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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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치고 장량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동양의 모사들을 통틀어 장량은 으뜸으로 추앙받았으며, '자방'이라는 그의 자는 최고의 참모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유명세와는 다르게 그의 삶은 조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런 것일까?

먼저 생각해 볼 점은 그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일생을 기준으로 하는 100년의 세월도 엄청 길게 느껴지는데 2000년은 오죽하겠는가! 물론 커다란 세월의 간격이 그의 삶을 조망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삶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다룬 기록이 전해진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최고라는 수식을 받은 인물들의 삶은 기이하거나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다. 장량도 마찬가지다. 그를 다룬 역사 문헌들조차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라 불리는 《사기》는 물론이요, 민담과 설화를 최대한 배제했다는 《한서》에서조차 장량의 기록은 한결같이 신비롭고 기이하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허구가 주축이 되어 만든 장량의 모습을 진실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의 삶에서 보이는 신화적인 요소를 무작정 무시할 순 없다. 서구 사회의 근간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해석하기에 따라 그 당시의 인간 군상의 보편적인 모습들을 신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들에게 신체의 불멸과 능력의 완전함을 배제한다면 그들 역시 보편적인 인간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신들도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일에 분노를 하며, 실수를 하고, 질투를 하며, 사랑을 갈구한다. 불완전한 멘탈을 가진 것은 여느 평범한 인간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장량의 삶에 깃든 신비로움도 쉽게 간과할 순 없다. 한나라를 건국한 뒤 부귀공명을 뒤로하고 적송자와 노닐다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은 그만큼 그가 여느 개국공신과는 다르게 겸손했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황석공과의 만남과 《태공병법》의 전수, 곡식을 끊고 화식을 먹지 않으며 노년을 보냈다는 이야기 등등... 장량의 삶에는 기이하고 신화적인 측면을 유독 많이 볼 수 있다. 동양 고전이나 문화, 역사 기술 필법에 능한 사람은 이를 합리적으로 분별하여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사실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와중에 이 책을 접했는데, 여느 다른 서적과는 다르게 장량의 삶을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책은 신화 속에 가려진 장량의 진면목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덕분에 《사기》와 《한서》를 읽으며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도 배울 수 있었다. 장량이 최고의 참모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치고 빠지는 부분을 잘 계산하는 임기응변 덕분이리라. 정확한 형세 분석은 기본이요, 언제 치고 나가야 할지, 누구와 동맹을 맺어야 할지, 언제 빠져야 할지 등등을 잘 계산하는 인물이었다. 혹자는 장량을 두고 유교적인 인물로 파악하여 신의가 있고 군자의 풍모가 있다고 칭송하지만, 내가 본 장량은 철저하게 도가적인 인물이다.

유가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만 도가는 인간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차갑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보자면 도가는 인간을 악하게 규정하는 법가보다도 훨씬 냉혹한 사상이다. 장량의 모책도 비슷하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도 서슴없이 저질렀으며, 작은 예절이나 법도에 구애받지 않았다. 참모에게 있어 중요한 점은 나의 책략이 통하느냐 안 통하느냐이다. 그 계책을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인의와 도덕을 지킬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도의적으로 잃는 것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계산해 봤을 때 이득이 많다면 이를 과감하게 주장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장량은 이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그렇기에 어느 상황에서는 도의와 대의를 쫓으며 명분을 따를 것을 강조했고, 어느 상황에서는 자질 구례한 예절보다 실제적인 이득을 취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책략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상황에 맞게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바꿔나갔다.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뛰어난 사람을 분류해보자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천재형, 두 번째 노력형.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량을 천재형으로 손꼽는다. 나도 그랬었다. 장량의 삶에 깃든 기이함과 신비로움은 선천적인 능력을 한층 우러르게 만드는 매개체들이니까. 그러나 그는 노력형 인물이었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금수저 도련님에서 협객, 방랑자, 의용군의 우두머리, 부활한 한(韓)나라의 재상을 거쳐 유방의 참모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심리 변화도 주목할 만 한데 처음에는 조국 한(韓)나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성격이었지만, 풍파의 세월을 겪으면서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난세를 종식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측면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는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입체적인 인물이었으며, 날 때부터 천재가 아닌 숱한 실패 속에서 자신을 가다듬은 노력형 인물이었다. 특출나고 비범한 삶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기 위해 분투한 지식인의 고독한 모습은 오늘날 노력이라는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책을 통해 실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장량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용의 전개는 기존의 평전 스타일이 아닌 역사소설처럼 풀어냈는데, 군데군데에 《사기》를 인용하여 서술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장량과 관련된 내용을 읊은 문인들의 시(詩)도 풍부하게 담고 있어 전기 특유의 무미건조함도 덜하다. 번역도 괜찮은데 《동주 열국지》, 《원본 초한지》 등등 장량과 관련된 배경을 다룬 소설 고전을 옮긴 역자의 솜씨라서 무난하게 읽힌다. 장자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자신 있게 권하고 싶은 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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