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창녀다
이상우 감독, 권범택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영화 <엄마는 창녀다>는 제목만으로도 파격적이다. 그 동안 모든 엄마를 숭고하고 희생의 대명사로 여기던 인식을 싸그리 무너트리고 굴러다니는 종이조각보다 못한 싸구려로 만들어버리는 제목이다. 관객의 심리를 톡톡히 건드리고 깊은 추악함까지 끌고 들어가는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시놉시도 끝을 달리는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보고 나면 엄마는 창녀가 아니였다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영화는 에이즈에 걸린 노총각 상우, 그리고 몸이 불편한 엄마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삶을 꾸린 아버지와 그에게 딸린 교회광신도로 나오는 새로운 처, 방황하는 희수, 히키코모리 희철과 사촌, 혹은 그냥 게이소년으로 나오는 남자한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어쩐지 주인공만 들어도 '역시나 그렇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지만, 이들은 왜 이렇게 밑바닥에서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새로운 삶을 꾸린 아버지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맞이한 상우 모자는 서울 변두리 오두막이라고 말하기도 뭣 한 정말 초라하고 쓰러져가는 그 곳에서 상우가 포주가 되고 엄마가 창녀가 된다. 시간당 990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게시하는데, 손님이라고 해봐야 지체장애우 혹은 내일모레가 걱정되는 노인, 풀 곳없는 군인과 같은 사람들 뿐이다. 파격적인 돈을 받으며 엄마는 창녀노릇을 하고, 그 돈으로 모자는 삶을 영위한다. 고기를 사기도 하고 책을 사기도 하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렇다고해서 아들 상우가 엄마를 하찮게 여기거나 벌레취급하듯 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상우는 자신이 에이즈란 것에 대해 그리고 엄마가 창녀노릇을 한다는 것에 대해 강박증세를 보이기도 하며 또 세상과 유일한 끈인 엄마를 계속적으로 돌보며,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즉, 상우에게서 창녀엄마는 에이즈에 걸린 자신을 대신해서 몸이 불편한 엄마가 창녀노릇을 하여 돈을 버는 안타까운 존재이고 아버지로부터 버려진 아픔을 보듬고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인 것이다.   

 

 

 

 

  새로운 살림을 꾸린 상우의 아버지는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다. 영화에서는 상우의 모와 어떻게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집의 아들인 히키코모리 희철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며 이는 상우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도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히키코모리 희철은 집에서도 가족 그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런 희철은 아버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고 그는 가족들이 없을 때 희철을 무자비 하게 탐한다. 그 결과 마지막에서는 희철이 자살하기도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어쨌거나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는 상우에게 엄마 피 빨아먹고사는 못난 놈이라고 욕을 하지만, 상우는 오히려 그에게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희수와 새로운 가정에 충실하라는 충고만 남길 뿐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새로운 가족에 포함된 방황하는 희수는 상우를 좋아하며 쫓아다니고 급기야 한 번 자고 싶다고 말는가하면, 식물인간인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새로운 아버지(즉, 상우의 아버지)는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창녀다>에서 진짜 불행 혹은 끝의 시작은 상우의 엄마가 군인으로 부터 강간당하는 것과 창우가 게이소년에게 강간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창녀가 강간이라니 조금 아이러니 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창우는 엄마를 창녀 이면서도 창녀가 아닌 것 처럼 대하기 때문에 군인들의 반발심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엄마는 강간을 당한다. 상우는 지금 자신들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찰나 엄마가 납치되면서 영화는 조금씩 결말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엄마는 창녀다>를 검색하면 결말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 많은 물음이 올라온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의 견해는 이렇게 내리고 싶다.

이는 결말에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궁금하다면, 더보기 부분을 클릭하였으면 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아버지의 지금 처는 광신도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전 남편이 죽어바라기를 바라고 있고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상우 모자에게 교회찬가를 부르는 청년을 보내어 그들의 삶을 엿보기도 한다. 마침 두 사람이 현재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상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들은 엄마를 납치했다. 상우는 엄마를 찾아 샅샅이 헤매이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에게 까지 도움을 청하지만, 새로운 아내와 고기를 먹으며 상우를 외면한다. 상우는 아버지를 저주하고 자신이 더러운 피, 에이즈에 감염되어 더럽기도 하지만 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피라 더럽기도 한 그것을 주사기로 빼내어 며칠 후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갔고 그가 보게 된 것은 자신의 처지와 전혀 상반된 것들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장애인을 가두어 두고 끝내 죽음으로 닿게 했다'라는 뉴스, 상우 엄마에 관한 뉴스를 뒤로 하며 결혼 1주년과 전 남편의 죽음, 상우엄마의 죽음을 축배하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목에 자신이 혈액이 담긴 주사를 주입함으로써 상우의 복수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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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는 동안 제목이 주는 자극적인 요소라던가, 사회에서 불쾌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들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보단 이 영화를 만들었을 감독이 오히려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평범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조건을 하나씩 달아줌으로써 그들은 저 밑바닥까지 내려 앉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듣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주고 있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고 그 삶이 있다.

엄마라는 숭고한 이미지에 검고 붉게 창녀라는 이미지를 덧 씌웠지만, 엄마는 상우를 위해 우리가 익히아는 이미지데로 희생했다.

결국,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는 끌어내리고 밑바닥에 있어도 희생을 하며, 암울하기 그지 없는 삶속에서도 의지하고 부둥켜 안는 두 모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상우'가 실제 영화감독인 만큼, 아마 이 영화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기에 시리즈로 '아버지는 개다', '나는 쓰레기다'를 만들려고 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편한 제목으로 또 다른 삶 속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같은 시리즈인 두 영화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또 어떠한 시선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기대된다.

 

불편한 영화가 아닌 감독의 묵직한 메시지가 담긴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http://pariskitty.blog.me@은근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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