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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양장)
이경자 지음 / 사계절 / 2010년 6월
평점 :
<이상권님의 작품>
강원도 양양의 작은 마을이야기.
내게 강원도라 하면 어린 시절 한번인가 두 번인가 가보았던 태백과 영월정도 밖에 모른다.
그마저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어릴 적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지 않으면 기억하기 힘들 정도인 강원도의 이야기를 ‘순이’를 통해서 만나보았다.
순이를 펼쳐들고 강원도 사투리로 가득한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움과 더불어 읽기가 어려워서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처음 들어보는 "요너러 간나!"와 같은 말은 앞뒤문맥을 통하여 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투리란 것이 내가 살지 않았던 지방이었다 할지라도
몇 번 듣다보면 빠져들게 되고 어느새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이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 철이가 있다.
순이는 할머니에게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지만 어머니로 부터는 남동생 철이처럼 '남자애'가 아니란 이유로 혹은 '계집애답게 고운 맛이 없다'고 늘 구박 당하였다.
할머니에게도 순이는 말동무이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였는데,
큰아들은 바깥으로 자꾸 돌고 며느리는 군복수선을 해주며 돈을 만졌다고 무시하기 일 수 이었다.
그 외 나머지 아들들은 인민군과 군으로 불려간 뒤 어찌 된지 소식이 전해져오지도 않고 할아버지는 점잖지만 할머니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에게도 순이에게도 정붙일곳은 둘 뿐이었다.
순이는 영이라는 친구를 무척 좋아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주워 만든 사금파리그릇과 같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영이로부터 천주교와 천국, 하느님, 미국이야기를 들으며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상상과 희망했다.
그 즈음 순이 어머니는 자신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는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순이 어머니가 돈을 악착같이 모을수록 순이 아버지는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며 폭행을 일삼는 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알게 된다.
결국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자신이 산 골로 들어가야 아들내외가 집안에 함께 모여 가정다운 '가정'을 꾸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할머니와 떠나기로 마음먹게 된다.
할머니와 순이는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순이는 학교라는 곳에서 글자를 배우며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순이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자면 나의 할머니가 젊은 시절을 보냈을법한 배경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절의 흙내음을 맡듯이 책을 읽어 내려갔다.
'순이'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 가 없었다.
나도 순이 엄마와 같이 이미 세상물정을 알고 눈뜬 사람이라 이건지 순이 할머니, 순이의 소박하고 오늘 하루의 행복이 답답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것 하나 가지지 못했어도
친구하나로 또는 맛난 음식하나로도 행복할 수 있는 건 단 그 나이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순이' 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랬지만,
어린 순이는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미국과 천국이 나중에는 자신의 행복을 가져다 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오늘은 글자를 배우며 가까워 질 수 있다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고 누리는 행복이 이것저것 젤 거 없이 정말 순수했을 테니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순이'는 더 이상 답답하게 느껴지는 책이 아니었다.
어린 순이가 하는 행동들은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이 책에서는 할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순이를 통한 3대에 걸친 시선이 다양하게 교차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천주교가 들어온 만큼 천주교와 미국에 대한 시각도 다양하게 표현이 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3대의 시각은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까지 하였다.
시대를 모르는 할머니와 시대의 변화를 알게 된 며느리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이가 느끼는 행복은 모두 다른데 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책을 덮을 때 작가는 '천국과 미국이 배반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될 때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라는
것으로 지금 느끼는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의지할 곳 모두 달랐다는 것 을 살며시 띄우고 있었다는 점을
이 책을 덮을 때 쯤 깨닫게 되었다.
전쟁을 끝내고 난 뒤 세대 간의 시각차와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분단의 아픔까지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담아내어서
이마저도 순수하게 표현된 것처럼 느껴졌다.
간만에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투영된 세상을 바라본 느낌이 들었다.
심윤경 소설가님이 쓰신 추천사 중에서 ‘내가 살지도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경험이다.’ 라는 글이 있다.
(책 뒷면 표지)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 다름없는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내가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은 6.25전쟁을 겪고 분단의 아픔을 겪은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