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발전할 수 없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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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발자취는 동아시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양의 여러 열국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계승해왔으며, 더러는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사는 동아시아 문명을 주도하는 축이었으며, 그렇기에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은 동양문화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있어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원 대륙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분열된 시대이며, 두 번째는 통일 제국의 시대다. 전자는 난세, 후자는 치세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의 분열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시대(5호 16국 시대), 오대 십국 시대를 꼽을 수 있겠고, 통일된 제국 시대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기가 대표적이다. 보통 역사의 흐름은 난세와 치세가 반복되는데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찢어진 세력은 끝내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지지만 그 제국의 수명이 다하고 난세가 도래하면 또다시 군웅들이 할거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분열된 시기보다 제국의 시대가 더 좋을 것 같지만, 역사를 꼼꼼하게 해석하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오늘 리뷰할 도서의 주인공인 당나라는 중국의 문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국 역사에서 당나라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난세 중에 난세인 전국시대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진시황제의 진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법가를 앞세운 폭정이 극도에 달해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통일왕조 한나라는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어수선했던 사상과 행정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유학을 극도로 숭상했다는 것이다. 한나라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한무제는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들을 무찔러 한나라의 위용을 만천하에 알림과 동시에, 사상에 있어서 유교의 일원화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이후 중원 대륙에서 유학은 나라의 으뜸 이념이 되었으며, 이는 2000년 동아시아 문명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런 한나라가 몰락하고 삼국시대를 거쳐 잠시동안 진나라가 통일을 하는가 싶더니 이민족들의 침탈로 인해 중원은 다시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 난세의 시기를 통틀어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명명하는데, 이 시대의 특징은 한나라 때 형성된 유학 일원화 사상이 느슨해지고, 자유분방한 도가 철학이나 방술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시기, 중국의 북방은 여러 이민족들이 점령하여 새로운 왕조들을 개창하였는데, 이로 인해 중원에 이민족들의 풍습이 대거 유입되었다. 즉 중원의 북방에는 유목민들의 문화가, 남방에는 한족의 문화가 공존했던 것이다. 이를 좀 더 풀어보자면 역사에 있어 난세의 시기는 무차별적인 혼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과 문명, 사상과 사상의 융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겠다.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수나라인데, 수나라 역시 앞선 진나라와 같이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당나라에 권좌를 내줬다. 그리고 당나라는 중원을 300년 동안 다스리게 되는데, 지금까지 중원에 들어섰던 나라들 중 한나라를 제외하고는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권좌를 유지한 나라는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중원을 다스린 제국인 만큼, 당나라의 발자취는 중원을 넘어 동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책을 통해 면밀하게 살펴본 바, 당나라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위진남북조 시대의 흔적인 유목문화와 한족 문화의 융합

2. 사상과 종교의 다원화 (유교, 도교, 불교의 공존)

3. 중화문명권의 확장과 개방적인 문물 교류

당나라 시대의 키워드를 하나로 정리하자면 '포용과 다원화를 존중하는 개방성'이다. 이전에 들어섰던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중앙집권을 도모하며 일원화된 체계를 추구한 것과 무척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당나라 시대에도 지식인층이나 지도자층의 기본 이념은 유교에 입각하였지만, 불교와 도교를 극단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서양 행상들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국제도시로 명성을 쌓았다. 같은 통일왕조더라도 한나라의 수도 장안, 낙양과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던 셈이다.

당나라의 다원성은 이후에 들어서게 되는 송나라와 비교할 때에도 두드러진다. 당나라 몰락 이후 5대 10국의 난세를 거치면서 송나라가 통일하는데, 문제는 이 송나라에서 탄생한 주자학에 있었다. 주자학은 유학의 이념을 한층 더 강화하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더한 학문이다. 주자학의 탄생 이후 중원에 들어서는 나라들은 주자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 역시 멸망할 때까지 주자학을 신봉했다. 즉 송나라는 주자학을 탄생시켰으며, 이를 동아시아 문명에 주류 사상으로 고착화했다. 이런 모습은 한나라의 유학 일원화 정책과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주자학적 사고관에 함몰된 지식인들은 유학을 으뜸으로 숭상한 한나라와 송나라, 그리고 명나라를 숭상하는 반면, 다원화된 사상과 문화를 추구했던 당나라와 청나라에는 베타적인 시각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편파적인 시각이며, 당나라와 청나라는 중국의 대륙에 사상과 종교, 문화의 다원화를 추구했고 유목민과 한족 농경문화를 융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왕조라고 생각한다. 이들 왕조가 있었기에 동아시아 문명국가들은 유교와 더불어 불교 도교의 문화를 다양하게 추구할 수 있었다.

