이의 제자인 사쿠마 쇼잔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토 잇사이의 철학 역시 쇼인에게 비판적으로 계승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토 잇사이는 당대 일본 유학의 대가였는데, 정통 주자학 뿐만 아니라 양명학 역시 중시했다고 한다. (주자학은 관념적이고 양명학은 실천 중심적인 성격이 강하다.) 쇼인 역시 지성을 강조하며 행동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이러한 쇼인의 행동 중심적 철학은 사토 잇사이의 양명학을 중시한 학풍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서애 유성룡 선생은 임진,정유전쟁 직후 《징비록》이라는 불굴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저서에서 일본을 알지 못하면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를 기록하였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 서애 선생의 기록을 무시한 결과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을 주시하고 알아야 하지 않을까? 책은 작고 아담하지만, 간결한 문체에 알기 쉽게 요시다 쇼인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담고 있었다.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제자들, 그의 사상, 그가 교육한 쇼카손주쿠까지.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책을 읽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이제야 알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부끄러웠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인물을 아직까지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요시다 쇼인을 다룬 책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필두로, 앞으로 요시다 쇼인에 대한 책, 그리고 일본에 대한 책들이 더욱 많이 발간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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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기는 사마의 더봄 평전 시리즈 1
친타오 지음, 박소정 옮김 / 더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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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에게 큰 임팩트를 줬던 사극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사마의 - 최후의 승자'다. 이 드라마는 전작인 '사마의 - 미완의 책사'의 후속작으로, 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한 수 아래로 취급하던 중국 사극을 새롭게 돌아보게 만들었다. 물론 중국 사극 역시도 명작이 많지만, 고질적인 단점으로 국내와 일본 사극보다 허구와 과장이 심하며, 무협지를 연상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세트장의 부실함 등등을 꼽을 수 있다. 드라마 사마의 역시 허구와 과장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극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내릴만한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종래의 전쟁 위주의 삼국지 드라마들과는 달리, 정치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흔히 정치 사극이라고 하면 따분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데, 이 드라마는 그런 어려운 정치 사극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깊이를 더하여 제작하였는데,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도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작용했다. 만약 이 드라마를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드라마를 정주행으로 달릴 것을 살짝 추천해본다.

리뷰하려는 책 《결국 이기는 사마의》는 어찌 보면 드라마 '사마의'의 열풍 덕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를 다룬 저서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인물은 단연 제갈량이다. 제갈량의 저서, 제갈량의 평전, 제갈량을 모티브로 삼은 자기 계발서 등등 삼국지 도서 시장에서 제갈량을 다룬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하다. 그런 제갈량을 최근 들어서 바짝 뒤쫓고 있는 인물이 조조다. 제갈량이 전통적으로 인기를 끌어모았다면, 오늘날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인물은 조조라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실리주의적 정책과 과단성 등등은 오늘날 현대인의 처세에도 많은 귀감을 주고 있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현대인과 비슷한 사고를 지닌 인물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조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조조 역시 오늘날 삼국지 도서 시장에서 소위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해보자면 삼국지를 주제로 한 도서 시장은 그렇게 전통적인 제갈량, 그리고 현대의 조조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보면 뜬금포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마의의 정통 평전이 나왔다. 사실 사마의라는 인물은 삼국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크게 중요하게 인식되는 인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마의는 제갈량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연에 가까웠다. 만고불변의 충신으로 추앙받던 제갈량의 라이벌이었기에, 그는 역사적으로 엄한 모함을 받았다. 사마의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간신, 왕위를 찬탈한 모반자 등등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데, 그의 라이벌인 제갈량과 매우 대조적인 이미지다. 