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 - 도가사상의 정수
열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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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노장사상을 대표하는 책으로 《노자》와 《장자》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렇기에 도가사상은 노장사상으로 통한다. 오늘 리뷰하려는 《열자》도 이런 도가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다. 《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의 화자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다. 《장자》는 《노자》와는 다르게 작은 이야기집, 우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자》 역시 이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열자》와 《장자》는 우화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사상적으로는 도가사상에 기초한다.

 

비슷한 구성의 책이라서 그런 것일까? 왜 《열자》는 《장자》보다 덜 알려지게 됐을까? 역자의 자세한 해설을 읽고 나름의 짧은 지식을 통하여 생각해 본 바 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흔히 도가사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신선'이다. 세속으로부터의 탈피, 원시적인 자연을 동경하며, 속세를 잊고 사는 자연인의 모습. 이런 모습들은 도가철학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상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과연 도가철학이 개인의 탈속과 자유만을 추구했느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 《장자》는 철저하게 개인의 자유와 탈속을 추구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럼 도가사상의 원류에 해당되는 《노자》는 어떠한가?

 

다양한 판본들을 읽어보고 나니 《노자》는 개인의 수양과 탈속보다는 공동체적, 즉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치적인 내용을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춘추전국 시대와 전한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도가적인 색채를 가진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들 정치와 관련됐다. 초한쟁패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장량과 진평이 이에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결론을 내려보자면 《노자》는 개인의 탈속보다는 국가의 정책과 방향과 관련된 정치서적 텍스트이고, 《장자》는 자유분방한 노자의 사상을 개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열자》는 어떤 책일까?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장자》와 비슷하게 탈속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우화들을 자세히 음미하다 보면 《노자》에서 추구하던 공동체와 정치적인 내용도 들어있고, 《장자》에서 추구하는 개인의 탈속과 관련된 내용도 들어있다. 역자인 신동준 선생님은 기존의 학계와는 다르게 고전을 색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열자》 역시 마찬가지다. 역자는 《열자》는 《노자》의 기본 사상인 정치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우화집이라고 규정하고, 《장자》보단 《열자》가 《노자》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열자》를 읽으면서, 《열자》가 《노자》를 사상적으로 직접적인 계승을 했다는 논의에 갸우뚱한 부분은 있지만, 확실히 《장자》보단 《열자》 쪽이 정치적인 뉘앙스가 많다는 주장은 긍정한다. 그렇기에 역자의 주장과 나의 생각을 절충해보자면 《열자》는 《노자》와 《장자》의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열자》는 특유의 잡탕적 성격 때문에 역대 이래로 위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진서로 규정하는 것이 학계의 대세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양주와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철학은 대부분 공동체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농경, 정착 문화를 가진 민족이기에 철학 역시도 공동체의 효율적인 통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중국에서도 극단적인 개인주의 철학을 가진 사상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양주다. 양주는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전체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그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그래서일까, 양주의 목소리를 담은 저작은 전해지지 않는데, 유일하게 양주의 관점을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열자》다. 이뿐만 아니라, 《열자》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공이산'과 같은 고사의 우화도 볼 수 있어, 이런 부분들을 발견하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었다.

 

개인적으로 신동준 선생님의 동양고전 번역본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몇 년 전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렇기에 역자의 이름으로 나오는 동양고전은 보기 힘들겠구나 아쉬웠는데, 이렇게 새로운 신간으로 《열자》를 만나니 오랜 지기를 보는 것처럼 무척 반갑다. 물론 이 책은 예전에 발간됐던 책인데 구간이 절판되어 새로운 표지와 편집으로 출간된 책이다. 돌아가셨지만, 새로운 편집본을 통하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나름의 아쉬움을 덜어낸다. 《열자》를 시작으로 《논어》, 《맹자》, 《대학중용》, 《노자》, 《장자》, 《주역》 등등의 책들도 새롭게 복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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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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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치고 장량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동양의 모사들을 통틀어 장량은 으뜸으로 추앙받았으며, '자방'이라는 그의 자는 최고의 참모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유명세와는 다르게 그의 삶은 조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 것일까?

