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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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공간이 가지는 역할

홍성욱, 『실험실의 진화』를 읽고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인간은 주위의 도구나 공간이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행동, 생각 더 나아가 가치관마저 변화한다. 그만큼 ‘환경’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굳이 유년기나 청소년기 때의 환경이나 경험만이 인간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우리 주위의 도구와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사고와 생활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니체의 일화는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펜과 종이 대신 타자기를 사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문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우리의 생각이 외부로 표출될 때, 필연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겪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연구 방향이나 지식의 탐구가 변화하지 않을까. 많은 학자가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무수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실험을 행하는 장소인 ‘실험실’의 구축과 변화는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홍성욱의 『실험실의 진화』는 이러한 점에서 실험실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실험실이 자연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소거하거나 불가피하게 새로운 조건을 생성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생각대로 제어할 수 있는 ‘자연’을 실험실 내부에 조성하고 이를 토대로 여러 실험을 진행해 왔었다.

그러는 와중에 실험실의 형태 역시 시시각각 변화했다. 초기 실험실은 오늘날과 같이 연구소라는 간판이 박힌 고층 건물에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사비를 들여 집에 실험 관련 기구들을 들어놓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실험실’이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서적과 논문들을 보면서 컴퓨터로 레포트를 써 내려갔듯이, 당시 과학자들은 자신의 거처에서 개인적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정리하면서 여러 과학적 원리를 발견했다. 아이작 뉴턴이 대학을 떠나 고향에서도 빛에 대한 실험을 여럿 진행하고 광학이라는 학문을 구축한 것 역시 현대의 ‘실험실’이라는 개념이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험실이 현대와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근대 과학과 교육 제도가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국가나 학회, 대학, 기업 등 다양한 곳에서 학자들의 연구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실험실은 공적 장소로 나오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실험실은 설립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기존에는 연금술사나 화학자의 실험장만이 ‘실험실(laboratory)’라고 불리었지만, 점차 물리학, 생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위한 실험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학자와 연구원들의 실험 성과를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기도 한다. 실험실이라는 장소가 학자들의 실험 성과에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구조를 개방적으로 건설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를 활발하게 유도해 창의적 발견의 등장을 촉진하거나, 실제 자연환경과 가까운 공간을 만드는 등 연구소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실험실이 변화는 학자들이 실험실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험’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실험은 자연의 진리를 찾아내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정의에 의구심을 던지기 시작했다. 실험 속 결과는 어디까지나 몇몇 변수의 제어를 통해서 도출된 결과인데, 이것이 자연 속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과학자들의 실험과 그들이 도출해낸 결과가 정말 사회문화적,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실험 결과를 토대로 구축된 과학이라는 학문이 정말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저서는 루이 파스퇴르의 사례로 실험 역시 외부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계획된 실험이 사회에 큰 파장을 야기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학문의 권력화에 대해서 몇 개의 논문을 통해 접해보았는데 과학과 실험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은 내심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관련 저서들도 다수 소개하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이 책들을 탐독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문과로 진입하게 되면서 실험실에서 의미 있는 과학 실험을 해본 적은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실험실의 진화』라는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동떨어져 있었던 실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직접 실험을 해볼 일은 손을 꼽을 것 같지만 실험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알게 된 이상 이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학 때는 이과 동창들과 함께 과학철학 관련 저서들을 한번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P.S. 책의 장정이 독특하게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책이 불량품인줄 알아서 교환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렇게 제작되어 있는 것이어서 조금 놀랐다. 책의 장정이 접착제 비스무리한 것으로 종이들을 붙인 것에서 끝났는데, 이 과정을 통해 책을 펼쳐서 내용을 보기 한결 쉬워지는 것 같았다. 걱정과는 다르게 튼튼해서 나중에 나오는 책들도 이렇게 나오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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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말이 사라진 날 -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투쟁사
정재환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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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어학회를 재조명하다.