이런 전통적인 시각은 오늘날 삼국지 도서 시장에도 은연중에 만연하고 있는데, 실리주의자인 조조를 새롭게 조망하는 움직임이 있다 하더라도, 사마의를 조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후한 말, 그리고 삼국시대라는 난세를 실질적으로 종결지었던 사마의가 과연 제갈량보다 능력이 떨어진 것일까? 조조보다도 실리적인 측면이 떨어지는 인물인가?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 외에도 도서 시장에는 사마의를 조망한 책이 여럿 있었다. 그럼 여타의 다른 책보다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무엇일까. 이 책은 온전히 사마의의 삶에만 집중하고 있는 '정통' 평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에 있던 사마의를 다룬 책들은 자기 계발서 스타일의 책이 많았다. 이를 대표할 수 있는 책은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라는 책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알기 쉽고, 교훈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그러나 단점을 꼽아보자면,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억지스러운 해석도 많은데, 처음에는 저자가 이끌어내는 교훈이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뻔하고 지루한 패턴이 반복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힌다. 그러나 《결국 이기는 사마의》의 경우, 그런 억지스러운 해석이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뻔한 결론과 통속적인 결론을 무리하게 이끌어내지 않는다. 사료에 나온 문헌들을 최대한 꼼꼼하게 해석하여 설명해준 뒤, 자신만의 생각을 간결하게 군데 군데에서 선보이고 있었다. 정통 평전과 자기 계발서 스타일의 책은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만약 사마의의 역사적인 행적을 고찰한다면, 평전 쪽이 훨씬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 외에도 평전 스타일로 사마의를 다룬 책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깊이다. 조금만 검색하거나 관심을 가져도 나올 법한 스토리를 엮어서 시중에 내놓은 사마의 평전이 수두룩하다. 그렇기에 삼국지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 마니아의 입장에서는 종래의 사마의 평전에서 깊이 있는 시각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종래의 다른 사마의 평전들과는 다르게 사마의의 일생을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다. 저자의 필법은 조곤조곤하며 차분함을 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저자의 설명은 삼국지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사마의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으며, 저가가 분석하는 해설 역시도 대체적으로 공감을 샀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지만, 능력만 있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사람이나 역사적 위인을 살펴보면 능력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처세가 뛰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사마의는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 처세력으로 봤을 때 단연 탑 급이다. 사마의가 싸워온 상대들은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다. 조조, 제갈량, 손권 등등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굵직한 인물들이 사마의와 대립했다. 그러나 그런 영웅들과의 싸움에서 사마의는 결국 이기고 최종 승리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그의 일대기를 읽다 보면 정치적 처세와 식견 등등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부분이 많았다. 인간은 좋던 싫던 무리를 짓고 살아야 한다. 무리가 이뤄지면 필연적으로 권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이런 권력에 어떻게 적응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두툼한 사마의의 인생을 읽으며 나는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 읽었고, 이 부분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끝으로 이 책의 저자는 무조건적으로 사마의를 옹호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사마의는 개인적인 처세가 매우 뛰어났지만 권력을 얻은 뒤 그 권력을 시대 흐름에 맞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단점으로 꼽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마의는 경쟁자인 제갈량과 조조에 비해 한수 아래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한실 부흥이라는 철학이 있었다. 사마의의 통치에는 그런 철학이 결여됐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걸맞은 사명이 있기 마련인데, 유능한 지도자는 획득한 권력을 그러한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시대를 개선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그 권력을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방법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치 이는 일본 전국시대의 노부나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차이점과도 흡사한데,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 철학이 뚜렷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통치를 살펴보면 그런 통치 철학이 두 영걸에 비해 뚜렷하지 않다. 이에야스가 내세운 구호는 그저 '도쿠가와 가문의 통치 체체'였고, 어쩌면 그런 단순함 덕분에 현실에서 최종 승리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면 역사의 최종 승리자라 할 수 있는 사마의와 이에야스의 승리 배경은 어쩌면 '단순함'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이상이 있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는 특정한 사상이나 생각은 필연적으로 호불호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노부나가는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히데요시 역시 과도한 이상에 사로잡혀 조선을 정벌하여 패망을 자초했다. 