먼저 생각해 볼 점은 그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일생을 기준으로 하는 100년의 세월도 엄청 길게 느껴지는데 2000년은 오죽하겠는가! 물론 커다란 세월의 간격이 그의 삶을 조망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삶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다룬 기록이 전해진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최고라는 수식을 받은 인물들의 삶은 기이하거나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다. 장량도 마찬가지다. 그를 다룬 역사 문헌들조차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라 불리는 《사기》는 물론이요, 민담과 설화를 최대한 배제했다는 《한서》에서조차 장량의 기록은 한결같이 신비롭고 기이하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허구가 주축이 되어 만든 장량의 모습을 진실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삶에서 보이는 신화적인 요소를 무작정 무시할 순 없다. 서구 사회의 근간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해석하기에 따라 그 당시의 인간 군상의 보편적인 모습들을 신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들에게 신체의 불멸과 능력의 완전함을 배제한다면 그들 역시 보편적인 인간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신들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에 분노를 하며, 실수를 하고, 질투를 하며, 사랑을 갈구한다. 불완전한 멘탈을 가진 것은 여느 평범한 인간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장량의 삶에 깃든 신비로움도 쉽게 간과할 순 없다. 한나라를 건국한 뒤 부귀공명을 뒤로하고 적송자와 노닐다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은 그만큼 그가 여느 개국공신과는 다르게 겸손했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황석공과의 만남과 《태공병법》의 전수, 곡식을 끊고 화식을 먹지 않으며 노년을 보냈다는 이야기 등등... 장량의 삶에는 기이하고 신화적인 측면을 유독 많이 볼 수 있다. 동양 고전이나 문화, 역사 기술 필법에 능한 사람은 이를 합리적으로 분별하여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사실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와중에 이 책을 접했는데, 여느 다른 서적과는 다르게 장량의 삶을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책은 신화 속에 가려진 장량의 진면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덕분에 《사기》와 《한서》를 읽으며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도 배울 수 있었다. 장량이 최고의 참모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치고 빠지는 부분을 잘 계산하는 임기응변 덕분이리라. 정확한 형세 분석은 기본이요, 언제 치고 나가야 할지, 누구와 동맹을 맺어야 할지, 언제 빠져야 할지 등등을 잘 계산하는 인물이었다. 혹자는 장량을 두고 유교적인 인물로 파악하여 신의가 있고 군자의 풍모가 있다고 칭송하지만, 내가 본 장량은 철저하게 도가적인 인물이다.

유가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만 도가는 인간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차갑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보자면 도가는 인간을 악하게 규정하는 법가보다도 훨씬 냉혹한 사상이다. 장량의 모책도 비슷하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도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작은 예절이나 법도에 구애받지 않았다. 참모에게 있어 중요한 점은 나의 책략이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이다. 그 계책을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인의와 도덕을 지킬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도의적으로 잃는 것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계산해 봤을 때 이득이 많다면 이를 과감하게 주장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장량은 이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그렇기에 어느 상황에서는 도의와 대의를 쫓으며 명분을 따를 것을 강조했고, 어느 상황에서는 자질 구례한 예절보다 실제적인 이득을 취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책략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맞게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바꿔나갔다.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뛰어난 사람을 분류해보자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천재형, 두 번째 노력형.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량을 천재형으로 손꼽는다. 나도 그랬었다. 장량의 삶에 깃든 기이함과 신비로움은 선천적인 능력을 한층 우러르게 만드는 매개체들이니까. 그러나 그는 노력형 인물이었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금수저 도련님에서 협객, 방랑자, 의용군의 우두머리, 부활한 한(韓)나라의 재상을 거쳐 유방의 참모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심리 변화도 주목할 만 한데 처음에는 조국 한(韓)나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성격이었지만, 풍파의 세월을 겪으면서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난세를 종식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측면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는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입체적인 인물이었으며, 날 때부터 천재가 아닌 숱한 실패 속에서 자신을 가다듬은 노력형 인물이었다. 특출나고 비범한 삶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기 위해 분투한 지식인의 고독한 모습은 오늘날 노력이라는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책을 통해 실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장량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용의 전개는 기존의 평전 스타일이 아닌 역사소설처럼 풀어냈는데, 군데군데에 《사기》를 인용하여 서술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장량과 관련된 내용을 읊은 문인들의 시(詩)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전기 특유의 무미건조함도 덜하다. 번역도 괜찮은데 《동주 열국지》, 《원본 초한지》 등등 장량과 관련된 배경을 다룬 소설 고전을 옮긴 역자의 솜씨라서 무난하게 읽힌다. 장자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은 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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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의 협상법 - 인생의 승부처에서 삶을 승리로 이끄는 협상비법
신용준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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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계발서를 즐겨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성 들여 쓴 양서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광고를 볼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알려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주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식인데,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뜬구름만 잡고 두루뭉술하게 끝맺는다. 즉 간만 보여주고 노른자는 안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부류의 책을 볼 때 두 가지를 철저하게 고려한다. 첫 번째, 주제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료하며 현실적인가? 두 번째, 돈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책인가?