정재환, 『나라말이 사라진 날』

 



작년 초에 나왔던 영화 ‘말모이’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영화 시장에서 크게 흥행하지는 않았지만, 역사 재현물 중에서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플롯이나 반전이 있지는 않았다. 평범한 작품이었고, 어느 사극에서나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높게 평가받을 만했다. 이제까지 잊힌 역사적 사건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큰 무리 없이 각인시켰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큰 비중으로 회자된 적이 거의 없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 전말이 간략하게 실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언어가 민족의 결정 요소임을 생각했을 때, 조선어학회의 역할은 그 이상이었다. 근대 시기부터 이미 언어는 민족의 생사를 결정짓는 요소로 탈바꿈했다. 식민 제국은 식민지에서 쓰이는 언어를 탄압했고, 식민지인들은 반대로 자민족의 언어를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해방이 목전에 다다른 1940년대 중반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구한말부터 시작한 조선어 연구가 일제 강점기에 속에서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왔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조선어학회 사건을 중심으로 근대 시기에 한국어와 한글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제까지 ‘언문’에 불과했던 한글이 어떻게 ‘국문’의 위치로 올라섰는지, 구한말 국문학자였던 주시경 선생부터 시작된 조선어 연구의 학맥이 어떻게 해방 정국까지 계승되었는지를 개괄적으로 훑고 있다. 국문법과 표준어 체제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책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저자가 조선어학회에 관한 사실들을 알리기 위해 큰 공을 들인 흔적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대표적인 일례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흔히 알려진 인식이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열차를 타던 여학생들이 조선어로 대화하던 것이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말이 사라진 날』에서는 다소 생소한 사건들을 전한다.


역에서 지인을 기다리던 박병엽이 역에서의 불심검문을 통해 의심받게 되어 가택수사가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그의 조카 박영희의 일기장이 일제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국어(國語)를 사용하다가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박영희는 ‘국어’가 조선어를 지칭한다고 설명해 선생님과의 연관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수사를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해당 책 내용의 신빙성에 의구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련 자료 조사를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나라말이 사라진 날』에 실린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민족서사의 탄생」(장신, 2016.)이라는 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해당 논문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에 대한 갖가지 설들을 비교하면서 일기장 발단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이설들은 당대의 사회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해당 책의 말미에서 설명하듯이, 이렇게 다양한 가설이 공존했던 이유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한 명확한 문건과 물증이 별달리 없어 관련인들의 증언에 따라 재구성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저자는 열차에서 조선어로 대화한 여학생 이름이 ‘박영옥’이라 알려진 것 역시 당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 추측에 대한 진위 여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저자가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자료 수집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지막 장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의 최종판결문에 대한 요약과 조선어학회에 대한 평론은 이러한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조선어가 억압받던 일제 강점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 국문법의 기초는 이때부터 세워졌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등 다양한 문법 통일안을 내세웠고 - 이에 관한 여러 논박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 현대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어학회가 세운 기준은 거의 유지되었다.


회원들은 한반도 내에서 사용되는 한국어를 하나로 만들 방안을 강구하면서도 조선어 보급 운동,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 교육 사업 등 다양한 활동으로 한반도 내에서 조선어가 계속되게 했다. 조선어학회는 자신들의 활동이 독립운동 중 하나임을 알면서도 ‘정치와는 관계없는 학술 활동’으로 대외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점은 조선어학회가 해방 직전까지 일제의 탄압을 회피하면서 조선어 관련 활동을 지속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선어학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해방 이후 한국어는 일본어를 빠르게 대체할 수 있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조선어학회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어 연구가 어떠한 의의를 지닌 채 진척되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조선어학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볍게 일독해 보는 것을 권하는 바이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 ( https://cafe.naver.com/booheong/198430 )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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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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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에 빠지다

하야미 가즈마사 저, 박승후 역, 『무죄의 죄』 -

 


만화나 영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본 뒤에는 정신이 멍해질 때가 많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 머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감성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이성은 그런 감성을 달래려는 듯 계속해서 작품 속 이야기를 재구축한다. 그래도 확실한 점은 내가 확실하게 작품에 감정이입하고 흥미롭게 읽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맞는 작품을 찾았다는 생각에 그날만큼은 잠들 때까지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다.