제갈량은 한족 부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촉한을 이끌었고, 그것에 매달려 자신을 희생했다. 그러나 사마의나 이에야스의 정치는 이런 라이벌들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상이 있어도 그 이상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상에 가깝다.(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이 대표적인 예) 사마의나 도쿠가와에 통치에서 보듯, 이상이 결여된 점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바람직한 지도자는 시대정신에 부합한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해나가는 인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런 인물은 역사적으로 흔하지 않다. 바른 지도자, 명군이 드문 이유는 어쩌면 이런 복잡한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두툼한 평전을 통해 얻은 것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올해 읽었던 역사 평전 중에 가장 뛰어난 책이 아닐까 싶다. 2018년 드라마도,  역사 도서도, 나에게 있어 가장 최고는 '사마의'니, 올 한 해는 나에게 있어 '사마의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삼국지를 좋아하거나 사마의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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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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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아니 대한민국의 역대 지도자 중 가장 질책을 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선조와 인조가 단골로 거론된다. 두 임금이 욕을 먹는 공통점은 치세 기간 중 일어난 외침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선조는 임진왜란(필자는 임진왜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하 임진왜란은 임진전쟁으로 표기한다.), 인조는 병자호란(마찬가지로 병자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겪을 때 무능한 지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선조의 경우, 역사적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과의 비교 때문에 비난의 강도는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책은 그런 선조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선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자제하고, 선조의 공과 사를 냉정하게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었다. 비난 일색의 선조에 공과 사를 구분하여 밝힌다고 했는데, 일반적인 국민 정서와 견해와는 대치되는 부분이 있기에, 책의 평가 역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추측됐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버를 비롯하여 여러 도서사이트에 이 책의 서평을 읽어봤는데, 좋다는 평도 있었고, 나쁘다는 평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책의 평가는 낮은 편이었는데, 내용은 이성이 아닌 감정적인 공분을 앞세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선조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군왕이지만, 너무 여론몰이식으로 매도하여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고루 존재한다. 위대한 인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며, 역사적으로 악독한 악인들에게도 손톱만큼이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선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임진전쟁 때의 선조의 처세를 생각하여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지만, 그런 선조도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책은 그런 선조의 장점을 최대한 고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을 참고 자료로 읽었다. 이 글에서 주장하는 선조의 장점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나 스스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은 결과, 의외로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선조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생각한 바, 내가 생각한 선조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치세의 시기에는 정치력이 상당히 괜찮았던 지도자였다. 우리는 흔히 선조를 생각할 때 리더십이 없고 줏대 없이 무능한 모습만 보인 군왕으로 생각하는데, 실제 선조는 그렇지 않았다. 선조는 정치적인 식견과 권력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발달한 군주다. 선조는 알다시피 방계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그렇기에 역대 다른 국왕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미숙하며 소극적으로 활동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노회한 신하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하며, 자신의 권력 즉 군주의 권한을 차츰차츰 강화했다. 실제로 임진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선조의 정권은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임진전쟁이 끝난 뒤에도, 선조는 현실 권력을 잃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권력의 핵심을 잘 간파하고 있었으며, 권력의 역학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 군주였다.