다행히 이 책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했다. 책에서는 협상기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예시와 풍성한 훈련을 들어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서술됐다. 내용은 합격이며 책값도 합리적이다. 그러니 시간을 투자하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한 권의 양서는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정성과 응축된 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찍어내는 숱한 자기계발서와는 결이 달랐다. 폭탄이 아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완독을 할 수 있었다.

협상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반사적으로 사업과 영업이 떠오른다. 두 영역에서 협상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도 협상은 무척 중요하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협과 협상이 필수적이다. 나 자신과의 협상, 타인과의 협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는 수많은 협상을 하며 살아간다. 구멍가게에서 할인을 요구한다거나 재래시장에서 흥정을 하거나, 아이가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하거나...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협상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다.

'굳이 이런 협상을 다룬 책을 읽을 필요가 있겠어? 그냥 내키는 대로 조율하면 되는 거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영악하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남들에게 호구처럼 취급되진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당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협상 기법을 알아야 한다. 협상의 핵심은 이익의 절충이다. 문제는 나의 이익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나의 이익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이익과 맞물려 있다. 우리는 이 욕망의 충돌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올바른 협상'이 필요하다.

책을 통해서 협상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알게 됐다. 협상에 관련된 전문적인 용어와 기술적인 스킬, 그리고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협상에 관하여 전반적인 개념을 잡고 싶거나, 기술적인 기법을 배우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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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발전할 수 없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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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발자취는 동아시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양의 여러 열국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계승해왔으며, 더러는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사는 동아시아 문명을 주도하는 축이었으며, 그렇기에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동양문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원 대륙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분열된 시대이며, 두 번째는 통일 제국의 시대다. 전자는 난세, 후자는 치세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분열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시대(5호 16국 시대), 오대 십국 시대를 꼽을 수 있겠고, 통일된 제국 시대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기가 대표적이다. 보통 역사의 흐름은 난세와 치세가 반복되는데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찢어진 세력은 끝내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지지만 그 제국의 수명이 다하고 난세가 도래하면 또다시 군웅들이 할거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분열된 시기보다 제국의 시대가 더 좋을 것 같지만, 역사를 꼼꼼하게 해석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오늘 리뷰할 도서의 주인공인 당나라는 중국의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난세 중에 난세인 전국시대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진시황제의 진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법가를 앞세운 폭정이 극도에 달해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왕조 한나라는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어수선했던 사상과 행정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유학을 극도로 숭상했다는 것이다. 한나라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한무제는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들을 무찔러 한나라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림과 동시에, 사상에 있어서 유교의 일원화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이후 중원 대륙에서 유학은 나라의 으뜸 이념이 되었으며, 이는 2000년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런 한나라가 몰락하고 삼국시대를 거쳐 잠시동안 진나라가 통일을 하는가 싶더니 이민족들의 침탈로 인해 중원은 다시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 난세의 시기를 통틀어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명명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한나라 때 형성된 유학 일원화 사상이 느슨해지고, 자유분방한 도가 철학이나 방술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시기, 중국의 북방은 여러 이민족들이 점령하여 새로운 왕조들을 개창하였는데, 이로 인해 중원에 이민족들의 풍습이 대거 유입되었다. 즉 중원의 북방에는 유목민들의 문화가, 남방에는 한족의 문화가 공존했던 것이다. 이를 좀 더 풀어보자면 역사에 있어 난세의 시기는 무차별적인 혼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명, 사상과 사상의 융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겠다.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수나라인데, 수나라 역시 앞선 진나라와 같이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당나라에 권좌를 내줬다. 그리고 당나라는 중원을 300년 동안 다스리게 되는데, 지금까지 중원에 들어섰던 나라들 중 한나라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권좌를 유지한 나라는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중원을 다스린 제국인 만큼, 당나라의 발자취는 중원을 넘어 동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책을 통해 면밀하게 살펴본 바, 당나라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위진남북조 시대의 흔적인 유목문화와 한족 문화의 융합