솔직히, 이 일련의 과정이 소설책을 통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소설과의 궁합이 맞지 않는다기보다는 소설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소설책이라고는 정확히 1년여 전에 읽은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SF 장편 소설 서너 권에 불과하다. 최근이라고 말하면서 1년여 전 경험을 끌어오는 시점에서 아무래도 문제가 좀(?) 심각하다. 그러나 인지하면서도 이 편향적인 – 타인은 편집적이라고도 말할 – 독서 습관은 고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을 통해서 내면에 지닌 하나의 관습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난 뒤 후유증에 제대로 빠져버린 탓일 것이다. 안내 책자에 “이 책의 후유증에서 사흘이나 빠져나오지 못했다.”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장편 소설인 『무죄의 죄』(원제는 ‘イノセント・デイズ(innocent days)’ - 역자가 지은 제목도 작품을 관통하지만, 저자의 원제도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한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경위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다나카 유키노. 인위적으로 옛 연인이 살던 집을 방화했다는 혐의에서였다. 그러나 소설의 초점은 방화 사건이 아니다. 그녀의 사형 판결문의 문장 어두를 따와 만들어진 소제목을 가진 각 장은 유키노의 인생에 주목한다. 그녀의 유년기부터 성년기까지 소설은 그날의 진상을 하나하나 규명해 낸다. 그것도 유키노가 아닌 주위에 있었던 그와 그녀들의 눈길로. 유키노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부분은 얼마 없다. 독자는 유키노 주변인들이 유키노를 평하는 대로 유키노의 생각과 가치관을 추측해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이 유키노와 그녀를 축으로 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한편, 각 장은 관계가 없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짜여 있다. 유년기의 인물이 소년기, 더 나아가 성년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은 유키노를 둘러싸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면서 그녀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러면서 각 장에 뿌려졌던 복선들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돌아온다. 저자가 곳곳에 뿌려놓은 복선에 한두 번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복선이 복선인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복선이라는 장치의 효과를 이토록 강하게 주었던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작품을 읽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작품의 후유증에 빠져있다. 유키노의 일생을 떠오를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학창 시절이었다. 소설 속의 공상과 현실을 순순히 동치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제까지의 일생을 자연스레 곱씹어보게 되었다. 정도는 달라도 비슷한 궤에 있는 일들은 내 주위에도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는 잘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전부 그렇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잘 풀리지 못했던 나머지 일들도 제대로 대면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란 꽤 복잡한 생물이라서 말이다. 생각하는 걸 다 말로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언젠가 네가 만날 누군가는 네가 뭐라고 해줄지 기대할 거야.

그런데 잘 설명할 수 없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할 수도 있지.

그러니 그 누군가를 진솔하게 대하고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상상해주어야 한단다.”

 


상상. 안타깝게 타인에 대한 진정한 상상은 그 사람과 접촉하기 이전보다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후회 비스무리한 무언가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 주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그만큼 비례해서 평소에도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그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이름이 붙이기도 하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이 후유증에서 단기간에 빠져나오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의미 있는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후유증이 계속 지속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스터리물을 표방한 이 책의 중심에는 하나의 범죄 사건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범죄는 탁해져 하나의 수사가 될 뿐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유키노와 소설 속의 등장인물뿐만이 아닌, 거기에 자신이 더해진 그 무언가이다. 후유증이 무엇인지 궁금하거나 한번 빠져보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일독해보기를 권한다. 아마 삶을 돌아볼 좋은 기회를 가져다주는 후유증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좋아지긴 했어도 언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재개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지금, 가끔은 과거를 되돌아볼 후유증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이 책은 김영사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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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
마크 모펫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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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저자의 이력이었다. 저자인 마크 모펫은 곤충학자이다. 그런 그가 인간의 사회 구성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매우 의외의 사실이다. 인류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닌 곤충학자. 곤충이 대체 인간 사회와 어떠한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선입견들을 제거하면서 ‘곤충학자’가 바라보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의견들을 전개한다.


사회가 왜 형성되었는지는 학자들의 논제였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이 이루는 사회는 매우 체계적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사회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표였다. ‘사회계약론’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 산물이다. 루소, 홉스, 로크를 비롯한 사회계약론자들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한 이유가 ‘안전 보장’과 ‘협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철학적 수사에 더 가깝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들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협력을 위해 사회가 조직되었다.’라는 가설은 몇 가지 전제를 토대로 도출되었다. 우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높은 사회적 지능을 보유했고, 그 결과 인류는 동물과는 구분되는 체계적이고 복잡한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협력’과 ‘안전보장’이라는 가치 지향이 사회의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전제들을 다양한 과학적 근거와 반례들을 통해 반박한다.


책은 동물들도 다양한 사회를 조직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지능이 매우 낮은 절지동물인 개미와 벌들마저! 곤충학자 마크 포맷이 인류학 저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는 개미들이 이루는 군집 사회가 유인원 사회보다 훨씬 더 인류 사회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상을 기억한 개체만을 사회의 일원으로 판단하는 유인원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개개인의 인상을 기억하면서도 개미들과 같이 ‘표지’를 통해 사회 구성원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가 유인원 사회와 달리 규모를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표지를 통해 내부인을 효율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협력을 이유로 사회가 조직되었다는 가설 역시 저자는 극구 부인한다. 그는 사회가 협력이 아닌 소속감과 표지를 통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협력 관계만으로는 형성되지 않는, 그 이상의 개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동물 집단 속에서도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군집들도 있지만, 이들은 그저 일시적으로 협력할 뿐, 사회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내에서 여러 분열이 일어나지만, 그 사회가 곧바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는 사회가 단순히 협력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개념이라고 한다.