이토록 중요한 위상을 가진 당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흔히 우리는 당나라의 지도자를 생각할 때, 아버지와 형, 동생을 죽이고 황위에 올라 정관의 치를 구성한 태종 이세민에 관심을 집중한다. 확실히 태종은 불세출의 명군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출중했으며, 정치적 식견 역시 탁월했다.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대체로 난세를 치세로 바꿨던 경우가 많으며, 권좌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피를 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면 당 태종 이세민을 비롯하여, 명 태종 (훗날 성조로 바뀜) 주체, 청 태종 홍타이지 그리고 조선에 태종 이방원 등등이 있다. 이들은 군사적 업적이 탁월했으며, 정쟁을 통하여 권좌를 획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태종 이세민은 여러 나라의 태종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 역시 말년에 자만으로 인해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후계구도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공을 세운 것이 압도적이니, 후대인들에게 명군으로 인식됐다.

나는 널리 알려진 당 태종보다는 당 현종에 더 관심이 갔다. 당 현종 이융기도 초년의 모습은 당 태종과 흡사했다. 측천무후의 집권 이후 혼란했던 당나라 국정을 바로잡았는데 여기에 중심적으로 앞장선 인물이 바로 당 현종이다. 그는 태종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스스로 습득했으며 이를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지도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숱한 정쟁 끝에 황위에 올라 백성들을 위한 정사에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나라의 중흥기, 개원성세는 그렇게 당 현종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 현종의 치세는 용두사미로 끝난다. 현종은 자신의 며느리인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권신들에게 양보하고 주지육림을 탐하여 제국의 몰락을 앞당겼다. 중앙의 정치 시스템이 타락하자 그 틈을 탄 지방의 번진 군벌 세력들이 궐기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녹산의 난이었다.

중국이라는 넓은 땅을 한 사람이 통치하려면 필연적으로 중앙집권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역대 황제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나 군벌 세력을 어떻게 통제할까 고민하였는데, 현명한 지도자들은 이를 잘 통제했지만, 어리숙한 황제들은 도리어 번진 세력들의 먹이로 전락했다. 주색에 빠진 당 현종은 초년의 기개 있는 모습을 상실했고 초심을 잃었다. 이후 당나라의 황제들은 비대한 지방 번진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황제 입장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은 자신의 지근거리에 있는 환관들 뿐이었기에, 이들을 총애하여 군권을 양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환관 세력의 정치적 전횡으로 이어졌는데, 실권을 가진 환관들이 도리어 황제를 업신여기고 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된 것이다. 이렇듯 당나라 중후반기의 모습은 밖으로 지방 세력들이 날뛰고 있고, 안으로는 환관들이 도당을 지어 황제를 핍박하고 있었다.

300년의 당나라 역사를 개괄하여 보면 뛰어난 성군보다는 혼군이나 암군이 월등히 많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무측천과 양귀비 등의 여걸들의 활동도 두드러지며, 환관의 전횡, 그리고 지방 세력의 궐기 등등도 두루 드러나 있다. 무측천의 등장에 대해서 기존의 사관들은 매우 비판적인 시각이지만, 그래도 변명 아닌 변명을 끄적여보자면 남성 중심주의 제국에서 여성 황제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보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마도 이런 여황제의 출현 역시도 당나라의 개방성과 관련이 깊지 않나 생각이 든다.

동양의 역사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 계층의 수요를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반복되는 교훈을 음미하며 정치의 직간접적인 자양분으로 삼았다. 고루해 보이는 왕조국가의 역사가 급변하는 오늘날 현대사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역사교육의 인식이 약해지는 오늘날, 자국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에 중국의 역사까지 읽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역사란 반복되는 인간의 보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인류는 이 보편성을 거울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열어왔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존재가 집단생활을 영위한 아래, 시공간을 초월하며 드러난 '인간만의 보편성'을 감히 간과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급성장하는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DNA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문화적 코드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적 코드를 분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겠지만 그들이 살아온 발자취,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나라는 중국인의 사고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제국이다. 그렇기에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당나라의 역사를 살피려면 단편적인 검색에 의존해야 하거나, 너무나도 방대하며 전문적인 원전(가령 예를 들면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을 살펴야 했다. 이 책은 비전문가도 손쉽게 당나라의 역사를 조감할 수 있게 서술되어 있으며, 중국 역사의 입문서로도 안성맞춤이며, 나아가 깊이 있는 내용도 두루 다루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급성장하는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 혹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고자 하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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