2. 사상과 종교의 다원화 (유교, 도교, 불교의 공존)

3. 중화문명권의 확장과 개방적인 문물 교류

당나라 시대의 키워드를 하나로 정리하자면 '포용과 다원화를 존중하는 개방성'이다. 이전에 들어섰던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중앙집권을 도모하며 일원화된 체계를 추구한 것과 무척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당나라 시대에도 지식인층이나 지도자층의 기본 이념은 유교에 입각하였지만, 불교와 도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서양 행상들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국제도시로 명성을 쌓았다. 같은 통일왕조더라도 한나라의 수도 장안, 낙양과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던 셈이다.

당나라의 다원성은 이후에 들어서게 되는 송나라와 비교할 때에도 두드러진다. 당나라 몰락 이후 5대 10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송나라가 통일하는데, 문제는 이 송나라에서 탄생한 주자학에 있었다. 주자학은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강화하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더한 학문이다. 주자학의 탄생 이후 중원에 들어서는 나라들은 주자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 역시 멸망할 때까지 주자학을 신봉했다. 즉 송나라는 주자학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동아시아 문명에 주류 사상으로 고착화했다. 이런 모습은 한나라의 유학 일원화 정책과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주자학적 사고관에 함몰된 지식인들은 유학을 으뜸으로 숭상한 한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반면, 다원화된 사상과 문화를 추구했던 당나라와 청나라에는 베타적인 시각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편파적인 시각이며, 당나라와 청나라는 중국의 대륙에 사상과 종교, 문화의 다원화를 추구했고 유목민과 한족 농경문화를 융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왕조라고 생각한다. 이들 왕조가 있었기에 동아시아 문명국가들은 유교와 더불어 불교 도교의 문화를 다양하게 추구할 수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위상을 가진 당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흔히 우리는 당나라의 지도자를 생각할 때, 아버지와 형, 동생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정관의 치를 구성한 태종 이세민에 관심을 집중한다. 확실히 태종은 불세출의 명군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출중했으며, 정치적 식견 역시 탁월했다.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대체로 난세를 치세로 바꿨던 경우가 많으며, 권좌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피를 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당 태종 이세민을 비롯하여, 명 태종 (훗날 성조로 바뀜) 주체, 청 태종 홍타이지 그리고 조선에 태종 이방원 등등이 있다. 이들은 군사적 업적이 탁월했으며, 정쟁을 통하여 권좌를 획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태종 이세민은 여러 나라의 태종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 역시 말년에 자만으로 인해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후계구도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운 것이 압도적이니, 후대인들에게 명군으로 인식됐다.

나는 널리 알려진 당 태종보다는 당 현종에 더 관심이 갔다. 당 현종 이융기도 초년의 모습은 당 태종과 흡사했다. 측천무후의 집권 이후 혼란했던 당나라 국정을 바로잡았는데 여기에 중심적으로 앞장선 인물이 바로 당 현종이다. 그는 태종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스스로 습득했으며 이를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숱한 정쟁 끝에 황위에 올라 백성들을 위한 정사에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나라의 중흥기, 개원성세는 그렇게 당 현종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 현종의 치세는 용두사미로 끝난다.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권신들에게 양보하고 주지육림을 탐하여 제국의 몰락을 앞당겼다. 중앙의 정치 시스템이 타락하자 그 틈을 탄 지방의 번진 군벌 세력들이 궐기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녹산의 난이었다.

중국이라는 넓은 땅을 한 사람이 통치하려면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역대 황제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나 군벌 세력을 어떻게 통제할까 고민하였는데, 현명한 지도자들은 이를 잘 통제했지만, 어리숙한 황제들은 도리어 번진 세력들의 먹이로 전락했다. 주색에 빠진 당 현종은 초년의 기개 있는 모습을 상실했고 초심을 잃었다. 이후 당나라의 황제들은 비대한 지방 번진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황제 입장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은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환관들 뿐이었기에, 이들을 총애하여 군권을 양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환관 세력의 정치적 전횡으로 이어졌는데, 실권을 가진 환관들이 도리어 황제를 업신여기고 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된 것이다. 이렇듯 당나라 중후반기의 모습은 밖으로 지방 세력들이 날뛰고 있고, 안으로는 환관들이 도당을 지어 황제를 핍박하고 있었다.