두 번째로는 인재를 보는 눈이다. 선조가 인재를 잘 본다니 그럼 이순신과 같은 명장은 왜 못 알아봤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선조는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4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는 지도자다. 다만 선조가 이순신에 관한 인사를 판단했던 때는 바로 '난세'였다. 앞에서 고찰했고, 뒤에서 밝히겠지만 선조의 리더십에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난세에 보여줬던 아쉬운 리더십이다. 반대로 선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앞에서 고찰했듯 치세의 시기에 보여줬던 리더십이다. 이런 치세의 리더십에서 가장 빛을 발휘한 부분이 바로 인사권이다. 선조는 사람을 잘 간파하고 잘 읽어냈다. 특히 문관들의 인사에 있어서는 굉장히 탁월한 안목을 보여줬던 군주다. 치세의 시기에 권력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사람을 잘 읽어내는 인사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로 중화사상 즉, 조화를 중시하는 태도다. 선조의 인사 정책, 그리고 선조의 성향을 잘 고찰해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는데 바로 편파적인 사람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온화하고 온건하며,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신권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철과 같은 극단적인 서인을 기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선을 넘을 때에는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 등등 선조가 주로 중용했던 인사들은 당파색이 있는 인물이지만 대체로 온건하고 과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선조가 이순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의 극단적인 단호함에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네 번째로 선조는 실증적이고 자연과학적인 탐구정신이 많았던 지도자다. 선조가 집권할 당시에는 학문적 흐름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선조 역시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하지만 경연을 하거나 신료들과의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얼음'에 대한 질문, 그리고 '땅과 우주'에 대한 실증적인 질문을 하는데, 이런 부분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자들이 대답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질문이었다. 또한 임진전쟁 때부터 애독했던 《주역》은, 일반적으로 점을 치는 책으로만 생각하는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역》은 자연현상을 인문적, 철학적으로 풀이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항간에서는 《주역》을 동양 최초의 인문 과학서로 칭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만약 선조가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실증을 바탕으로 한 과학 과목에 굉장히 흥미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으니 아마 오늘날에 환생한다면 자연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선조는 치세의 시대에서는 세종과 같은 먼치킨 능력을 가진 군왕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실제로 당시 집권세력인 사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군왕으로 선조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선조의 지적 능력 역시 그런 신하들의 기대를 충족하기에 충분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시대에 만약 임진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혹평을 받는 군주로 역사에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난세의 시기 선조의 무능한 리더십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 행정의 체제적 문제, 그리고 신하들의 탁상공론으로 인한 문제 등등을 간과하고 임진전쟁의 결과적 책임을 선조에게만 돌리는 것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점을 가진 선조였지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어쨌든 임진전쟁은 그의 집권기에서 터졌고 그랬기에 선조의 문제점은 그런 난세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조의 단점을 열거해보자면 첫 번째로는 여색에 대한 집착이다. 선조는 유독 여색에 집착했다. 집권 초에는 군왕 수업을 받고 가르치려고 드는 대신들로 인해 마음이 외로웠고, 그런 외로움을 후궁들에게서 해소했다. 이런 호색은 임진전쟁 때에도 이어졌으며 집권 말기에는 왕후를 새롭게 들여서 훗날 왕실의 분란을 예고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줏대 없는 행동이다. 임진전쟁 때에 선조는 유독 줏대 없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 치세의 시기에는 나름 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이 터지자 서생 특유의 문약한 모습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번복하고, 백성들에게 성을 사수한다 약속한다며 자신은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으며, 여색과 줏대 없는 행동이 결합된 결과, 훗날 대권 구도에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불렀다.

세 번째로 자신감이다. 선조는 늘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치에 있어서는 늘 한발 물러나고 온건한 방향만을 고집했다. 물론 온건한 방향이 사회통합적인 면에 있어서는 장점으로 적용하지만, 때론 지도자가 자신 있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다. 특히 난세의 경우는 더더욱 지도자의 강단을 요구하는 때가 많다. 그럴 때에 선조는 늘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에 있어 자신감이 부족한 선조의 심리에는 분명 방계 혈통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임진전쟁 직후에는 전쟁에 대한 속죄 의식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 결여는 결국 책임 의식 결여, 현실 기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선조는 말로만 전쟁의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의 결과를 책임지는 모습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네 번째로 그릇의 크기다. 선조의 집권기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바로 속 좁은 도량이다. 사실 군왕들은 자신의 명성을 넘어서는 신하를 경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조는 유독 그런 부분에 있어서 질투심이 심했다. 그래서 자신과는 대조적인 이순신을 경계했고, 의병들의 활동을 소극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치세의 시기에 군주의 명성을 넘어서는 세력이 생긴다면 경계의 필요성이 있겠지만, 때는 난세였다. 이런 난세의 상황이라면 허심탄회하게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영웅들을 인정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지도자의 바람직한 도량인데, 선조는 그런 그릇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좁은 도량을 가졌기에 4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온 국민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 말기의 모습이다. 선조의 정권은 전형적인 용두사미 정권이다. 정권 출범 당시에는 굉장히 안정적이고 선조의 정치력 역시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기점으로 그 후의 모습은 초심을 잃은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았다. 정권 초기에는 영민했기에 공부를 하며, 정치력을 키워나갔고, 현실 정치도 치우침 없이 배우던 군주였지만, 정권 말기에는 국난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탕으로 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영민한 모습은 영악한 모습으로, 뛰어난 자질을 기대했던 정치력은 음험한 모략가의 기질로 바뀌었다.

