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기대하지 않고 보았던 영화는 예상 외로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갔으면서도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는 그 순간 까지만 해도 단순히 삼각관계를 그린 치정극 쯤 되는 영화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없이 도입부를 시작하고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더 이상 이 영화가 단순한 사랑 치정극을 다룬 영화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보다 영화에 대한 평점은 떨어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게의치않는 편이다. 영화에 대한 평점은 대중들의 평균적인 시선일 뿐, 영화 고유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나에게 가치 있으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를 보고 난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해주고 싶은 말은 그 어떤 리뷰에 현혹되지 말고 "당신이 직접 보고 느껴라!"라는 것이다. 가치있는 영화를 찾기 위해서는 당신이 많은 것을 보는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를 단순한 치정극으로 보지 않기 위해서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대략적인 줄거리만 알고 갔으므로 스페인 내전과 같은 사회적인 사건을 풍자코미디로 다루고 있을 것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단순한 사랑치정극으로 바라보게 된 영화는 그냥 잔인하고 사악할 뿐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사전에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면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감정이 섬세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영섭 평론가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러하다. 

 

 

 심영섭 평론가

 

우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936년 2월 총선거에서 스페인에 인민전선 내각이 성립되자 이것에 반대하는 프랑코 장군이 인솔하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치열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정부군 측을 강력하게 지원한 것에 반대하여 인민전선 정부군 측을 원조한 것은 소련뿐이고, 영국과 프랑스 등은 불간섭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로 인해 점차 정부군 측에 불리하게 되어 1939년 3월 마드리드가 함락되었고, 내전은 프랑코 장군의 반정부군 측 승리로 끝이 났죠. (편집자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그 이후에 프랑코 정권은 무려 35년간 통치를 지속했어요. 따라서 이 사실은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모르면 스페인어를 쓰는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상당 부분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그만큼 유럽 내에서 중요한 사건이죠. 전쟁 당시에 좌파와 우파를 합쳐서 군인은 35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에 보복이나 처형으로 인해 20만 명 정도가 더 죽었습니다. 또한 카톨릭 사제와 수녀가 약 7천 명 살해되었습니다.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는 영화에도 등장하는 전몰자의 계곡에 수만 명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프랑코도 거기에 묻혔다는 거예요. 오늘날 그곳은 숨기고 싶은 과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역사적 장소죠.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무덤을 거기서 옮기는 문제를 가지고 만날 싸워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겉으로 보면 치정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의미하는 것들이 있죠. 웃는 광대가 프랑코 정권, 공화당, 가해자라면 슬픈 광대는 그에 맞서는 공산주의자, 국민당, 반역자입니다. 그 둘 사이에서 좀처럼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계속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나탈리아는 스페인 국민처럼 보여요.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피 터지는 싸움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한 스페인의 어두운 역사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커스 단원은 뭘까요? 이상주의자, 방관자겠죠. 이글레시아는 이 네 부류를 모두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슬픈 광대도 웃는 광대에 맞서다가 결국 괴물이 되잖아요. 폭력의 속성이 드러나죠. 가장 사랑하는 것을 상실하고 나서야 스스로 어떤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죠. 따라서 이 영화는 광대에 맞서는 광대, 악마에 맞서는 악마, 독재자에 맞서는 독재자를 그린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코드로만 해석할 수는 없어요. 이글레시아의 영화는 늘 혼성모방, 복잡한 상징, 과잉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지가 계속 바뀌는 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탈리아는 처음에 천사 같은 이미지였죠. 후광을 받으며 하늘에서 내려오잖아요. 하비에와 사랑에 빠지면서 약간 달라집니다. 그들이 데이트를 즐길 때도 나탈리아가 현실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이끌어요. 유혹하는 겁니다. 마치 아담을 꼬시는 이브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 데서 팜므파탈 요소도 떠올리게 되죠.

 

(더 읽기: http://pariskitty.blog.me/165560783)

 

 

누가 가해자인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였던 부분이 바로 '누가 가해자인가?'였다.  웃는 광대 세르지오(프랑코 정권)는 나탈리(국민)를 사랑하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괴물이 되었다. 나탈리는 세르지오의 폭력성을 감당하기 힘들어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는 행동이라고 믿는다. 이 때, 웃는광대의 반대가 되는 슬픈광대 하비에(공산주의자, 국민당, 반역자)가 등장하면서 나탈리는 세르지오에게 느끼지 못했던 다정함에 반해 갈팡질팡하게 된다. 두 남자(정권)은 나탈리(국민)을 사랑한다는 이유하에 점점 잔인하게 변해가고 결국 셋 다 파멸로 이른다. 아니, 추가하자면 방관자였던 서커스단원(주변국)마저도 피해보지 않았던가?

 

드러난 표면적인 문제로 보자면 어린 시절 정부에게 희생을 강요당해 아버지 마저 잃었던 슬픈광대 하비에는 나탈리의 꼬임에 넘어간 피해자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변질했다. 심지어 그는 천사 나탈리의 소리를 들었다는 주장으로 연쇄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어떤 면으로 보자면 세르지오를 뛰어 넘는 광기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탈리는 어떠한가? 그녀는 두 남자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결국 두 남자를 파멸로 이끈 나탈리를 가해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돌고도는 사이클처럼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끝끝내 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가 남긴 것 

 

 어쩌면 많은 리뷰어의 말대로 이 영화는 다소 매니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특별한 영화를 보기 어디 쉬운가?  내전의 아픔을 우리네 영화와 달리 꼬집는 스페인 영화에 대해 한 번 놀라고, 사전 지식이 충분하다면 각 씬에서 상징화 처리 되는 인물이나 교회가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 대해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이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처절하다. 마지막까지 관객을 극단의 감정으로 몰고 간다.'라고 표현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내전의 역사를 코미돌 풀었으나 '코믹'하지 않았고 전쟁의 시발점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광기로 괴물이 되는 것은 시작이 어렵지 첫 걸음을 떼는 순간부터는 순식간에 흘러간다.  

 

미친 광기를 연기한 연기자들의 열연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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