300년의 당나라 역사를 개괄하여 보면 뛰어난 성군보다는 혼군이나 암군이 월등히 많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무측천과 양귀비 등의 여걸들의 활동도 두드러지며, 환관의 전횡, 그리고 지방 세력의 궐기 등등도 두루 드러나 있다. 무측천의 등장에 대해서 기존의 사관들은 매우 비판적인 시각이지만, 그래도 변명 아닌 변명을 끄적여보자면 남성 중심주의 제국에서 여성 황제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보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이런 여황제의 출현 역시도 당나라의 개방성과 관련이 깊지 않나 생각이 든다.

동양의 역사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계층의 수요를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반복되는 교훈을 음미하며 정치의 직간접적인 자양분으로 삼았다. 고루해 보이는 왕조국가의 역사가 급변하는 오늘날 현대사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역사교육의 인식이 약해지는 오늘날, 자국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에 중국의 역사까지 읽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역사란 반복되는 인간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인류는 이 보편성을 거울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열어왔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존재가 집단생활을 영위한 아래, 시공간을 초월하며 드러난 '인간만의 보편성'을 감히 간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급성장하는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DNA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문화적 코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적 코드를 분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겠지만 그들이 살아온 발자취,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나라는 중국인의 사고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제국이다. 그렇기에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당나라의 역사를 살피려면 단편적인 검색에 의존해야 하거나, 너무나도 방대하며 전문적인 원전(가령 예를 들면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을 살펴야 했다. 이 책은 비전문가도 손쉽게 당나라의 역사를 조감할 수 있게 서술되어 있으며, 중국 역사의 입문서로도 안성맞춤이며, 나아가 깊이 있는 내용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급성장하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 혹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고자 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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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4 - 로마와 지중해 세계 리비우스 로마사 4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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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그리스 반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대부분인데, 원전의 권수로는 31 ~ 4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주적이었던 한니발은 그리스 지역의 실력자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연합 전선을 구성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한니발의 패배 이후 로마는 후방에서 계속 신경을 긁던 그리스 지역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고, 그 결과 3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 끝에 그리스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해양(지중해)으로의 진출과 정복전쟁에 대한 자신감이다. 강대국 카르타고를 두 번이나 이겼다는 사실은 로마의 자존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럼 그리스 세력과의 전쟁에서 로마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바로 헬레니즘 문화의 주도권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시초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손꼽은 지역이다. 로마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도 그리스 지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리스의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유 역시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비롯했다. 조선 시대까지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문자인 한문으로 글을 읽고 썼는데, 마찬가지로 이 당시 로마의 지식인들은 그리스 헬라어를 바탕으로 그리스의 철학과 문화를 공부했다. 예로부터 동양 문화를 주도했던 나라가 중국이라면 고대 서양 문명을 주도했던 지역은 로마가 아닌 그리스였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서구 문화 나아가 헬레니즘 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은 그리스지만, 실질적인 힘은 카르타고를 무찌른 로마에게 있었다. 이 당시 그리스 지역은 로마처럼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도시국가들끼리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로마에 적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입장에서 그리스는 '언젠가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로마인들은 '난폭한 야만인'으로 통용되었고, 자부심이 강한 로마인들 입장에서 그리스인들은 '문화적 수준은 높지만 이를 지탱할 실질적인 힘이 없는 허풍쟁이들'로 비쳤다. 그렇기에 로마는 '그리스 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 아래에 그리스 지역으로 군사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 문명을 힘으로 계승'하겠다는 의도였다.

 

문화를 힘으로 쟁취하려는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의 시작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지중해를 이용하여 해양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타깃이 바로 그리스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식민지 정책을 본받았는데 기존까지 로마는 점령한 도시에 대하여 동맹 관계로 예우하고 존중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점령지들을 속국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편 그리스의 맹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는 야심만만했으며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한니발의 제의를 받아 로마의 신경을 건드렸는데 양국의 전황을 살피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로마 입장에서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랬기에 포에니 전쟁 직후 사절을 파견하여 전쟁의 구실을 찾아 그리스 지역을 정벌하는데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로마는 제국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스페인, 카르타고, 그리스를 시작으로 서쪽으로는 서부 유럽 갈리아와 영국,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지방까지 세력권을 형성했다.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에 있어 스페인과 카르타고 점령이 물리적인 실력 과시였다면, 그리스 점령은 영토 점령보다는 정신적인 사상과 문화를 흡수, 계승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스 점령을 끝으로 로마는 서구 문명의 계승자임을 증명했으며, 제도와 군사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국가로 공인받았다.