책은 이제까지 우리가 사회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전제와 고정관념을 깨부수면서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한다. 주장을 전개하면서 많은 동물 사회, 수렵채집 사회, 정착 사회의 사례들을 가져옴은 물론이다. 저자가 유인원들을 연구하는 동물학자나 고고학자, 인류학자가 아닌 곤충학자였기에 이러한 참신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한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라는 민족에 관한 참신한 의견을 내놓았듯이 말이다.

 

후반부로 나아가면서 사회의 형성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습성과 인류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도 상세히 논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인간은 소속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본능’으로 말이다. ‘인간의 비인간화’, 저자는 이 현상을 그렇게 정의했다. 인류 사회의 태동기에는 외집단에 소속된 인간들과 접촉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고, 외집단이 소속 집단에 어떠한 해를 끼칠지도 모르기에 발달한 습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는 일부 외집단 인원들로 전체 집단을 판단하는 ‘선입견’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소속 집단과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손익을 따져 수용과 배척을 결정하기 이전에 일단 배척해 미처 모를 위협을 배제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대처 방식이었다. 그리고 현대 인류는 수렵 채집인들의 생활방식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인지 구조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의 여러 비극은 인류가 선사 시대의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사회 구조는 필수적이었다. ‘외부인’이 있기에 ‘내부인’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우리와 구분시킬 남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인 표지와 소속감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류 역사상 어느 곳에서도 한 사회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례는 없었다. 설령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더라도 인류 사회는 분열을 거듭함으로써 자신과 대비시킬 ‘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범세계주의, 세계시민주의가 얼마나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할지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실제로 범세계주의를 몽상에 불과한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사회로 묶는 것 역시 엄청난 난관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인류 역사상 다수의 사회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의 사회로 통합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국을 건국하고 화려한 문명을 뽐내기 위해 극소수 사회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전쟁에서 이겨 타 집단을 예속화하고 노예로 삼는 것이 문명과 제국을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가 인류 사회 속에서 적자생존과 자연도태가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일일종의 우생학 논리를 옹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의 본능’에 대해 숙지하고, 과거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 (물론 인류가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회의적이지만.) 그가 말하는 사회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다문화주의’이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사회는 변혁을 거듭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인류의 본성을 밝히면서 그 본성에 주의하고 이용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에 관한 서적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아직 동물 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인류는 자연과 분리된 삶을 영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저 인류의 생활방식이 그러할뿐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앞으로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할까. 만약 수렵 채집인의 본능이 아직도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본능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경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분열과 배척을 반복하면서도 이익을 위해 평화를 구축하고 교류하는, 인류의 본능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 속에 그 답은 존재한다고 어렴풋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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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을 넘어, 생각하라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읽고 -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책의 내용과 논리가 짐작이 갔다. 아, 환경 보호에 관한 책이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살면서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TV에서, 사회에서 잊을 때만 하면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환경 이야기이다. 많은 시민 단체들이 환경 보호에 대해 외치며, 각국 장관들은 기후 관련 국제 협약을 매해 작성한다. 이 책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는 다방면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있으며, 인류 사회, 특히 선진국들이 나서서 고쳐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환경이 어느 정도로 파괴되고 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사람들이 접하더라도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까. 환경 보호에 관련된 소식과 서적들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다. 이 책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줄 수 있을까?

 

환경 보호라는 구호는 무려 반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원자력과 같은 새로운 힘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과학 기술이 인류가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학계에서도 과학적 낙관주의가 자리잡았다. 과학 기술을 통해 인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유토피아의 길을 열 것이라는 상상을 모두가 하던 시기였다. 환경 문제는 그 상상을 깨트리고 하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하나의 파장이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라는 현실을 말이다.

환경 운동가와 뜻이 있는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세계에 – 특히 풍요로운 선진국 국민에게 –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 씨가 말하듯이, 인간은 가지가지의 방법으로 환경을 파괴했다. 동식물을 죽이고, 바다를 더럽히고, 땅에 독극물을 부었다. 푸르렀던 하늘은 어느새 땅과 다름없는 색을 띠었다. 모든 것은 보다 인류가 안락해지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일부 인류였지만.