사실 선조의 자취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적인 연민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군왕이 된 것이 아니다. 윗선과 신료들의 의논으로 인해 왕위가 결정 났고, 그런 상황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는 수구적인 훈구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사림은 그런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선조를 성리학적 이념에 걸맞은 군주로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선조 역시 이러한 흐름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이황과 이이, 기대승 등등의 최고의 성리학자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림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윤리와 도덕관은 자신이 실천하기에 너무나도 높은 이상이었다.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 출신인 그였기에, 최대한 신료들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 앞에서 선조는 한없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신료들 사이에서 선조는 고독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여색을 통해 그런 고독과 열등감을 해소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서울대를 갈 수는 없다. 똑똑하고 영민하다 하더라도 공부 스타일이나 방법론에 따라 서울대를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다. 선조도 그랬다. 그는 나름 똑똑하고 영민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사림은 그런 영민한 선조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대했다. 어느 순간 선조는 그런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런 후로는 신료들의 강압적인 가르침을 건성으로 들으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한도를 설정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름의 노력도 임진전쟁을 겪은 뒤로는 뒤틀려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 인간이라면 가장 높은 위치라 할 수 있는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결코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의 모습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민은 감정적인 부분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선조를 생각해보면 역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의 위치는 연민만으로는 변명할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고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다. 그랬기에 임진전쟁이 터졌을 때, 좀 더 의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난세의 시기 너무나도 문약했고 비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약한 그의 내면에 연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비판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도자란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당시 그는 조선을 책임지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책임감으로부터 선조는 도망쳤기에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지도자는 태종 이방원이다. 조선 역사, 그리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난세에 있어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보여준 군주는 태종 이방원이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조가 태종처럼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자신감을 발휘하여 정치에 임했으면 아마 임진전쟁이라는 난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항간에서는 아들인 광해군과 선조를 비교하며 광해군을 칭송하고 선조를 내려깎기도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외교에 대한 부분은 확실히 광해군이 선조보다 나은 실리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치와 조정 신료들을 다루는 부분으로 생각해보자면 광해군은 선조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광해군이 몰락한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측근 정치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당파만을 믿고 편협하게 사람을 임용하였으며,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결과, 몰락했으니 말이다. 반면 선조는 어린 나이에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당파의 신료들을 적절하게 컨트롤했다. 광해군이 만약 선조의 스타일대로 온건하고 치우치지 않은 인사정책을 따랐더라면 어쩌면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책을 통해 선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았다. 물론 책 부분 부분에는 나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점도 있다. 변명하는 선조의 모습을 진심 어린 모습으로 해석하는 부분 등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지적하는 선조의 장단점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선조를 이야기할 때 여론과 일반적인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사실 그랬는데, 이 책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선조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책의 장점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당시 정계의 판세와 흐름을 명료하게 정리하여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당파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대립했는지, 선조의 정치적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으며,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고, 엄청나게 피곤한 자리이며, 엄청난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자리라는 교훈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오히려 선조가 군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훨씬 행복하고 멋지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는 학구적이며 탐구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시와 서예를 잘 쓰는 풍류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그런 인물이 강압에 의해 억지로 왕이라는 옷을 입고 행동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또한 그렇게 노력하며 집권하는 당시, 임진전쟁이라는 큰 핵폭탄이 터졌으니 서생 기질이 다분한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그래서 나는 선조의 인생에서 1차 비극이 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2차 비극이 그의 집권기에 임진전쟁이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인생을 과연 행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저 왕이라는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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