 

고대 ~ 근세의 강대국들은 대부분 제국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왜 그랬을까? 노골적으로 꼬집자면 부유와 풍요 때문이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전쟁은 고단하고 괴로웠지만 그 이득은 엄청났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전쟁 배상금을 비롯하여 엄청난 이권을 챙겼고, 이에 맛 들인 로마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더욱더 많은 영토를 추구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부유와 풍요가 과연 국가의 발전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되는가이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부와 풍요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의식이 높은 국가일지라도,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없다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로마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가의 부와 풍요가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넘치는 풍요가 국가 발전에 있어 반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로마는 그리스인들의 추구하던 사치와 쾌락, 환락들의 요소들도 남김없이 수용했고 이런 과도한 풍요는 결국 로마의 정신의 타락,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또한 제국주의를 추구하던 로마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에 한계를 느꼈다. 로마의 원로원과 호민관들은 광활한 속주의 지방관들을 견제할 여력과 힘이 없었는데, 이런 틈을 타서 속주의 지방관들은 군벌 세력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군벌 세력들의 경쟁을 통해 로마는 1인 독재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방점을 찍은 것이 카이사르와 그를 계승한 아우구스투스다. 역대 이래로 로마의 지성인들은 공화정 체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를 보장받았기 때문인데, 절대자의 노복이나 신민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으로 인정받는것을 명예로 생각했다. 그래서 리비우스를 필두로 하여,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 등등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그리워하며 찬양하였다. 18세기 서양 사회에서 신분제 타파 운동이 일어난 것도 고대 그리스 이래로 '자유'에 대한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인데, 이런 정신의 근원을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넘치는 풍요는 국가를 외향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공화정이라는 정치 제도를 붕괴시키는 시초가 된다. 공화정이 사라진 뒤, 로마는 탐욕스러운 황제들의 지배를 받는 제정 사회로 진입하였다. 물론 황제의 지배를 받는 로마 제국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여 세계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았지만, 공화정 시대보다 시민들의 자유의지나 사회적 활력이 결여된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권의 메인은 그리스 정벌이지만, 포에니 전쟁의 주축이었던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최후도 자세하게 나와있어 흥미를 끈다.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남아 내정 개혁을 시도하지만 친로마 의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축출되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 의탁했다. 한니발은 강적 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시리아와 카르타고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안티오코스는 차례로 로마의 침략 앞에 무너졌고 한니발 역시 소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망명자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스키피오는 동생 루키우스의 그리스 정벌에 군사 참모로 참여하였는데, 소아시아에서 감찰을 나갔을 때 숙적 한니발과 마주하게 된다. 두 장군은 여기서 허심탄회하게 서로를 인정했으며 훈훈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는데,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만남을 두고 리비우스가 지어낸 허구로 의심했다.

 

스키피오의 최후 역시 한니발과 비슷했다. 조국을 구원한 스키피오는 명성과 권력이 정점에 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원로원들의 질시와 질투를 받았다. 결국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압박을 받아 해안 도시 리투르눔으로 은거하여 고향인 로마를 다시 찾지 않았다. 로마를 구원했으며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스키피오의 업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거대한 업적 때문에 스키피오는 시기와 질투를 받아야 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그런 상황을 뼈져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키피오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공화국의 자유를 수호하는 입장을 상기하며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렇듯 포에니 전쟁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로마의 군벌 세력은 권력과 세력이 강하여도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4》 권을 끝으로 현재 전해지는 《리비우스 로마사》 완독을 완료했다. 책을 통해 로마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으며, 로마 초기의 활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즐거웠다. 비록 온전하게 전해 내려오지 않고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고전이지만 이번 번역을 통해 리비우스의 수려한 필력을 접할 수 있게 된 점도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묵직하고도 의미 있는 고전으로 새해를 열게 되어 무척 행복하다. 이번 《리비우스 로마사》 완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에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고전들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의 요약본'과 '폴리비우스의 《역사》'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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