2020년이 다 되었지만, 딱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소소한 성과라면 프레온 가스(CFC) 사용이 범세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협의한 정도일까. 그런데 이것도 최근에 개발도상국에서 사용되면서 무위로 돌아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산화탄소와 메테인은 제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요와 공급 원칙에 맞추어 탄소 배출권 제도 등 여러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나 마찬가지였다. 탄소 배출권 제도는 어찌 보면 오히려 선진국이 합법적으로 온실 기체 배출량을 늘릴 수 있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에 생태계가 파괴되는 속도는 가팔라지고 사람들의 소비량은 늘어나기만 했다. 대안으로 대두된 신재생 에너지 산업도 매년 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했듯이, 그것보다는 인류가 쓰고 버리는 에너지가 증가하는 게 더 빨랐다. 신재생 에너지에만 목을 매어서는 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책의 내용은 이제까지 읽어본 환경 관련 서적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치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물을 학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대기를 오염시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런 이야기. 내용과 논리가 더 치밀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환경 관련 정보를 어떻게 분석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관해서는 좋은 책이었다. 책 끝에는 이제까지의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에 대한 방법도 간략하게 붙여두기도 했다. 자원 고갈 문제를 다룰 때 셰일 가스 이야기까지 짚어주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이것은 곁가지 문제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본질 자체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해 주고 있었으니까.

환경 문제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환경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문제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게 핵심이다. 사실 인류의 소비는 너무나도 당연시되어서 소비를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가 없다. 현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하더라도 막대한 양의 자원이 들어간다. 세계화는 사회 구성원들이 더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했지만, 그것은 ‘인류 사회’에서의 효율성이었지 ‘지구 사회’에서의 효율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지구의 효율성보다는 그들 사이의 효율성이 더 중요하고 목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다들 애매한 태도만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태도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인류가 멸망해도 된다는 의연함을 지니고 지금처럼 살던가, - 의연함보다는 한심함 같지만 – 아니면 가치관을 바꾸거나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환경 문제를 머릿속에 확실히 지녀야 한다.

개인적으로 인류가 환경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로 인한 자신의 미래가 잿빛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현재를 유지한다면, 비난할 생각은 그다지 없다. 아직 그런 상태는 아니기에 비난을 멈추지는 않고 있다. 그래도 너무 냉소적인 걸까. 회의주의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서일지도 모른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을 읽고 인류도 다른 생명체와 별다를 게 없는 신세라는 점을 여실히 느꼈다. 그렇다, 지구계는 일종의 닫힌계이기 때문에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인류가 사용할 에너지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에 성공하더라도 인류가 언젠가 소멸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러한 생각이 무심코 드는 것을. 그래도 회의주의적인 생각은 결국 내가 지금 편안하기에 드는 생각에 불과하다. 자신이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환경에 있다면, 이러한 생각은 배부른 소리이다.

가끔은 환경 파시즘(Eco-Fascism)의 논리가 끌린다. 인류의 반을 절멸시키겠다는 영화 속 빌런, 타노스를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의견에는 공감이 어느 정도 갔다. 나 자신이 그러한 일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동조심이 들었던 이유는, 왜냐하면 이 상황이 계속되었다가는 어차피 결국 인류의 반이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반만 죽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기 온도가 상승하면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될 것이고 근미래의 인류는 모든 농작물을 온실 속에서 기를지도 모른다. 마치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SF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가. 살아가기 위한 필수 자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타노스가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인류 사회가 – 빈민층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제거해 나갈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다. 물론 그렇다고 환경 파시즘과 관련된 도덕적 쟁점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 파시즘 측의 주장에 솔깃하게 된다.

 

앞으로 환경 운동에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든, 확실히 하고 싶은 점은 환경 문제가 더는 ‘불편한 진실’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편안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그것을 향유할 때 ‘환경’이라는 사고가 있어야만 한다.

혹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환경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굳이 환경 문제로 심의 있는 토론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 사회는 세계적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스스로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관찰자가 가지는 한계에 불과하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 구성원들은 여러 방안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얻고, 충돌하고, 절충해 왔다. 위기의 극복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과실이었다. 그리고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의견대로 사회를 끌고 나가지는 못해도, 사회가 많은 생각을 반추하게 하고, 어느 정도의 개혁을 불러온다.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번에 읽은 호프 자런 씨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을 읽으면 - 그와 관련해서 더 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기에 - 더욱 좋겠지만, 다른 책들도 많다. 레이첼 카슨 씨의 『침묵의 봄』과 같은 책들 말이다.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고, 따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이 말이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자아 정체성이나 존재론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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