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무리, 왜 무리지어 사는가
마크 모펫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0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저자의 이력이었다. 저자인 마크 모펫은 곤충학자이다. 그런 그가 인간의 사회 구성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는 것은 매우 의외의 사실이다. 인류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닌 곤충학자. 곤충이 대체 인간 사회와 어떠한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선입견들을 제거하면서 ‘곤충학자’가 바라보는 인간 사회에 대한 의견들을 전개한다.
사회가 왜 형성되었는지는 학자들의 논제였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이 이루는 사회는 매우 체계적이었고, 많은 사람에게 사회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서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표였다. ‘사회계약론’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 산물이다. 루소, 홉스, 로크를 비롯한 사회계약론자들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한 이유가 ‘안전 보장’과 ‘협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철학적 수사에 더 가깝지만, 대다수 사람은 이들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협력을 위해 사회가 조직되었다.’라는 가설은 몇 가지 전제를 토대로 도출되었다. 우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높은 사회적 지능을 보유했고, 그 결과 인류는 동물과는 구분되는 체계적이고 복잡한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협력’과 ‘안전보장’이라는 가치 지향이 사회의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전제들을 다양한 과학적 근거와 반례들을 통해 반박한다.
책은 동물들도 다양한 사회를 조직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지능이 매우 낮은 절지동물인 개미와 벌들마저! 곤충학자 마크 포맷이 인류학 저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는 개미들이 이루는 군집 사회가 유인원 사회보다 훨씬 더 인류 사회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상을 기억한 개체만을 사회의 일원으로 판단하는 유인원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개개인의 인상을 기억하면서도 개미들과 같이 ‘표지’를 통해 사회 구성원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가 유인원 사회와 달리 규모를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표지를 통해 내부인을 효율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협력을 이유로 사회가 조직되었다는 가설 역시 저자는 극구 부인한다. 그는 사회가 협력이 아닌 소속감과 표지를 통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협력 관계만으로는 형성되지 않는, 그 이상의 개념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동물 집단 속에서도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군집들도 있지만, 이들은 그저 일시적으로 협력할 뿐, 사회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내에서 여러 분열이 일어나지만, 그 사회가 곧바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는 사회가 단순히 협력을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개념이라고 한다.
책은 이제까지 우리가 사회에 대해 막연히 가졌던 전제와 고정관념을 깨부수면서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한다. 주장을 전개하면서 많은 동물 사회, 수렵채집 사회, 정착 사회의 사례들을 가져옴은 물론이다. 저자가 유인원들을 연구하는 동물학자나 고고학자, 인류학자가 아닌 곤충학자였기에 이러한 참신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한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라는 민족에 관한 참신한 의견을 내놓았듯이 말이다.
후반부로 나아가면서 사회의 형성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습성과 인류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도 상세히 논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인간은 소속 집단에 속하지 않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본능’으로 말이다. ‘인간의 비인간화’, 저자는 이 현상을 그렇게 정의했다. 인류 사회의 태동기에는 외집단에 소속된 인간들과 접촉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고, 외집단이 소속 집단에 어떠한 해를 끼칠지도 모르기에 발달한 습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는 일부 외집단 인원들로 전체 집단을 판단하는 ‘선입견’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소속 집단과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손익을 따져 수용과 배척을 결정하기 이전에 일단 배척해 미처 모를 위협을 배제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인 대처 방식이었다. 그리고 현대 인류는 수렵 채집인들의 생활방식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들의 인지 구조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세기의 여러 비극은 인류가 선사 시대의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사회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사회 구조는 필수적이었다. ‘외부인’이 있기에 ‘내부인’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우리와 구분시킬 남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인 표지와 소속감은 의미가 없어진다. 인류 역사상 어느 곳에서도 한 사회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례는 없었다. 설령 그러한 환경이 조성되더라도 인류 사회는 분열을 거듭함으로써 자신과 대비시킬 ‘남’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범세계주의, 세계시민주의가 얼마나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할지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실제로 범세계주의를 몽상에 불과한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사회로 묶는 것 역시 엄청난 난관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인류 역사상 다수의 사회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의 사회로 통합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제국을 건국하고 화려한 문명을 뽐내기 위해 극소수 사회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전쟁에서 이겨 타 집단을 예속화하고 노예로 삼는 것이 문명과 제국을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가 인류 사회 속에서 적자생존과 자연도태가 자연스레 일어난다는 일일종의 우생학 논리를 옹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의 본능’에 대해 숙지하고, 과거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 (물론 인류가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회의적이지만.) 그가 말하는 사회 발전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다문화주의’이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사회는 변혁을 거듭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인류의 본성을 밝히면서 그 본성에 주의하고 이용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에 관한 서적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아직 동물 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인류는 자연과 분리된 삶을 영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저 인류의 생활방식이 그러할뿐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앞으로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할까. 만약 수렵 채집인의 본능이 아직도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본능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경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분열과 배척을 반복하면서도 이익을 위해 평화를 구축하고 교류하는, 인류의 본능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 속에 그 답은 존재한다고 어렴풋이 믿는다.